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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송씨 시조 추밀원부사공 휘(諱) 유익(惟翊)의 묘
↑↑↑ 위치 :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송씨의 본관 연혁
우리나라 송씨의 본관(本貫)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김해(金海),신평(新平),연안(延安),서산(瑞山),야로(冶爐),남양(南陽),태인(泰仁),옥구(沃溝),청주(淸州),쌍부(雙阜),덕산(德山),안산(安山),죽산(竹山),강음 (江陰),복흥(福興),견주(見州),강화(江華),하음(河陰),광주(光州),여흥(驪興),사천(沙川),풍양(豊壤),파산(坡山),수원(水原),용성(龍城),사량(沙梁),주석(株石), 공이(工二),이천(利川),풍덕(豊德),덕수(德水),임진(臨津),인천(仁川),장서(長瑞),송림(松林),삭녕(朔寧), 고봉(高峯),마전(마田),영평(永平),양천(陽川),용인(龍仁),진위(振威),연천(連川),충주(忠州),공주(公州), 양화(良化)여양(驪陽),청풍(淸風),단양(丹陽),안읍(安邑),화변(화邊),한산(韓山),천안(天安),온양(溫陽), 대흥(大興),문의(文義),이성(이城),음성(陰城),정산(定山),채운(彩雲),연산(連山),청양(靑陽),직산(직山), 연풍(延豊),회덕(懷德),회인(懷仁),예산(禮山),전의(全義),전주(全州),나주(羅州),반남(潘南),압해(押海), 능주(凌州),남원(南原),순천(順川),담양(潭陽),익산(益山),화변(禾邊),우일(雨日),금산(金山),안성(安城), 영광(靈光),적성(赤城),대안(大安),진량(陣량),유등(柳等),임피(臨陂),회미(澮尾),운제(雲梯),인의(仁義), 고창(高敞),흥덕(興德),남평(南平),흥양(興陽),남양(南陽),마령(馬靈),옥과(玉果),해남(海南),죽산(竹山),사라(紗羅),보안(보安),경주(慶州),비안곡(比安谷),안동(安東),상주(尙州),진주(晉州),성주(星州),창원(昌原),대구(大丘),하빈(河濱),동래(東萊),밀양(密陽),선산(善山),청송(靑松),순흥 (順興),하청(河淸),협천(협川),영천(永川),함양(咸陽),유실(有實),경산(慶山),의성(義城),문경(聞慶),가을산(加乙山),단성(丹城),단계(丹溪),하양(下陽),용궁(龍宮),칠원(漆原),함창(咸昌),령(高靈),현풍(玄豊),영산(靈山),창녕(昌寧),능천(能川),강릉(江陵),원주(原州),철원(鐵原),사탄(史呑), 회양(淮陽),영월(寧越),이천(伊川),낭천(狼川),금화(金化),평강(平康),사정(史丁),해주(海州),평산(平山),풍천(豊川),수안(遂安),백천(白川),신계(新溪)청송(靑松),함흥(咸興),영흥(永興),등주(登州),복영(福靈),평양(平壤),정주(定州),덕천(德川),벽동(碧潼), 강서(江西),양덕(陽德),여산(礪山 : 二下邑屬未 ),진원(鎭原),청천(靑川),월곡(月谷),단성(丹城),제주(濟州)등 172개 본이나 전해지고 있으나,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남양(南陽),김해(金海),덕산(德山),문경(聞慶),신평(新平),야성(冶城),양주(陽州),연안(延安),용성(龍城),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등 20여 본관 만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도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등 세 송씨가 전체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의 송씨는 거의가 여산이나 은진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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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송씨의 분파현항
여산 송씨는 시조(始祖) 유익(維翊)의 4세손 여량부원군 송례(松禮)의 장남 염(琰)의 아들 대(代)에서 3개파, 차남 분(분)의 아들대(代)에서 2개파, 총 5개파로 나뉘어진다,
파조(派祖)와 파명(派名)은 다음과같다,
○ 휘(諱) 염(琰)의 후손
송운(宋운) : 원윤공파(元尹公派)
송방영(宋邦英) : 밀직공파(密直公派)
송원미(宋元美) : 소윤공파(小尹公派)
○ 휘(諱) 분(분)의 후손
송린(宋璘) : 지신공파(知申公派)
송서(宋瑞) : 정가공파(正嘉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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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우리 송가네 가족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파는 정가공파(正嘉公派)입니다.
