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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같은 평강의 삶을 살아가려면
이사야 48:12~22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 저녁에 살펴본 바 이사야 48장 1~11절 말씀에 이어서 새 일을 행하실 것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장차 유다 백성들이 죄악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동방의 독수리 고레스 왕을 보내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남은 자 그의 백성들을 바벨론 갈대아 땅에서 구출하여 사막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다시 귀환시키는 새 일을 할 것이라고 다시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평강과 형통의 삶을 살 수 있는 합당한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반복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강 같은 평강의 삶을 살아가려면’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본문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먼저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첫마디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 ‘샤마’라는 이 명령어 ‘들으라’는 말씀은 14절에서도 반복하여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고 말씀하시며, 16절에서도 다시 이르기를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고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듣는 것,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가장 중대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실 때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마태복음 11:15)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마가복음 4:24)고 하셨으며, 주님께서 자기 백성과 마귀의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을 때에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5~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께서 큰 이적과 기적을 베풀어도 여전히 믿지 않고 도리어 귀신들렸다면서 비난하고 더욱 미워하였지만,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며 그의 이적과 기적을 보고 주님의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더욱 믿게 되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가 그 사람의 영혼과 삶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 모두 한평생 하나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 일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모범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어지는13절에 나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친히 지으신 창조주십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의 거하는 모든 피조물들 곧 저 깊고 한없이 드넓은 우주 공간과 해와 달과 별들과 지구상의 땅과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산과 바다와 바위와 흙과 바람과 공기와 호수와 그 가운데 살아가는 각색 짐승, 새, 곤충, 물고기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의 지혜롭고 능력 있는 손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따라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자기 할 일을 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순환 법칙을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며 생명의 법칙이 지속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그 가운데 그 부르심을 따라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라 하시면 그 뜻에 따라 대기하여 복종하여 신속하게 일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고라 일당을 삼키라 명하매 땅이 입을 열어 그들을 삼켜버렸고,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북 이스라엘의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음식의 대접을 받자 예고하신 대로 사자 한 마리를 보내어 그를 쳐서 죽이되 그 몸을 찢지는 않고 그 선지자가 탔던 나귀도 찢지 않고 그 선지자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가 가져가도록 그 곁에 지키고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또한 북 이스라엘 왕국 후반부에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불순종하고 배 타고 달아나자,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타고 가는 배 곁에 대기시켜놓았다가 선지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매 그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 삼일 동안 배에 두었다가 다시 토해내라고 하나님이 명하시니 그를 육지에 다시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피조 세계의 미천한 만물들조차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응답하여 그것들은 일제히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고 하였는데, ‘선다’라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복종과 충성과 섬김의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헤브론에 두 명의 천사를 대동하고 우리 주님께서 정오에 찾아오셨을 때에 늙은 아브라함은 그 곁에서 종이 주인의 식사를 시중들 듯이 그 곁에 서 있었는데, 그 곁에 시중들며 서 있는 그 단어가 이 ‘아마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18장 22절 말씀에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고 하였을 때에도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섰다”라는 표현이 바로 종이 주인 앞에서 겸손과 복종과 헌신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서거나, 소년 다윗이 사울 왕 앞에 섰다는 표현도 그들이 신하로써 복종하며 헌신하며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만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들을 부르면 즉시로 순종하여 일제히 서서 그 하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께 생명 없는 하늘과 땅과 바위와 바람과 비도 순종하여 받들어 섬기며, 총명과 지식이 없는 짐승들도 순종하여 받드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택하심을 입어 그의 백성된 선민된 야곱, 이스라엘은 어떠하겠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는 얼마나 더 온전히 그의 명을 받들아 하나님 앞에 서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한평생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로 빚어진 피조물일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의 피 값으로 사신 구속받은 주의 택한 백성이니 우리는 더더욱 그가 부르시면 즉시 일제히 달려가서 주님 앞에서 “부르셨나이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주옵소서”라고 헌신하는 순종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장래의 새 일을 다시 분명히 밝히십니다. 14절로부터 16절 중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란 페르시아를 세울 고레스를 가리킵니다. 이 고레스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것인데, 곧 교만하며 사치하며 절대로 망하지 아니할 것이라면서 온갖 우상과 주술을 행하던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일이 그 한 가지요 또 한 가지는 바벨론에 포로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고토로 자유롭게 돌아가서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는 일을 돕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어떤 우상도 말하지 않았지만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친히 미리 말씀하시고 친히 고레스를 불러 인도하여 내며 그의 앞길을 형통하게 하신다고 미리 예언한 그 일을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그리하여 훗날 그 일들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구속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야곱 족속들도 알고 온 세상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자기 백성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장차 믿지 아니할 것을 아시기에 그들의 뿌리깊은 불신앙을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게 하시려고 이렇게 거듭 거듭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깊은 불신앙 때문에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 이처럼 끊임없이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수고로우심을 볼 때에 참으로 안타깝고 한편 송구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깊은 불신앙이 뼈속까지 있는 패역한 자입니다.