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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24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믿음 / 최승윤 목사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기근이라는 재난 속에서도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 밀가루 한 움큼, 기름 몇 방울, 지극히 보잘것없고 미약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드렸던 그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셔서 기근이 계속되는 동안, 어려움없이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삼 년 육 개월의 기간이 다 지난 다음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몇 달, 혹은 일 년이 지난 뒤에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글의 흐름을 보아서는 기근이 계속 되는 동안, 어느 시점에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여인의 아들이 병에 걸려서 심하게 앓다고 죽었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그 아픔과 슬픔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데리고 가셨을 것이다. 기근의 때에 더 이상 고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불러가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 좋아보이지만 제게는 인간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 돌아가셨거나, 병이 있어서 오랫 동안 고생하신 분이 돌아가셨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애지중지 하던 아이가 죽었는데, 그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있다면 정말 믿음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사람이든지, 아니면 약을 먹은 사람이든지, 정신 나간 사람이든지, 아예 사람이 아니든지, 그럴 것입니다.
어떤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살아 있을 때 그렇게 마음 고생을 시켰던 남편이 죽었는데 그 충격에서 빠져 나오는데 삼 년 이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삼 년이 지나서야 경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경우, 그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십 년 이상 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 오랜 시간을 죽은 자식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지요. 사르밧 여인의 고통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사르밧 여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지만 또한 신앙상의 커다란 도전과 위기도 주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다음, 사르밧 여인은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여러분, 사르밧 여인의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읽든, 여인의 이 말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온 목적을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 여인은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여인이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큰 죄악을 범해서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간 그 여인이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악과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을 지었다면 나를 요절낼 것이지 왜 애꿋은 아들은 죽이셨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르밧 여인이 아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자기 집에 온 것과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자기 집에 오지 않았다면 기근의 때에 아들과 함께 고생 고생 하면서 살았겠지만, 엘리야가 왔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의 죄를 기억나게 만들고, 급기야는 자기 죄로 인해서 아들이 죽었으니, 엘리야가 그 여인의 집에 오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의 집에 옴으로 해서 그 여인은 기근 때문에 겪는 고생보다 더 큰 고통과 재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르밧 여인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 또한 하나님께서 여인의 아들을 죽이신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 여인에게 보낸 것은 여인으로 하여금 엘리야를 공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서 일을 하게 하셨고, 그 일을 통해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그 여인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가정에 큰 어려움이 생겼으니 엘리야로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야의 그와 같은 심정이 20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제가 보기에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또(also)”라는 단어입니다. 엘리야가 “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근을 내리신 것은 아합과 이세벨의 죄악 그리고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리신 것입니다. 기근이라면 누구나 당하는 어려움입니다. 단지 먹을 것이 해결되었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또 어째서 아무런 죄악도 없고, 이방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여인,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온전하게 드렸던 그 여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크나큰 재앙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엘리야 선지자의 이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야의 이 부르짖음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보기에 이 여인은 하나님의 재앙과 징계를 받을 만한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온전한 사람이 없다지만, 온전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신다면 어느 사람이 이 땅 위에 살아 남겠습니까? 이 여인도 죄악된 세상에서, 시돈이라는 이방 땅에서 온전하게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들이 죽어야만 할 정도로 그 여인은 죄악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께 크나큰 죄악을 지었다면 그 여인을 치시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끊으셨습니까?”이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이 여인의 집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저를 이 여인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보낸 이유는 징계와 심판이 아니라 이 여인을 향한 긍휼과 구원 때문이 아닙니까? 만약 이 여인이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하고 살았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큰 기근이 시돈 땅까지 임했는데 그것으로 이 여인이 받아야 할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이 여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기근의 때에 모든 사람들이 고생하며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끊이지 않았으며, 기름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인의 죄악을 징계하실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을 구원하셨으며, 이 여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까?”나로 이 여인의 집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선포하고, 보여주도록, 그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더욱 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살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저로 하여금 구원의 사자로 이 여인에게 보내셨다면 이 여인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비극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여인으로 하여금 더욱 크나큰 고통을 당하도록 하셨습니까?