↑↑↑여산송씨 최초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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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의 연혁
무릇 인간은 환경적 소산(所産)이요 역사적 산물이다.
전해오는 고어(古語)에 [인걸(人傑)은 땅의 영기(영기)로 태어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역사상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어느 송씨 못지않게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후기 원종대(元宗代)의 정렬공(貞烈公) 휘(諱) 송례(宋禮) 때에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만 상신(相臣) 2명, 왕비 1명, 청백리 1명, 공신 5명, 문과 급제 104명을 배출하는 등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관, 대작들을 배출한 대성(大性)이다. 따라서 우리송씨 세거지(世居地)요, 문화유산의 집단지인 여산(礪山)은 누대(累代)로 많은 명현달사(明賢達士)를 배출하고 충(忠).효(孝).열(烈)과 선비 정신의 기운이 가득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관향이다.여산의 연혁을 살펴보면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백제 때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라하였고, 통일 신라시대에는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되어 덕은군(德殷郡)에 속하였다, 고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播遷)할 때 여량을 거쳐 남행했다. 이 지방은 지방 교통의 중심지로써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하여 있었다.
1018년(현종 9) 전주(全州)의 속현이 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두어 낭산(朗山). 공촌부곡(公村部曲). 피제부곡(皮堤部曲)을 병합하였다. 조선 1400년(정종 2) 여량과낭산을 합하였으며, 1402년 (태종 2) 여산향교가 창건되었고, 1404년(태종 4) 여산현(礪山縣)으로 개칭 되었다. 1436년(세종 18) 태종의 비(妃)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의 외향(外鄕)이라하여 군(郡)으로 승격 되었다가, 1699년(숙종 25)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본관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어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여 많은의병을 모아 청주, 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 (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옹포(옹浦)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聖堂浦)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咸열)의 소방봉 봉수대(所方烽峰燧臺)와 용안의 광두원 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는 등 군사상으로 중시되던 지역의 하나였다. 1896년 전주부 여산군이 되었고 1985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다. 일제시대인 1914년 군면 통폐합시 여산군, 천동면, 천서면, 군내면이통합되어 여산면이 되었다.
여산면은 익산시(益山市)의 동부에 있으며 면적은 36,64㎢이다.북부에 단제산, 동쪽으로 완주군(完州郡)과의 경계에 천호산, 서남쪽으로 금마면(金馬面)과의 경계에 용화산이 솟아 있는 등 지역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저 있는 반면에 충적평야는 북부의 여산천 유역에 약간 형성되어 있을뿐이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천호산에는 석회암이 매장되어 있다. 교통은 호남 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으며, 면의 중심부인 여산리는 호남고속도로에 인접하여 있고, 강경- 연무간의 교통의 요지로써 이리-논산간의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호산리에 천년기념물인 천호동굴이 있고 여산리에 여산향교가 있다.여산을 관향으로하는 우리 후손의 정신속에는 선현(선현)들의 효열의 성품, 나라가 어려울때 백성과 함께 의연히 나서서 나라를 구한 충정, 벼슬에 연연치 않았던 청렴한 선비정신이 한민족의 역사 속에 저류가 되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그 당시 군인인 무관[[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은 겁을먹고 행방을 감추어 버리고,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 역시 공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취를 감춤]]은 경주로 도망 갔으나, 비록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이지만 장군복을 입고 동래부민(현:부산시민)들과 함께 과감히 왜놈과 맞서 싸운 송상현(동래부사) 충렬공을 기리는 충렬사입니다.↓↓↓
↑↑↑ 정문에서 본 충렬사 전경(부산 동래구 안락동 안락교차로 옆에 있음)
↑↑↑ 송상현 충렬공(평상 시 문관으로 전쟁시에는 무관으로 임무를 다하신 분)이 성 위에서 왜적들에게 한
유명한 말이 적혀 있었다.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임진왜란 개전 초, 대군을 이끌고 동래성 밑에 쇄도한