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로 불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듯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믿으라고 매달리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됩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는데, 그의 말씀을 믿고, 그 앞에 신실함으로 끝까지 살아감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하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러한 말씀을 자기가 한 말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과 성령님이 증거하도록 하여 증거한 것이라는 말씀을 그 선포한 말씀 말미에 덧붙이고 있습니다. 16장 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이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가 앞선 하나님의 새 일을 말씀하신 그 내용을 선포하라고 자기를 보내셨으며, 그의 영 성령님도 자기에게 부어주셨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한 말은 자기가 스스로 지어낸 말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자의 말을 대언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 성령을 자기에게 보내주심으로 성령의 대언하심으로 한 말이라고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란 자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이 부탁한 말씀을 그 시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았는데도 달려가며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았는데도 선포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14:14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알려주신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리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3:21 말씀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하여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처럼 모든 시대에는 참 선지자도 있고 거짓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지 아니하였으나 선지자인 척 유창하게 예언하여 자기의 권위를 높이는데, 그들의 예언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우리는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 우리 주님께로부터 보냄받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별 기준이 이것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그 열매로 보아 안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행위의 열매가 화평과 덕을 세우고 질서와 사랑이 맺혀지는 것을 보면 참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불화가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고 무질서해지고 평안 대신에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차고 탐욕과 음란의 열매가 맺혀지면 거짓 영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참 선지자는 거룩함과 자족함과 청렴함과 검소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와 거짓 영의 역사가 많이 있으니 잘 살펴서 오직 성경의 말씀에 기초를 하여 열매를 살펴서 분별하여 미혹되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17절로부터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후회스러운 한탄과 탄식의 말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항상 자기 백성에게 유익을 주도록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그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택한 백성의 스승 혹은 부모로 자기를 소개하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목적이 유익을 주기 위하여, 곧 잘되고 형통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교육하는 부모와 스승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친히 그들로 길을 인도하는데 그 길도 잘 되는 길로 인도하는 훌륭한 인생 선배처럼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만약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주의하다’는 단어는 ‘콰샤브’라는 히브리어인데 ‘들으라’는 단어인 ‘샤마’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자주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22 말씀에,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라고 하신 말씀에서, ‘청종하는 것’은 ‘샤마’라는 단어를 썼고, ‘듣는 것’이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에서 주의하다라는 단어인 ‘콰샤브’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 순종한다는 것,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잘 귀담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평강이 강같이 흐르고, 공의가 바다 같이 넘치고, 자손도 풍성하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렇게 포로로 끌려가고 죽고 괴로운 일을 많이 겼었노라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아쉬움이 많이 있습니다. 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는 우리의 모든 삶에 평강을 주고 공의가 넘치고 형통한 삶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축복을 다 받아누리도록 우리를 유익하도록 가르쳐주시고 우리의 행할 길을 자세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시다. 그러할진대 반드시 평강과 공의와 형통이 풍성히 임할 줄 믿습니다.
이제 20절로부터 2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에 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장차 바벨론에 포로 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고토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일을 하실 것을 기정 사실로 전제하면서, 그 때 귀환자들은 즐거운 소리로 땅 끝까지 반포하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라고 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훗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만민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선포하라는 지상 명령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그들로 광야로 통과하게 하실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한 기적과 같이 주의 백성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샘물을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크신 일을 행하실지라도 믿지 아니하고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해방의 역사를 베푸셨으나 거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절에서 그런 자들에게 경고를 남기고 있습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기서 악인은 악하고 교만하고 반역적이고 사악하고 오염되어 있고 무질서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반면에 의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삶은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평강을 빼앗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에게 더욱 의지하고 그의 모든 명령을 귀를 기울여 순종하기를 힘씁시다. 그리할 강 같은 평강이 우리 삶에 넘치게 흐를 것입니다. 평강의 강이 평생에 우리 삶에 넘치게 흘러나와 우리 곁에 모든 이들에게까지 흘러 넘치는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