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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편집자 서문]
칼 세이건은 과학자였다.
브루클린에서의 어린 시절, 그는 회당에서의 예배 때마다 <신명기>에 나오는 바하브타 기도(유대교에서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기도 ‘세마’이스라엘에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옮긴이)를 히브리어로 암송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기 6장 5절). 그는 이 계명을 명심했고, 어쩌면 이로부터 영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처음으로 던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뭔가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뭔가를 질문하고 배우는 우리 인간의 능력보다도 더 큰 힘이 과연 있을까?
자연에 관해, 또 우주의 광대함과 우주 진화의 경이로운 시간 척도에 관해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그는 점점 더 지적으로 향상되었다.
성서에서는 그야말로 영원하고 전능한 존재로 묘사된 창조주가, 어떻게 창조에 관해서는 그토록 많은 오해의 소지를 남겨 놓은 것일까?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어 했다.
우리가 자연에 관해 극히 조금밖에는 모른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도 극히 조금밖에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믿었다.
삶의 질문들 가운데 가장 깊은 것에 대해서도 과학적 방법을 적용해야 마땅하다는 견해를 사람들은 과학주의로 매도하기 일쑤다.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종교적 신앙이라는 것이 과학적 검증의 치외 법권 지역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검증 가능한 증거가 없이 이루어진 확신)만으로도 지식을 얻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칼도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은 뭔가를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뭔가를 알아내려는 열망”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의 골수 이식 수술을 거친 뒤인 1996년 12월20일, 그는 마침내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칼은 뭔가를 믿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알고 싶어 했다.
지금부터 500년 전에만 해도 지금처럼 과학과 종교를 갈라놓는 벽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때에는 이 두 가지가 하나이며 똑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특히 1985년 글래스코 대학교에서 열린 자연 신학에 관한 기퍼드 강연에 강사로 초청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 강연에 나감으로써 지난 100여년간 활동한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이며 철학자들의 발자취를 계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홉 번에 걸친 칼의 기퍼드 강연이 시작될 때마다 전례대로 칼을 소개하러 나온 그 대학의 저명인사들은,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든 청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더 큰 장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깜짝 놀라고는 했다. 나는 칼이 한 말의 의미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바꾸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그래도 편집자로서의 재량을 발휘해 그 우아한 소개의 말이며, 녹취록에 수도 없이 반복된 (웃음) 표시를 모조리 들어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0세기의 첫 번째 해에 기퍼드 강연을 했다. 그는 훗날 이 강연 내용을 토대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애독되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책을 펴냈다. 칼은 제임스가 종교를 가리켜 “ 우주 속에서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라고 정의한 것에 대해 감탄한 나머지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의 결말에서 우주 속 인류의 미래에 관한 자신의 전망을 소개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2006년 3월 21일 뉴욕주 이타카에서 앤드루안
[저자 서문]
이 강연에서 저는 기퍼드 재단의 도움을 받아 이른바 자연 신학에 관한 저의 견해 가운데일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 신학이란,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 세계에 관한 앎이 반드시 계시를 통해서만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 말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학과 종교 사이에 위치한 이 광범위한 분야에 관한 저 자신의 개인적 견해일 뿐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글의 양만해도 그야말로 오마어마해서, 대략 1000만쪽, 또는 대략 10의 11승 비트의 정보에 달하니 말입니다.
1강. 자연과 경이 : 하늘 탐사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무신론의 낭떠러지와 미신의 늪 사이에서 아주 힘든 길을 나아가게 마련이다.“-플루타르코스-
제가 생각하기에 미신의 특징이란, 어떤 지식에 대한 허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추구하는 그 방법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미신이야말로 매우 간단한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미신은 한마디로 증거 없는 믿음입니다. 그럼 ‘증거’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야말로 이 강연에서 제가 여러분께 설명할 흥미로운 주제인 것입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Religion은 함께 묶는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을 이어 붙인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따로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 사이의 근원적인 상호관계를 추구한다는 종교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에서 보건대, 과학과 종교의 목표는 결국 동일하다고, 또는 거의 동일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가지 분야에서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억이나 60억이나 70억 년이 지나면 태양은 적색 거성이 될 것이며, 수성과 금성, 어쩌면 지구의 궤도까지도 삼켜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는 태양의 내부로 흡수되고 말 것입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은하의 중심, 그러니까 궁수자리라는 별자리 쪽에는 수많은 태양들이 모여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조상을 아주 크게 만들려고 노력한 바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매우 작게 느끼도록 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면, 그들은 굳이 허접한 우상들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작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다면야 그냥 하늘을 울려다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을 거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결국 종교적 감수성이란 불가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은하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폭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폭발로 생긴 천체를 퀘이사(quasar,준성)라고 합니다.