↑↑↑ 왜장은 여덟 글자를 쓴 나무판을 내세웠다. "싸울 테면 싸우고 안 싸울 테면 길을 빌리라(戰則戰 不戰 假我道)"
↑↑↑ 동래성 위에서는 나무판의 여섯 글자로 간결하게 답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은 빌리지 못한다
(戰死易 假道難)" 전쟁사의 명대사이다. 또 동래보국충절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 4월15일 아침 왜적은 조총으로 동래성을 침공, 닥치는대로 살생하여오매 송상현은 운명이 다한 것을 알고
조용히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위에 조복을 입고 투구 대신 사모를 쓴 뒤 호상에 기대어
두손을 모으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통신사 평조신(平調信)을 따라와
↑↑↑ 송상현공에게 후대를 받은 평조익이라는 자가 다가와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성옆으로 피하라고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북향요배(北向遙拜)후 부채에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는 도와줄 기척도 없구나.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운 것이오매
아비와 자식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라는 하직의 글을 써서 부친에게 보내고 의연하게
↑↑↑ 싸우다 42세를 일기로 순절하였다. 송상현공의 묘소는
↑↑↑ 부산 동래에서 충북 청주시 가포곡으로 1595년(선조28)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장하였다.
뚜버기 본인이 생각컨데 당시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 시 부산진이 4/13일 하루만에 함락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은 조선보다 앞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신식 조총을 개발하여 화력이 우리 보다 우수할 뿐만 아니라 병졸 수도 많았고, 당시 조선은 조총이 없었고 재래식인 활로 대항하였으니 조총을 이길리 없다. 하여 장군인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은 겁을먹고 행방을 감추어 버리고,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 역시 송공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순식간에 동래성도 함락될 수밖에 없었지만, 송 충렬공은 마지막 병졸이 남을때까지 끝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부산지하철 3호선 공사 시 동래시장 옆 사거리에서 당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유골 및 전쟁 장비들이 많이 발견되어 출토 된 사실이 있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동래 주민들을 설득시켜 함께 최후까지 장렬히 막아내다 문관이 송공이 전사한 것은 보기드문 일입니다. 일본인 장수 및 병사들도 동래성의 동래부사인 송상현과 같이 일본을 이렇게 대항하며 막아 낸다면, 비록 일본군의 화력이 우수하다 할지라도 조선을 함락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전국 조선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삼천리방방곡곡 자발적으로 의병 봉기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송공의 끔찍스러운 충절에 감동한 일본 적장도 아까운 인물을 죽였다하여, 송공을 해친 부하를 처형하였다 한다.
동래부민들로 부터 존경 받으며, 나라를 위하여 마지막 까지 장렬히 대항하다 전사한 충렬공 송상현을 해 함으로 인하여
조선인들의 의병봉기를 유발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전술에 막대한 차질을 유발하게 되었고 후방의 조선인 군인들도 전력을 가다듬어 방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쟁 시 적장은 상식적으로 생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동래부사(東萊府使)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선생 동상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입구(구 하마정)에 있음]
↑↑↑ 여기 우리는 무한한 긍지를 느끼며 삼백팔십여년전 임진왜란 당시
오만 무쌍한 왜적의 무리와의 치열한 서전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 탁월한 판단력과 결사적인 투쟁 으로 불멸의 공을 세우고 순사한 민족의
위대한 등불 송상현공의 모습을 정중히 동상으로 모신다.
↑↑↑ 조선왕조 초기 빈번한 외적의 위협에 대비하여 자주 국방을 꾸준히 꾀해 왔으나
선조대에 이르러 국사를 맡은 사람들이 부질없이 당파 싸움에 휘말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일신의 안일만 노릴때 조정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공명 정대 멸사봉공의 숭고한 신념을 고수하던 송공은
↑↑↑ 드디어 간악한 무리의 미움을 받아 외침의 위협으로 죽음의 땅이라 일컫던
부산 동래에 부사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부임 이듬 해인 선조 이십오년 사월 열 나흩날 부산을 함락 시킨 왜적의 대군은
↑↑↑ 다음날 아침 단숨에 동래성에 육박했다. 방비의 부족으로 병사 수사는 적을 막지 못하고
민중은 갈바를 모르던 위기 일발의 순간에 있어서 문관인 송공은
↑↑↑ 의연히 나서서 후방의 전략 수행을 위하여 단호히 성을 사수하기로 했다.
