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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4-16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저는 성경에 나오는 고별사 중에 네 분의 고별사를 참 좋아하고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의 고별사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고별사도 있고, 다윗의 고별사도 있고, 사도 바울의 고별사도 있습니다.고별사라는 것은 마지막 유언과 같아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고별사를 살펴보면 모두 선택을 잘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한때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광고가 성행했습니다. 이제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살면서 선택하는 것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를 선택의 시대라고 합니다. 영화관에 가도 하나의 영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멀티 플렉스라고 하여 여러 편의 영화가 한 영화관에서 상영됩니다.
자동차도 옵션이 수없이 많아져서 선택합니다. 텔레비전도 채널이 한 두개가 아니어서 수십개 수백개 중에 선택하며 봅니다. 아이스크림 종류 만도 100가지는 넘을 것 입니다. 식당에 가도 선택할 것이 많습니다. 서양 음식은 별거 아닌것 같아도 일일이 선택해야 합니다.
점점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매일의 삶은 선택의 삶입니다. 매일의 선택에는 생명과는 관계없는 선택도 있지만 생명과 관계 있는 선택도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까, 점심을 무엇을 먹을까, 누굴 만날까?" 하는 선택은 생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의 길과 생명의 길에서 선택하는 일은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아담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인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똑같이 우르를 떠난 순례자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은혜가 많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물이 많아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똑같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의 권력을 선택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님의 긍휼을 선택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택을 예시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많은 무리가 있고 제자가 있습니다.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이런 많은 것 가운데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는 자기를 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란 책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보통 아기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어둡고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 속에 머무는 쪽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기의 생각에는 자궁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일 테니까요.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습 니다. 자궁에 계속 머물면 아기는 죽습니다". 아기 선택 기준이 아닌 어른의 선택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선택 기준이 장성한 사람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선택이 기준이 어른다워야 합니다. 신명기 30:19에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택의 지혜를 일러 주신 것입니다. 선택의 지혜는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 24:15에는 여호수아의 탁월한 선택이 선포 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 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 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얼마나 자신만만한 선택입니까?
여호수아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예수님의 양쪽에는 강도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같은 점이 많습니다. 평생을 같은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나쁜 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같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버렸고 다른 한 삶은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한 강도는 고통 가운데서 저주하며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한 강도는 그리 스도를 선택하여 기쁨 가운데 선택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한 마디가 그의 전 삶의 잘못된 선택을 바꾸 어 놓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평안히 죽음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선택의 즐거움은 평안히 살게 합니다. 선택의 즐거움은 평안히 죽게 합니다. 선택의 즐거움은 고통을 기쁨으로 바꿉니다. 우리가 이 전을 나서면 수많은 선택이 우리 앞을 가로 막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지혜는 고통도 즐기게 할 것입니다. 죽음까지도 즐기게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고별 설교가운데 첫 부분에 나오는 주체(主體)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1-13절 까지의 서론에만 12번이나 내가라는 말이 나옵니다.(원문에..)
*’내가’ ‘나’
수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6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7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수 24: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신약 성경에도 보시면 이런 순서가 분명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일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가 나옵니다….
말씀의 논리 전개 방식은 언제나 교리(敎理)와 실천(實踐)순 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리가 선포되고 윤리적 적용을 시켜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14)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윤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먼저 하나님께서 [옛적](2절) 으로부터 지금까지 약 500년 동안에 행해 주신 일들을 진술하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이제는] (14절)하고 인간의 책임을 말 하고 있습니다. 교리를 먼저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 드리는 일 이기 때문입니다. 교리가 중요할까요? 윤리가 중요할까요?
지혜롭지 못한 질문 같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교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중요합니다.
건전하고 건강한 교리 즉 바른 교훈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교리가 뼈대입니다. 뼈대가 튼튼해야 건강한 것 입니다. 뼈가 약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주권을 알아야 하고 전능자의 크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그 분을 대하는 자세는 항상 ‘섬김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찬양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섬기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백성들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일을 진술하므로 그들로 이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 입니다.
앞 부분의 중심 단어가 [내가]라면 두 번째 부분의 중심 단어는 [섬김]입니다.
(14-18절의 5절 속에 섬김 이라는 단어가 8번 나오고 전체적으로는 14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그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쇠사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신 것은 바로 섬김을 위해서 였습니다.[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 이니라] 이것이 10가지 재앙을 내리는 동안 시종일관 바로에게 전한 말씀 이었습니다.
14절은 그러므로…하면서 이제는 섬김의 대상이 바뀐 것을 가르칩니다. …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만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애급에서 섬기던 신에게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랑이란 권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결단’을 촉구하는 것 입니다.
수 24:15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선한 일들을 깨달은 자들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섬기는 것도 잘못 입니다.
사람들은‘인도’하여 주시고‘보호’하여 주시고‘안식’을 주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17-18) 성경은‘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 24:17 .“....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수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유를 들면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이요, 질투하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그 분을 섬기려면 나도 거룩해야 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섬길려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몽땅 차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 24: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그래도 그들은 재차 자기들은 [정녕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큰소리 칩니다.