사실 은하수 은하 자체만 해도, 지구에서 약 3만 광년 떨어진 그 중심부에서는 일련의 폭발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
2강.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 : 현대의 자신감 상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식 -특히 자신의 인식-이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자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에서는 흔히 하는 이야기입니다.
1572년에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초신성이 폭발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던 별이 갑자기 밝게 빛나기 시작해서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즉 만약 하늘에서 아무것도 변하지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갑자기 저런 별이 나타난 것이며 - 여기서 갑자기란 별이 전혀 안 보이다가 육안으로도 쉽게 보일 정도가 되는 일주일가량의 시간을 말합니다.- 또 어떻게 저렇게 몇 달 동안이나 밝게 빛나다가 사그라지는 것일까? 뭔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번에는 눈에 아주 잘 띄는 혜성, 즉 1577년 혜성이 나타났고, 튀코 브라헤는 그 위성을 관찰하기 위한 국제적인 모임을 조직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수십년이 흘렀을 때였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그 혜성이 이 아래 지구의 대기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 아니면 저 위의 행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현상인지를 관찰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혜성을 기상현상이라고 주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불변하는 하늘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브라헤는 만약 그 혜성이 지구 근처에 있다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관측자가 관측했을 경우, 혜성의 배경에 오는 별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시차라고 하는데, 여러분도 윙크를 해 봄으로써 이 원리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손가락 하나를 여러분의 코앞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치켜든 다음, 처음에는 왼쪽 눈으로 윙크를 하시고, 그 다음에는 오른쪽 눈으로 윙크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윙크를 할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실 겁니다.
브라헤는 만약 그 혜성이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치면, 지상에서 두 명의 관측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 혜성의 천구상 위치는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 추론했습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혜성의 위치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즉 시차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그 혜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시계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마우 정밀하게 만들어진 회중시계를 하나 맞닥트린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그 뚜껑을 열어보니, 모든 것이 틱,틱,틱,틱 하고 돌아가고 있는데, 그 안에는 톱니바퀴며 지레며 반짝이는 놋쇠며 하는 것들이 있고, 이런 것들은 결코 자연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런 복잡한 메커니즘의 존재, 즉 시계의 존재는 시계 제작자, 즉 시계공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제 유기체를 한번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그중에서도 아주 단순한 유기체인 세균 하나를 예로 들어 볼까요. 그걸 들여다 보면, 여러분은 회중시계 하나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균 한 마리는 회중시계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가동 부품과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그러니까 회중시계 만드는 법을 종이 위에 자세히 적어 놓은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세균이 그야말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다윈은 자연 선택을 통해 시계 제작자의 존재 말고도 다른 설명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문자 W로 시작하는 궁극의 시계 제작자(Watchmaker, 즉 하나님)의 개입 없이도 보다 무질서한 자연계로부터 놀라운 질서가 나타날 수 잇음을 설명해 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 선택이었습니다.
뉴턴은 태양계에 어떤 뚜렷한 평면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핵심은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제안한 바였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준 사람은 바로 뉴턴이었습니다. 태양을 도는 행성들의 궤도는 하나같이 흔히 황도면(황도대에 위치한 별자리들이 이면에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이라고도 하는 식(蝕)의 면 근처에 있습니다. 여러 행성들이며 태양과 달이 겉보기에 황도대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왜 모든 것이 이토록 규칙적인가? 뉴턴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모든 행성들은 똑같은 평면에 위치하는가? 왜 이 행성들은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것ㅇ니가? 수성의 공전 방향과 금성의 ㄱ오전 방향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행성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태양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뉴턴이 아는 한, 모든 행성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자전했습니다. 행성들은 뭔가 놀라우리만치 규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초기 조건을 설정 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타당한 결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영역에서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보였던 뉴턴조차도 여기서는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해법의 개요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이마누엘 칸트와 라플라스 후작 피에르시몽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제각기 제시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은하가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주 팽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팽창 속도를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과거로 외삽해, 모든 은하들이 워낙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사실상 서로 붙어 있다시피 했던 것이 얼마나 오래전이었는지를 알아볼 수도 잇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의 기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연대 결정을 시작할 수 있었던 변칙적인, 또는 기묘한 환경이기는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추산에 따라 제각기 다르지만 대략 140억 년입니다.