일찌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던 공이시라 남은 군졸들과 의로운 백성들은
↑↑↑ 흔연히 공을 따랐으니 이들을 이끌고 최후까지 싸운 공의 모습은 바로 처절 그것이었다.
워낙 중과 부적이라 드디어 거리와 성은 의로운 피로 물들고
↑↑↑ 공의심장은 밀어 닥치는 적의 칼에 고동을 멎었다. 송공의 이 끔찍 스러운 충절에 감동한 적장도
공을 해친 부하를 오히려 처형하게 되었으니 동서고금 어느 전사에 이 같은 예가 있었던고
↑↑↑ 뒤미쳐 임란을 승리로 이끈 의병 봉기가 요원의 불 처럼 삼천리방방곡곡에 일어났으니
그것 이 어찌 공의 영웅적인 최후와 무관하겠으료.
이제 조국의 안전과 번영을 바라는 우리는 이 동상 앞에서 송상현공의 충절을 배워야 하고
↑↑↑ 임전무퇴 하는 불국의 의지를 배워야 하고 솔선수범 대의를 위해 살고 또 죽는 그 위대한 생애를
본 받아야 할것이다. - 1978년 3월 1일 -
↑↑↑ (자료출처 부산광역시 진구 양정동 양정삼거리(구 하마정)에 봉안하신
↑↑↑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 공님의 동상 옆에 적혀 있는 찬의 자료입니다)
↑↑↑ 송공단비(宋公壇碑) 전경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소재, 현 부산 동래시장 내에 있음)
↑↑↑ (뚜버기 어릴때에도 부친께서 부산 동래 송공단비에 제를 지내러 가시곤 하셨다)
↑↑↑ 공의 영구(靈柩)를 부산 동래에서 청주로 이장할 때 동래 사민(士民) 70여명이 영구를 붙잡고 호곡하면서
백리 밖까지 호송하였고, 연로(沿路)에는 애도하는 인파가 줄을 이었으며
왜장들도 모두 말을 버리고 배례하였다고 한다.
↑↑↑ 공의 영구가 의령(宜寧)에 이르렀을 때 접반사(接伴使) 이항복(李恒福)이 공의 혼을 불러 제사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순절장소(현재 동래시장 내)에 단을 모아 매년 음력 4월 15일(순절한 날)
부산시장을 제관으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
↑↑↑ 효종의 명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고, 우(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문을 찬(撰)하고
동춘당(同春 堂) 송준길(宋俊吉)이 서(書)하고,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하고
↑↑↑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전기 (傳記)를 쓰고,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순절도(殉節圖) 세 폭을 그려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손(本孫)이 보관하고, 하나는 공의 자손이 보관하게 되였으며
↑↑↑ 개성의 숭절사(崇節祠),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경성의 화곡원(禾谷院) 정읍의 정충사(旌忠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고 모두 사액(賜額)되었다. (사액이란? 임금이 직접 현판의
글을 내리는 것을 말함. 임금이 직접 써서 현판을 내리기도 하고, 유명한 서예가에게 쓰게하여 현판을 내리기도 한다.)
↑↑↑ 1681년(숙종 7) 이미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됨이 공의 훈공에 비하여 부족하다 여기고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가증(加贈)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내렸으며
↑↑↑ 정려가 명해졌다, 1694년(숙종 20) 개성(開城) 사민(士民)의 장계로 조정의 명이 내려 유허비(遺 墟碑)가 세워졌고
↑↑↑ 순조 때 부조묘(不?廟)가 내렸졌다.
↑↑↑ 충렬공 휘(諱) 상현(象賢)의 묘(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촌소재)
↑↑↑ 충렬공의 명언비 :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은 빌리지 못한다"
송상현 충렬공은 본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파는 지신공파(知申公波)입니다.
