From status to contract (Henry Maine)
'신분에서 계약으로'(From status to contract). 영국 법학자 헨리 메인 (Henry Maine)이 <고대법>(Ancient Law)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근대법의 원칙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간의 활동이 계약관계가 아니라 신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신분관계가 주인이 종을 전인격적으로 지배하는 노예제도인데, 노예제도는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러시아의 농노해방, 미국의 흑인노예해방, 우리의 반상(班常) 차별 철폐는 불과 150년 전인 19세기에 말에야 비로소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3천 년 전에 쓰인 구약성서에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살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힌 출애굽기의 노예해방 선언입니다.
6년 동안 노역에 종사한 노예들은 7년째 되는 해에 해방되어 자유를 얻습니다. 이 해방을 히브리어로 하파쉬(חָפַשׁ)라고 합니다. 하파쉬는 노예제도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은혜요, 진취적인 사랑의 섭리입니다.
이집트에서 400여 년 동안 노예생활을 온몸으로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새 땅에 들어가 그 참혹한 노예제도를 없애라고 명령하십니다(출애굽기 21:2). 노예의 신분은 자신뿐 아니라 자자손손 세습되는 평생의 족쇄인데, 성서는 이미 3천여 년 전인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신분적 노예제도의 폐지와 6년 기간의 계약적 노동관계를 선포한 것입니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근대법의 원리가 이미 3천년 전에 선포된 것입니다.
하파쉬는 종살이 7년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종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종을 풀어주어야 합니다.(출애굽기 21:26,27)
사회적 약자인 노예를 제도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하파쉬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은 신명기 신학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15:12~18). 남유다왕국은 시드기야왕 때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했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노예를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종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증언합니다(예레미야 34:9~16)
옛적부터 노예제도는 국가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가장 쉽고 매우 편리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노예해방은 왕국의 존립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노예제도는 폭력과 인권탄압이라는 죄성(罪性)의 바탕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비인간적 제도입니다. 그것을 기초에서부터 무너뜨린 출애굽기의 하파쉬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앙적‧정신적 혁명이자 정치적‧사회적 진보였으며,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해방의 은총이었습니다. 하파쉬는 '노예들을 억압으로부터 해방'한 사랑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배계급을 죄성으로부터 해방'한 은총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가져온 8‧15 민족해방도 하파쉬의 은총 없이는,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는 사랑 없이는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합니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넘어 이제는 '계약에서 사랑으로'(From contract to love)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은 해방의 완성입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 사도의 권유입니다(베드로전서 4:8).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하파쉬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