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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쁨을 주는 ‘말씀'
성경본문 : 느헤미야 8: 5-12
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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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고 무려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있게 됩니다. 그러던중 하나님의 은혜로 제2의 출애굽 사건과 같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 이스라엘로 세 번에 걸쳐 귀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성벽과 성전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힘도 없도 물질도 없고 모두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느헤미야가 그들을 격려합니다.
용기를 줍니다.
그안에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들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리더쉽으로 온 백성이 힘을 합해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결과는 놀라왔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무너진 성벽이 겨우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성전도 리모델링을 합니다. 이제 멋진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들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일들이 끝나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성전 동편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어른 아이 남녀 노소 무론하고 다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빽빽이 모인 그 광장에서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그가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서서 좌우에는 레위인 13명이 도열해 섰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채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두루마리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에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 장장 6시간을 서서 성경 말씀을 읽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며 손을 들어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백성들의 회개와 통회가 시작되고 수문광장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날이 일곱째달 초하루 7월1일 이었습니다. 이날은(유대력/태양력 8-9월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한 날입니다. ‘당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날을 나팔절이라고 말합니다.
민수기나 레위기를 보면 이 날에 사람들은 일을 쉬고, 성회를 열어, 희생제사를 드려야하는 귀한 절기였습니다.(민 29:1-6, 레 23:24-25).
그야말로 말씀의 축전이며 민족적인 페스티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하늘과 땅이 함께 하는 축복의 잔치날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을 다시보십시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yKi hk;B; = ‘키 바카’ = ‘통곡했다’ ‘애통했다’ ‘너무 너무 슬퍼서 울고 또 울고...’
그런데 여러분!
이날은 좋은 날입니다. 나팔절입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잔치를 벌이는 민족적인 페스티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벽도 완전히 재건되었습니다. 지도자도 세워졌습니다. 감격과 기쁨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통곡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애통하고 통곡하게 하고 있습니까?
좋은날입니다. 기쁜날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통곡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말씀 때문입니다.
아니 말씀이 무엇이길레 백성들이 이토록 통회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도데체 무엇이길레 모든 백성들이 울고 또 울고 슬피우는것입니까?
아이가 울고 젊은이가 울고 여인이 울고 늙은이들이 울고 온 백성이 왜 웁니까?
자식이 죽었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까?
말씀이 무엇이길레 이들이 이토록 대성통곡을 하는것입니까?
대하34:19절 말씀을 보면
서기관 사반이 읽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자기 옷을 찟었다’고 말합니다.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자기 옷을 찢더라”
말씀 때문에 죄가 드러나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롬3:2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죄가 드러나면 자기 옷을 찟고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가 드러나면 그 드러난 죄 때문에 대성통곡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눈물로 회개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 덩어리인줄 알게되자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신들 의 추악함을 알게되자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절기들을 의롭게 지키지 않았던 죄악들이 그들을 애통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고 죄악된 모습이 드러나니 그들은 애통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스러운 예배 분위기 때문에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그 상황이 너무도 감동이 되어 통곡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 때문에 통곡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만 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교훈과 도덕 윤리로는 결코 죄를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죄를 보고 통곡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돌이킬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성통곡하는 그들에게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사람들이 말합니다.
9-10절입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나팔절 좋은날이니 슬퍼하지말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가 드러나면 대성통곡하고 회개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울지말고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이 나팔절인데 축제 분위기 망치니까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좋은날 우는 것이 재수없으니까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지금 백성들은 애통해야합니다.
은밀하게 죄악을 즐기고 이방인들과 놀아나고 타락한 그들은 당연히 애통해야합니다.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다보니 통곡할 수 밖에 없는데 ‘웬 기쁨’입니까?
그래도 공사가 잘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것인가?
10절하반절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느끼는 기쁨이 우리도 동일하게 기쁨이 됩니다.
그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우리도 동일한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기쁨과 감격속에 살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정한 감격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은혜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매너리즘 빠져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녀도 믿음으로 교육하지 않습니다. - 과외, 공부, 경쟁, 과열교육...세상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 나만 주님과 바른관계를 유지하면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줄 압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 내 삶의 우선순위가 나 자신이고 가족이고 물질이고 운동이고 건강입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채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냥 웃음을 띠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죽겠다해도 여전히 쌀독에 쌀이 있고 먹을것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별탈없이 잘 커줍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훈련, 예배 기도 이런데서 오는 기쁨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세상사람들과의 관계에서오는 기쁨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것보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기쁘고 즐겁습니다. 뿐만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더 기대를 가집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로 오는 만족의 웃음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자녀들 잘되게 하기 위해 공부 열심히 시켜야 합니다. 서울대학도 가야하고 장관도 나오구 의사도 나오고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건강해야 합니다. 아프신데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한채 타락하면 안됩니다. 돈 많고 타락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좋습니다. 사랑도 나누어야 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세상사람 만나는 것이 더 즐겁고 기쁘고 더 소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건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진정한 만족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곤고함을 보지 못하고 살면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왜 이땅에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상실했습니까?
왜 이땅에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언제 한번 크게 웃어본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웃지 못하고 기쁨속에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예수님은 산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절)
세상 사람들은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얼굴에 인자한 웃음과 상냥한 웃음을 나타내고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보다는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웃기 위해서는 먼저 울어야 합니다.
참으로 기뻐하기 위해서는 먼저 슬퍼해야 합니다.
그래서 눅6:21절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시30:5절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전7:3절입니다.
"슬픔이 웃음 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우는 자가 웃습니다.
슬퍼하는 자가 기뻐합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많은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것이 복된 심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데, 애통이 없는 자는 지옥의 가장자리에 서있어서 까닥하면 미끄러질 수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죄를 미워하면서 통곡하게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슬픔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눈물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죽었을 때에 눈물을 흘리며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눅 22:60-62절을 보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마지막 세 번째로 부인하자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하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울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통곡하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애통하게 합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죄를 통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죄를 보면서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통곡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느껴지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느껴지면 이것이 기쁨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울고 있는 자녀의 상한 마음을 오래 갖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마음이 상하여 상처가 깊어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이 기뻐하고 웃음가운데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죄를 보게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과 즐거움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알게 되니 처음에는 회개하여 근심하여 슬피 애통했지만 나중에는 말씀 때문에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오직 말씀만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말씀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은 삶의 에너지입니다.
말씀은 봄기운과 같은 에너지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덕소가족 여러분!
가정문제로 부부문제로 기쁨없이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업문제로 물질문제로 고통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모양 저모양의 얽히고 설킨 문제 때문에 고통가운데 계신분도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인 문제로 고통가운데 계신분들이 계십니까?
말씀으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오후 2시에도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수요일저녁에도 금요일저녁에도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매일 새벽마다 말씀이 선포되어집니다.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자리에 여러분이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