1551~1592 (명종~선조)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또는 산목거사(山木居士), 시호는 충렬(忠烈) 지신공 휘(諱) 린(璘)의 11세손으로 호산공(壺山公) 휘(諱) 복흥(復興)의 장남이다.
어려서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15세에 보시(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 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겸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교화를 위주로 치정(治政)하여 명성을 떨치고 1583년(선조 16)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어 호조, 예조, 공조의 정량을 역임하면서 공정, 겸손, 결백을 신조로 삼았으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집) 을 아끼며 가르쳤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585년 재차 다녀왔으며, 1588년 백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가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을 거쳐 1590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고 이어 사간원사재(司諫院司宰).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진(釜山鎭)이 그날로 함락당하고 적은 승세를 몰아 동래부로 물 밀듯 쳐들어왔다, 4월14일 새벽 부산진의 비보에 접한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은 겁을먹고 행방을 감추어 버리고,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 역시 공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취를 감추어버리니, 수륙(水陸)의 두대장을 잃은 동래 고성(東萊孤城)은 풍전등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외국의 침략에 굴복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굳게 결심한 공은 마침내 단상(檀上)에 올라 좌우의 제장(諸將)과 첨정(僉正) 김사모(金嗣牟), 조방장(助防將) 조영규(趙英圭),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울산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이사(吏士) 김희수(金希壽)에게 "내 원래 백면 서생이로되 이곳에 부임할때부터 이 성(城)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제장군졸(諸將軍卒)은 단결하여 구국에 충성을 다 할지어다."
하고 타일렀다, 그리고는 남문(南門)을 지키며 독전(督戰)하니 주장을 잃고 두려워 하던 장졸의 사기가 자못 충천하였다, 왜적은 이미 성 밑까지 육박하여 "싸우려거든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거든 길을 터 달라(戰則戰 不戰 假我道)"고 글씨를 목패에써서 공에게 보였다. 이것을 내려다 본 공은 크게 분노하여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 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목판에 써 던졌다. 이것을 본 왜적은 공의 용맹에 두려움을 느끼고 멈칫 하다가 이중 삼중으로 성벽에 붙어 기어올랐다. 공은 행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 질세라 앞장서서 끝까지 분전하는데 조방장 홍윤관(洪允寬)이 달려와서 "사태가 위급하니 소산(蘇山)으로 물러가서 지켜보자."고 전언했다.
이 때 공은 그를 크게 꾸짖으며 "죽기가 무섭거든 가거라. 나는 도망 칠수는 없다" 하였다.
장졸들은 공의 독전에 힘을 얻어 밤새 강적을 맟아 용전 분투 했으나 조영규(趙英圭), 송봉수(宋鳳壽), 김사모(金嗣牟), 노개방(盧蓋邦)등 충신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최후를 각오한 공은 급히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남루(南樓)의 호상(胡床)에 단정히 앉아 먼저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북향요배(北向遙拜)후 국운을 축원하고 나서, 부친에게 보낼 편지를 부채에 혈서로 썼다. "외로운 성(城)이 둘러싸였는데 뭇 진(陣)에서는 잠이 깊었나이다. 군신(君臣)의 의(義)가 막중하오매 부자의 사정은 가벼워 지나이다.(孤性月暈 列陣高枕 軍臣義重 父子思輕)" 하고 쓰기를 마치자 깊은 한숨을 내쉬고 좌우를 둘러 보니 심복 신여로(申汝櫓), 유생(儒生) 문덕겸(文德謙), 부민(府民) 김상(金詳), 부중(府中)의 여인 등 뭇사람들이 젖은 눈으로 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때 이미 적병이 들여닥쳐 항복을 권하는 눈짓을 보내자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이웃나라 도리가 이렇단 말이냐, 우리는 너희에게 저버림이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 이 지경이냐." 라고 큰소리로 꾸짖고는 눈을 감았으니 향년 42세이다. 이때 공의 소실 금섬(金蟾)과 시녀 만개(萬介)가 달려들어 공의 장렬한 순절에 한층 빛을 더하니 왜적들도 그 의로움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양녀(李良女)와 비자(碑子) 회춘(會春), 만개(萬介) 등을 비롯하여 울산군수(蔚山郡守) 이언성이 적에게 사로 잡혔을 뿐 성안의 군민 만여명이 모조리 순절하니 동래성은 마침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공의 위덕에 감복한 왜적 평조익(平調益)이란 자는 성이 함몰 되였음으로 공에게 성 틈을 가리켜 눈짓을 하였으나 공이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므로 혹 알아 채지 못하심인가 여겨 바싹 다가 들어 옷을 잡아 끌면 서손을 들어 가리켰으나, 공은 꾸짖고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또 왜승(倭僧) 현소(玄蘇)란 자는 공의 순절함을 듣고 애석 해마지 아니하여 공에게 하수(下手)한 자를 잡아 내어 죽이고 공과 소실 등의 시체를 동문 밖에 안장하고 시(時)를 지어 제사한 후 푯말을 세워주었다.