여러분, 엘리야의 이 부르짖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 부르짖음에 이어서 나오는 엘리야의 기도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기도입니다. 막연한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 강청하면 된다는 식으로 아이를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이 크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자로,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드러내는 도구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고 계시다면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드러내 보여달라는 요구입니다. 여인의 아들을 죽게 한 것이 하나님의 징계와 재앙이 아니라 그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깊고 깊은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타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는, 아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까지는 엘리야와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들의 목숨을 끊으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의 절박한 기도가 끝나자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죽은 자도 살린다는 식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드린 기도는 죽은 자도 살린다는 식의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라든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할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은 그 여인이 생각한 대로 그 여인의 죄악 때문에 아들을 죽이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엘리야를 그 여인에게 보낸 것은 징계와 재앙이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을 강력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으로 역사를 하고 계시는지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왜 여인의 아들을 죽이시는 극단적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는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유추 가능한 것은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매일 경험하고 산다면 우리 가운데 정상적으로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어보니까 스타 워즈 에피소드 I에서 요다가 아나킨 스카이워커-룩 스카이워커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두려움은 어둠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요, 두려움은 분노로 인도하며, 분노는 미움으로, 미움은 고통으로 인도한다” 요다의 말에 의하면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죽음의 공포로 분노가 생기고, 그 분노가 미움을 낳고, 미움이 사람을 고통 가운데로 몰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의 아들의 목숨을 끊은 것은 여인에게 있어서 두 가지 면에서 크나큰 고통입니다. 죽음의 고통을 겪은 것이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가장 분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크고 놀라운 것은 바로 아들의 죽음,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기근의 때에 단지 먹고 사는 일만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
라, 죽음과 죽음이 주는 공포와 아들이 죽어서 아픈 깊은 상처와 슬픔까지 치유해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벗겨내신 것입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놀라운 경험을 한 이 여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 여인의 이 고백은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온 사건 이전에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줄을 몰랐고, 엘리야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엘리야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요, 진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그 사건을 통해서, 그제서야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욱 풍성하고 뚜렷하게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믿음이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믿음이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완성된 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정 하나 하나가 믿음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시는 분들은 교회에 나와봐야 재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맞춰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설교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졸다가만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음식점에 갈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맛이 좋은 집을 찾아서 갑니다. 어떤 분들은 맛은 좀 떨어지지만 종업원들이 친절한 집을 찾아서 갑니다. 서울 오장동에 있는 냉면집은 냉면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20분-3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옆에 있는 Ihop라는 레스토랑은 기본이 15분은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 돈 주고 내가 사먹는데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기다려서 먹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절대 안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음식점 하나를 가는 것도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필요와 취향이 있습니다.하물며, 교회를 오는데 재미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이면 교회에 빠짐없이 나오고, 거기다 헌금까지 하고, 교회 와서 졸다가 가는데, 그럴바에야 집에서 아예 편하게 자는 것이 날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도, 교회를 나오는 것을 보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설교를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데, 목사 눈치를 보면서 졸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까지 교회를 나오는 것을 보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도 하나님께서 지금 은혜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도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불경기에 그래도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이 만들어 주시고, 공부와 사업과 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곤두박질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나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 자랐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부르짖고, 아우성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를 생각하셔야만 합니다. 우리의 하소연과 부르짖음과 아우성이 단지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해결해 달라는 것으로만 모아져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을 분명히 알고 계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어려움 가운데서 피할 길을 주시고, 힘든 일을 막아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인지를 인격적으로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르밧 여인의 고백처럼,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 속에서, 깊은 심령에서 확신 있게 나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지 내 앞에 던져진 문제만을 보고, 그 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으로 마음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서,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경험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가야할 곳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말씀이 보여주는 깊은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부요함과 능력의 크심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 그 뜻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세계, 그 뜻을 알고 기뻐하고 이 땅 위에서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고 풍성하게 알고 사는 지점까지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힘든 시절을 지내고 있다면, 그것이 나의 잘못과 죄악 때문에 내게 벌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죄악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가 하나님의 차갑고 냉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이 징계가 아니라, 우리를 더욱 깊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징검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실수와 허물과 실패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8:28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우리가 잘한 것, 우리의 좋은 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큰 장점과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실패하고, 무너지고, 곤두박질친다고 하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교회나,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역사를 통해서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한 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느 누가 그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습니까? 그것을 바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를 정말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단으로 정죄해서 죽였고, 불경죄로 죽였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해야할 것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느 누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나 했습니까? 누가 믿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와 두려움인 죽음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아 깔끔하게, 온전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소망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믿고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우리 안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알고 있고, 좀 더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 고백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들은 흔들리고, 휘청거리고, 계속해서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고, 휘청거리고, 계소해서 의심하는 것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믿음이 완성을 향해서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것들이요, 과정이요, 단계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봐?,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사람인가봐?”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 내십시오. 작은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생의 여정 가운데 베풀어주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오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십시오.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다면, 그냥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눈을 여시고, 마음을 여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휘청거림과 흔들림과 실수와 실패와 무너짐이 여러분들의 삶을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셔서 여러분들을 정금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았도다. 내 실수와 실패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구나” 저와 여러분들은 결코 망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니요,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고,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에서 이탈하지 아니하며, 내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노력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