마지막 부분은 짧지만 24장의 결론 부분 입니다. 결론은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시면 임종을 앞에 두었던 여호수아에게는 하나의 큰 걱정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그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신앙의 진로가 이 여호수아의 눈에는 하나의 걱정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먼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이제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에 모아놓고 마지막 아주 중요한 고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1. 올바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 24장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늘 이 여호수아는“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날 너희의 섬길자를 선택하라.”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많은 선택이 우리 앞에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렇게 선택하느냐 저렇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신앙의 앞길이 좌우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권면을 우리가 들으면서 우리가 섬길자를 택하는데 어떤 섬길자를 택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2. 선택을 미루어서 안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선택을 하는 가운데 선택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때를 놓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내일 택하라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 적당할 때 택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사탄의 최상의 전술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차차 하지. 다음에 하지. 나중에 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도를 해보시면“차차 다니지요. 다음에 나가죠.”하는 사람이 정말 전도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전도자들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미루는 사람들 가운데는 특별히 우유부단한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친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물쭈물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가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 질타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너희들이 하나님과 우상 앞에서 우물쭈물 하겠느냐.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요구를 하는 그런 장면을 보게됩니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을 때 나에게 따르는 많은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옳은 것이라면 내 자신이 고통도, 불이익도,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택을 통한 선택에 따르는 용기와 책임인 것입니다.
용기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항상 우물쭈물하게 되고 우물쭈물하고 선택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항상 후회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우물쭈물하지 않던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려고 하니까 워터루 전투에서 우물쭈물하고 말았습니다.
워터루에 가면 그 들판이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넓은 워터루 들판에 비가 와서 질퍽질퍽한 진흙탕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 나폴레옹은 대포를 이동하고 배치하는 데 이 땅이 질퍽질퍽함으로 말미암아서 따르는 어려움을 너무 신중하게 고려를 한 나머지 전투 태세를 갖추는데 두시간 연기를 시켰습니다. 두시간 연기를 시키는 동안에 영국 군은 전투 태세를 완전히 갖추어서 전투가 먼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대포를 제대로 배치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워터루 전투가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내가 두시간만 빨랐더라면..”하는 후회 섞인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오늘날”이라는 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오늘날 너희들이 섬길 자를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그때가 바로 회개할 때입니다. 내가 결단할 때입니다. 내가 선택할 때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3. 선택한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선택한 것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결단하고 마음으로 선택했지만 그것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 때 그것은 잘못된 내 마음으로만의 결단이요, 마음으로만의 선택이 되고 맙니다.
이제 내가 좀 바로 믿어야지.“이제 내가 신앙생활을 바로 좀 해야지.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지.”이렇게 마음으로 결심을 하고 생각들을 하면서도 또다시 내 자신이 실천력에 그것을 옮기지 못하고 시간만 자꾸 끄는 그런 경우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계시록에 소개되어있습니다. 그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실천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실천이 뒷받침되어질 때 그 믿음은 분명한 믿음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도 실천 부족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땠습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유혹 사이에 아브라함은 아마 고민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고향 친척 아비집을 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버림이 있기 때문에 포기함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귀중한 것 바른 것,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애굽 궁전에서의 그 평안함 안락함 그 영광스러움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버릴 수가 있었고 포기할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15절에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하며 선택의 결단을 보여 주었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선택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목축업자 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네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가축들이 먹고 마시는 풀과 물 때문에 자주 부딪치고 싸웠습니다.
양가의 목자들이 싸울 때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감정도 편치 못했습니다. 그대로 나가다간 삼촌과 조카의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짙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는 골욕이다. 목자들끼리 싸우다가 우리도 싸우겠구나.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고.
창세기 13:10절을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롯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곳, 물이 있고 풀이 있고 주거조건이 좋은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3:13절을 보면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 당시 소돔은 동성애자들이 판을 치는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롯은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남은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결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했고, 아브라함이 선택했던 가나안 땅은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선택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갈리고, 삶과 죽음이 갈리고, 성공과 실패가 갈리며, 지옥과 천국도 갈리니 선택의 결단이 중요합니다(마 7:13-14).
본문에 "나와 내 집은 여호와(하나님)를 섬기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고, 요시야 왕은 조부 므낫세가 섬기는 모든 이방신들을 전부 찍어서 불태워버렸습니다. 일월성신, 아세라 목상, 석상, 시돈인의 아스다롯, 모압인의 그모스 신, 밀곰의 산당 등 전부 불태웠습니다. 기드론 시냇가에서 재로 만들어 날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모든 산당을 폐하며, 우상을 파하고, 아세라 목상을 부셔버리고, 구리뱀을 파해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과 요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을 사랑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기드온 사사는 우상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종 10명과 밤에 앗사로 우상, 아세라 목상을 찾아가 도끼로 모두 찍어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섬겼기 때문에 우상을 미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면 원수도 쫓아 내 주심(수 24:18), 명예와 재물(잠 22:4), 천사의 보호(시 34:7), 하나님의 사랑(시 103:17), 범사의 형통(전 8:12), 자손의 복(신 5:29), 기업의 번창(잠 8:21), 기도의 응답(히 5:7), 신유의 은총(말 4:2), 마음의 평강(요 14:27), 영생의 안식(계 22:5)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8절에 "...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목사님은 개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설교 시간에 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서 교회에 못 갔습니다. 교회에 갔다오는 자식들에게 묻기를 "오늘도 목사님이 개소리 했냐?"라고 물으니까 자식들이 "오늘은 목사님이 개소리 안 했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개 소리' 보다는 '하나님의 소리'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입을 열어서 얼마나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간증하고, 전도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살면
1.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수 24:17).
2. 하나님께서 평생 인도해 주십니다(수 24:17).
3. 하나님이 항상 함께해 주십니다(수 1:9, 신 34:9).
여호수아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 앞에 110세에 죽을 때 까지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 앞에 끝까지 쓰임 받는 복 있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