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해주시는 방법은 왜 십자가인가? 그 마음을 우리는 아는가?
우리가 교회에서나 설교에서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은혜만이 가득해서 사람의 마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사람을 말할 때 끊임없이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학회가 가장 중심으로 들고 나오면서 마음과 할례가 마음의 할례가, 마음을 찢는 것이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는가를 지나오면서 교회는 왜 마음을 깊이있게 다루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깊이있게 마음을 다루는 신앙입니다.
마음을 찢으라는 할례는 어느 교훈에서도 어느 종교에서도 어느 인문학에서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
할례는 마음에 하라(롬 2:29)
사람의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마음입니다.
믿는 것도 마음이며, 완고해지는 것도 마음입니다.
회개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탐욕과 음란과 교만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곳도 마음이며, 성령께서 다루시는 자리도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지 마음이 빠진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회는 기독교의 마음을 다시 정리하면서 왜 은혜만 있고 자기부인의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성경이 사람의 마음을 묻는다는 것은 결국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누구의 말을 따르는가.
무엇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실제로 다스리는 이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회개도, 거듭남도, 마음의 할례도, 자기부인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모세·다윗·솔로몬의 반복된 실패와 율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음을 역사로 드러냅니다(롬 7장).
자기중심성은 교육이나 결심, 율법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에흐예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고 친히 이루셔야 합니다.
핵심 명제는 "마음으로 마음을 고칠 수 없다, 오직 마음 밖에서 온 십자가만이 마음을 바꾼다"입니다.
자기중심성의 해법은 개선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에 연합할 때에만 옛 자아가 죽고(롬 6:6, 갈 2:20), 마음의 할례가 실제가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어야 할 대전제이면서 동시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학회는 십자가를 영적계명이라고 칭하기로 했습니다. 십자가 영적계명, 하나님의 율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입니다(마 5:17).
우리가 알고있는 대속은 끝이 아니라 좁은 문의 입구입니다. 대속에서 나타난 은혜가 마음을 찢은 회개와 은혜와 사랑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마음을 세차게 베어내는 것입니다.
은혜구원, 대속구원은 모두 십자가만 아는 것입니다.
좁은 문의 통과는 마음에 할례를 갖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 앞에서 예수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계 3:20).
너는 내 십자가에서 마음을 찢고 자기중심성의 자아를 찢었느냐?
십자가를 믿는다면서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자기중심적 은혜로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도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자기 중심으로 판단한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열매를 먹듯이 십자가를 다시 자기에 좋은 것으로 해석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마음의 할례는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라(욜 2:13)는 말씀은 노력의 명령이 아니라, 십자가를 만난 자에게 일어나는 표지입니다. 그 표지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고 성령과 교통하는 이기는 자가 되는 길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생명책에 기록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