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파병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정부가 베트남전쟁에 5만여 명을 파병한 사건을 말합니다.
파병의 조건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차관(자금을 빌려 옴)과 기술지원 및 무기원조였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을 말합니다.
베트남의 독립전쟁은, 처음에는 프랑스였고, 그다음은 일본이었으며, 마지막이 미국이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884년 프랑스에 이어 1940년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에 비엣민(베트남 독립동맹회)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 과정에 호찌민은 비엣민을 중심으로 1945년 베트남 북부에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이라는 정부를 수립하고,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전개합니다.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견제하고자, 허수아비 정권인 베트남국(1949~1955)을 세웠고, 베트남국은 다시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자본주의)으로 계승됩니다.
남베트남(월남이라고 부름)은 1955년부터 1975년 사이에 베트남 남부에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베트콩(비엣꽁.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베트남 전쟁 중 미국과 연합한 남베트남(월남)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조직을 말합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사회주의)은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 월맹. 사회주의)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자본주의) 및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군과 싸웠습니다.
1975년 미군이 철수하고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지자 베트남 남부에 정부(남베트남공화국. 1975~1976)를 잠시 수립했다가, 북베트남과 통일하여 현재의 베트남(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사회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어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자본주의)과 함께 사회주의적인 베트콩·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 전쟁이 베트남전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트콩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정식 명칭으로, 베트남공산주의자란 뜻입니다.
베트콩은 호찌민이 1945년 베트남 북부에 수립한, 베트남민주공화국(현재의 베트남)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남부의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자본주의)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군대를 보내어, 남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전쟁은 프랑스와 북베트남·베트콩의 대결에서, 프랑스 대신에 미국이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자본주의인 미국·남베트남·한국 등이 한편이고, 반대편에는 공산주의인 북베트남·베트콩·중국·소련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이념의 싸움을 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이념의 대결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 사이에 베트남에선 한반도의 6·25전쟁과 비슷한 성격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국내의 싸움)인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미국·남베트남·한국 등)과 공산주의 진영(북베트남·베트콩·중국·소련)이 대립한 국제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에 미국은 한국 등의 우방국(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사이가 좋은 나라)에 군사적 지원(파병)을 요청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인적 피해를 줄이고, 명분(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겠다)이 부족한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전투 비용은 미국이 부담하고, 전투로 인한 인적 피해의 반대급부(어떤 일에 대응하여 얻게 되는 이익)로, 경제개발비용(차관)·경제개발기술지원·무기선진화·베트남재건참여 등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지원했던, 남베트남(월남) 정부는 독재했고, 무능했고, 부정부패했습니다.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상실되고, 미국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반전) 국민들의 시위가 커지면서 미군은 철수합니다. 동시에 베트남에서 한국군도 철수합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한(1964~1973) 대가로 경제개발자금을 지원받고, 무기를 지원받고, 기술을 원조받고, 군수품을 납품하여 돈을 벌고, 베트남 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외화(달러)를 획득(손에 넣음. 얻음)하여 경제발전과 무기 선진화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과 파병이라는 빅딜(big deal. 기업 간의 대형사업의 교환이나 거래)로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긴요하게(매우 필요하고 중요하다) 사용되었습니다.
달러는 포항제철의 건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이어져 한강의 기적을 만듭니다.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이 6·25전쟁 이후부터 1997년 이전까지 급격하게 경제가 성장했던 시기를 말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걸친 독일(서독)의 경제적 발전을 이르는 말인 ‘라인 강의 기적’에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베트남 파병은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지만, 파병 군인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으며, 아직도 고엽제(고강도 제초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풀을 죽이는 농약을 제초제라고 하는데, 고엽제는 제초제의 일종이지만, 제초제보다 더 강력한 것이 고엽제라고 합니다. 고엽제는 풀과 나뭇잎은 물론이고 나무까지도 말라죽게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은 ‘오렌지 작전’ 이름으로 고엽제를 밀림에 대량으로 살포하였고, 그 아래서 작전 중이었거나 살았던 사람들은, 고엽제 살포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고엽제로 인한 고통을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