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갈 수 없는 자리(2)”
가족으로 얽히기 때문에 도망갈 수 없는 책임 아래에서,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것 아니라는, 자신의 이해 범주를 깨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산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 고달픈 인생을 반복하여 살도록 버려두시는가, 왜 나는 오늘도 공중 나는 새를 봐야 한단 말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면, 차라리 생각이 없었더라면, 생각할 능력이 없었더라면, 내가 다만 저 비둘기였다면, 내가 다만 저 매미였다면, 내가 그저 한 줌의 먼지였다면,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흔드심입니다. 거기에 불려 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만 이 도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이 이 손길로 여러분의 심령을 배우십니다. "일어나라 답하라 너 아직도 내 생각과 네 확인 후에 숨어 내가 너를 만든 뜻을 외면하고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식입니다.
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놀랍죠? 우리 모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민을 애써 다른 것으로 치환합니다. 무엇으로 합니까? 이런 말 해서 죄송합니다만, 전도, 기도, 성경 읽기로 치환합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고민과 이 깊은 답, 자신을 깨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위임하고 안내를 구하고 붙잡아 달라고 싸워야 하는 이 도전에 직면한 자의 갈등과 고뇌를 허울 좋게 외면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회적 책임, 시대적 책임, 국가적 책임을 말하는데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틀을 신앙적으로 확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다만 도망가고 변명하는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내 자식들 건강하고 남한테 손 가락질 받지 않고 살게 해주십시오" 이런 태도는 기독교를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민하시고 애쓰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십시오. 고민하시고 울부짖으십시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다행히 그 내용이 한참 나오니까 여러분이 그런 말 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환난에 있을까요, 인내에 있을까요, 연단에 와 있을까요? 나이가 들고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야 할 때가 되면 하나님이 다만 우리를 소모하고 쇠진하게 하고 탈진되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를 정금같이 제련하셨다는 감사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줄 아시는 기대와 믿음과 각오가 있기를 바랍니다.
~ 박영선, 《욥기 설교》, p.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