뉴턴의 중력법칙은 역제곱 법칙입니다. 중력을 지닌 물체 둘이 있다고 할 때, 이 물체들 사이의 거리가 2배로 되면, 중력의 끌어당김은 4분의 1이 됩니다. 둘 사이의 거리가 10배로 되면, 중력의 끌어당김은 100분의 1이 됩니다. 이런 식입니다. 사실상 정확한 역 곱 칙으로 터 약간만 일탈해도 항성이나 행성의 궤도는 불안정해지고 맙니다. 가령 중력의 역세제곱 법칙이나 역네제곱, 역 다섯제곱 법칙을 따른다면, 행성들은 나선 궤도를 그리며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겁니다. 결국 파괴되겠지요.
중력법칙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정확히 역 제곱 법칙이 되었을까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고 서로의 주위를 돌고 있는 이중 은하조차도 역제곱 법칙을 정확히 따르고 있습니다. 왜 다른 종류의 법칙은 아닐까요?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아니면 역 제곱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원자의 안전성을 생각해 봅시다. 양성자 질량의1800분의 1 가량에 불과한 전자가 양성자와 똑같은 전하를 갖고 있습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만약 이것이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원자는 안정적이지 못 했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전하가 완전히 똑같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덕분에 무려 140억년이 지난 다음에도 원자로 이루어진 우리가 존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강한 핵력의 결합 상수가 지금보다도 아주 조금만 약했다고 하면, 이 우주에서 안정적인 원자는 수소 말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이 생기는데 필요한 다른 원자들은 결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3강. 유기 우주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하나님이 하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드는 듯합니다.
최근까지도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우리가 그것을 설명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역에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신학자들이 포기한 그것은 이제 근무 편성표에서도 과학 쪽으로 건너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봐 왔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하나님이 진짜 있다고 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야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단지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이른바 프랑스 인들이 말마따나 ‘운 루아 페낭(아무것도 안하는 왕)’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뜻입니다. 즉 우주를 돌아가게 만들고, 자연 법칙을 세운 다움, 이제는 은퇴하거나 또는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가장 큰 간극들, 하지만 한창 메워지고 있는 중인 간극들 가운데 하나에 관해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의 기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4강. 외계의 지적 생명체
5강. 외계인 민간 전승 : 종교의 진화에 관한 암시
6강. 하나님에 대한 가설들
7강. 종교적 경험
인간이라는 일족의 나이는 수백만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딱 단정하기는 곤란하지만,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대략 100만 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나무라든지 개울 하나하나에도 열등한 신들을 붙여 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벼락의 신이 있다고 믿으며, 또한 그런 벼락에 맞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벼락의 신과 화해하는 것, 즉 그를 달래는 것, 나아가 그가 관심을 두고 벼락을 때릴만한 대상은 많고도 많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가령 기도는 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외부 세계에 관해서도 전혀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며, 어느 단계에서 우리로 하여금 기분이 좀더 나아지게 해주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8강. 창조에 반하는 범죄
9강. 탐색
[질문과 답변]
Q : 우리는 언제쯤 되어야 또 다른 지성체와 접촉할 수 있을까요? A : 오늘날 우리가 비록 불왅너한 방식으로라도 그런 지성체들을 탐색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거대한 전파 망원경을 건설해, 다른 별들에 있는 문명들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신호, 즉 전파 신호를 청취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다.