1595년(선조 28) 선조의 명으로 경상병사(慶尙兵使) 김응서(金應瑞)가 공의 영구(靈柩)를 동래에서 청주로 이장할 때 동래 사민(士民) 70여명이 영구를 붙잡고 호곡하면서 백리 밖까지 호송하였고, 연로(沿路)에는 애도하는 인파가 줄을 이었으며, 왜장들도 모두 말을 버리고 배례하였다고 한다.
공의 영구가 의령(宜寧)에 이르렀을 때 접반사(接伴使) 이항복(李恒福)이 공의 혼을 불러 제사하였다.
지금도 당시의 순절장소(현재 동래시장 내)에 단을 모아 매년 음력 4월 15일(순절한 날) 부산시장을 제관으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 효종의 명으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문을 찬(撰)하고, 동춘당(同春 堂) 송준길(宋俊吉)이 서(書)하고,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하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전기 (傳記)를 쓰고,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순절도(殉節圖) 세 폭을 그려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손(本孫)이 보관하고 하나는 공의 자손이 보관하게 되였으며, 개성의 숭절사(崇節祠), 청주의 신항서원 (莘巷書院), 경성의 화곡원(禾谷院), 정읍의 정충사(旌忠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고 모두 사액 (賜額)되었다.(사액이란? 임금이 직접 현판의 글을 내리는 것을 말함. 직접 써서 내리기도 함) 1681년(숙종 7) 이미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됨이 공의 훈공에 비하여 부족하다 여기 고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 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가증(加贈)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내렸으며, 정려가 명해졌다, 1694년(숙종 20) 개성(開城) 사민(士民)의 장계로 조정의 명이 내려 유허비(遺 墟碑)가 세워졌고, 순조 때 부조묘(不?廟)가 내렸다. 상현의 소실 금섬(金蟾)은 함흥 기생이다.
공을 따라 동래에 가 있다가 그날 공이 급히 조복을 가져 가는 것을 보고 순절할 것을 짐작하여 즉시 여종 금춘(今春)을 데리고 담장을 넘어 공이 있는 데로 가니, 적이 모여 공을 해쳤고 금섬(金蟾)도 붙들렸다.
그치지 않고 적군을 욕하고 꾸짖다가 사흘만에 드디어 죽었다.
이씨(李氏) 여인도 역시 상현의 소실이었다.
공은 적이 장차 멀지 않아 올 것이라 해서 이씨를 서울로 보냈더니 떠난지 하루가 지나 부산이 함락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슬피 울면서,"내가 차라리 남편 있는데 가서 죽으리라." 하고 동래로 돌아오다가 여종 만금(萬今), 금춘이와 같이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너갔다.
풍신수길이 그를 범하려 하다가 이씨가 죽기로 거절하였더니 수길이 의롭게 여겨 놓아주고 관백(關白)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누이와 함께 별당에 있게 하여 마침내 수절하고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온 이양녀는 3년 추복(追服)을 하니 두 분이 다 정려(旌閭)가 명해졌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 온(?)의 따님이며, 장남 지제교(知製敎) 인급(仁及), 차남 진사 효급(孝及) 등 2남을 두었다.
우리 모두 이러한 휼륭하신 할아버님을 두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적군 앞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왜병 장수를 꾸짖는 충렬공의 그 배포 및 충렬공의 충효사상의 뜻을 이어 받아 나라를 위하여 휼륭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 뚜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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