Q : 뉴턴이나 캐플러 같은 과학자들의 업적을 고려해 보면, 언젠가는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A : 하나님의 개념은 흰 수염을 기른 덩치가 커다란 남자로, 저 하늘 위의 보좌에 앉아서 참새가 떨어지는 것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계산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종류의 신에 관해서라면, 저는 아직까지는 그 존재에 대한 어떤 증거조차도 없다고 말씀 들릴 수 있습니다. [Review]
1633년 갈릴레이는 코페루니코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긴 죄목으로 종교재판에서 유죄로 인정되어 종신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과학은 종교의 초월주위를 밝히기 위해 인간의 뇌에서 종교를 관장하는 어떤 특정 부위가 있는지 살펴보며, 로켓을 타고 우주에 올라가서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종교를 조롱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1934~ 1996)이 1985년에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행한 ‘ 자연신학에 관한 기퍼드 강연’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강연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의한 철학적 과학적 논리로 입증하려는 신학의 한 분야로, 기독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정한 종교가 우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종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종교 대부분은 자연신학의 거센 물결 때문이다. 자연물을 숭배 대상으로 하는 원시 종교들은 태양이나 달 거대한 자연의 힘에 인간이 굴복하기 때문에 과학으로 그것들의 실체를 밝혀내는 순간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보다 심오한 철학적 논리를 담고 있는 몇몇 종교들은 그러한 과학적 논증을 철학이라는 논리로 방어하며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본질적으로 의문에 답하는 것이며 의문이 풀어지는 순간 또 다른 의문 속으로 피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과학이나 철학적 논쟁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라는 의문에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응답함으로써 인간과의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천지 만물을 한 주간 동안에 만들고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고도 방법이나 원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논리를 앞세우는 과학적 사고를 지닌 인간에게는 화나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은 태양계의 끝에 있는 별까지 인간이 만든 우주선을 보내어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세계인들은 안방에서 선명한 화면으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2호는 41년간 약 178억㎞(120AU)를 항해하며 현재도 시속 6만 2700㎞의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태양계를 넘어 성간 우주로 돌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은 먼 거리에 있지만, 태양계의 바깥 가장자리로 알려진 신비한 경계, 혜성들이 머물고 있다고 추상하는 오르트 구름 지대를 향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우주에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은하에는 이러한 태양계가 수천억 개가 있고 또 우주 전체에는 이러한 은하가 얼마나 더 되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곳들에는 지구와 비슷한 별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고 생명체가 존재할 텐데 성서적 입장으로 본다면 그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허블 망원경으로 본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광대하고 그 우주는 아직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 그 속에서 별들은 끊임없이 탄생과 소멸이 있는 우주는 역동적이다. 그 거대한 에너지, 상상할 수없는 크기 앞에서 인간은 작은 티끌에 불과 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철학과 사상, 지식과 숭배의 대상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일까?
지구는 140억 년 전에 탄생했고 또 얼마의 시간(50억~60억 년)이 지나면 우주의 모든 별이 그러하듯이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은 적색거성이 되어 수성, 금성, 어쩌면 지구까지도 태양의 거대한 에너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천문학자들에게 종교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일까!
수억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지만 그것을 확신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찾아 중동의 어디쯤을 돌아다니는 성서 고고학자들은 참으로 불쌍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 천문학자들이 칼 세이건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 중에는 그러한 과학적 철학적 지식이 도리어 종교적 신심을 북돋아 주는 사람도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연설의 서두에 그는 우리보다 앞선 시대에 위대한 정신 심리학자이자 기독교 신자인 윌리엄 제임스(1842~1910)가 연설에서 발표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언급하며 이 연설의 제목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라고 정했다는 고백에는 무언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0세기 첫 번째 해에 기퍼드 강연을 했다.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경험자의 이야기를 근거로 제시하며 하나님은 인간이 이성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초월적으로만 인식된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은 훗날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라는 제목의 유명한 책을 펴냈다.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인간중심의 관점에서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과학적 논증에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하나님의 주장은 단호하다. 신앙은 우리의 이성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따르는 순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로 되는 것이다.
생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생이 자기 죽음 끝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유는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생명의 기원과 140억 년 전의 존재에서부터 앞으로 또 그만한 시간의 후에 일어날 일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신앙은 그곳에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와 기원을 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 속에서는 신의 존재가 설 자리가 없다.
오래전에 어떤 글에서 본 칼 세이건 의 딸 ‘사샤 세이건(Sasha Sagan)’이 뉴욕 잡지에 올렸다는 에세이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 그녀는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그녀는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 친할아버지와 할머니에 관해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그러자 칼 세이건은 슬픈 얼굴로 ”그분들은 세상을 떠났단다. “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딸이 “그럼 아빠는 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볼 수 없나요?”라고 물었고, 세이건 은 깊은 생각에 잠긴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자신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다시 보고 싶지만, 자신은 죽음 뒤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오직 진실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비판을 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칼 세이건 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유명한 천문학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자문 위원으로 매리너, 보이저, 바이킹, 갈릴레오 호 등의 무인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했고, 과학의 대중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저술과 방송을 통해 세계적인 지성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의 골수 이식 치료에 고통을 당하며 결국 폐렴으로 6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독교는 물론이고 다른 세계의 성직자들도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불가지론자였던 세이건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의 연설을 담았지만, 그의 위대한 천문학자로서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내용 자체가 자연신학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필요한 지식을 산발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책들이 유익하지 않다는 권고도 있을 수 있으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성경 말씀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 속에 들어있는 불신의 씨앗은 이런 속에서 드러내고 극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 |
첫댓글 리뷰보니.....
읽어 봄직
not b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