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희·이완구 다 날아갔다…“가슴 쓰렸다” 총리 잔혹사 [박근혜 회고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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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인 시절을 포함해 재임 중에 국무총리 인선 때문에 많이 애먹었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선 행정부를 총괄하는 총리 인선이 원만히 이뤄져야 하는데,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검증의 벽을 넘지 못하거나 어렵사리 임명한 뒤에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낙마하는 경우가 잇따랐다. 당시 언론에선 ‘총리 잔혹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선 승리의 기쁨은 찰나였을 뿐 조각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당선인 시절 초대 총리 후보자를 지명하기 위해 5~6명의 인사와 접촉했는데 모두 사양했다. 수십 장에 달하는 검증 답변서를 작성하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야당의 공격에 시달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을 포함한 재임 기간 총리 인선 문제로 고생을 겪었다. 2013년 5월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 상공회의소 및 외국투자기업 관계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 중앙포토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사회적 평판도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명망도 있던 한 인사는 처음엔 총리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며칠 뒤 내게 고사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청문회에서 야당이 노골적인 정치적 공격을 퍼부을 텐데 아내와 자식들이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기 힘들다’고 심하게 반대해 어쩔 수 없습니다.”
고심 끝에 총리직 제안을 받았던 다른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검증팀이 실시간으로 검증 답변서를 요구하고, 다양한 의혹에 대한 해명을 거의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요구하자 나중에 질렸다는 듯 “죄송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총리직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일들에 대해 검증팀이 “문제가 될 수 있어서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고 요청하면 “정말 이게 문제가 되나요?”라며 놀라는 분도 적지 않았다. 거절하는 인사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내 고민도 점점 커졌다.
“총리 후보자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
“총리 맡아 달라” 불쑥 부탁, 확답 안 한 김용준
2013년 1월 24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취재진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는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박 당선인이 김 후보자를 지명하자 정치권에선 예상치 못한 인선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중앙포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일까. 고민이 깊어지던 내 눈에 옆에서 일하던 김용준 인수위원장이 들어왔다. 김 위원장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다니는 등 고난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만 19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당시 만 75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고, 정치 경험이 없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헌법재판소장을 맡으며 법조계에서 쌓은 인망이 두터웠고 인품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당선인 시절 인수위에서 함께 일하면서 김 위원장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총리 적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수위는 정부 조직을 빼닮은 다양한 분과로 구성되고, 그만큼 각양각색의 전문가들이 모인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토론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지지만 자칫하면 인수위원들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탁상공론으로 흐르기도 쉽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인수위 회의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공전할 때면 적극적으로 나서 합의를 끌어냈고, 다양한 의견들을 적절하게 융화하면서 큰 말썽 없이 인수위를 이끌었다.
말을 하기 전 여러 번 생각하고 인내할 줄 안다는 것도 김 위원장의 장점이었다. 정치하다 보면 불필요한 말과 실언으로 설화(舌禍)를 일으키기 쉽고, 이로 인해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 십상이다. 특히 과거 정부를 보면 국정 운영 과정에서 고위층 인사들이 설화를 일으켜 정부 업적이 묻혀버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그런 면에서 신뢰가 갔다.
김 위원장과 약속을 잡고 인수위 사무실에서 만난 나는 불쑥 총리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 위원장은 잠깐 묵묵히 생각하다가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당장 결정할 사안은 아니고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며칠 뒤 김 위원장은 지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했다. 막혀 있던 총리 인선 문제를 이제야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2013년 1월 24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김 위원장(왼쪽)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중앙포토
2013년 1월 24일 나는 인수위 사무실이 자리한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회견장에서 총리 인선을 발표했다.
“저와 함께 새 정부를 이끌어갈 총리 후보자는 현재 인수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분입니다.”
당시 총리 인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언론에서 각종 추측성 기사가 난무했지만, 김 위원장을 예상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현장에서 내 발표를 들은 정치부 기자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 황당하단 말도 아깝다” [박근혜 회고록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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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사태 이후 이어진 나에 대한 검찰 수사와 구속, 이후 재판과 수감 생활까지…. 세간에서는 나와 검찰의 관계를 ‘악연’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악연의 시작점으로는 ‘채동욱 사태’가 많이 거론된다.
내가 대통령 당선인이던 2013년 2월 7일,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검찰총장 추천위원회가 열렸다. 법무부 관계자와 민간위원 등 총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추천위는 한상대 검찰총장의 후임으로 김진태(사법연수원 14기) 대검찰청 차장, 채동욱(14기) 서울고검장, 소병철(15기) 대구고검장을 추천했다.
당시 여권 일각에서는 안창호 헌법재판관이나 김학의 대전고검장을 추천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실제 추천위에서 선정한 3명의 후보를 두고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특히 임기 말의 정권에서 소집된 추천위가 차기 정부의 검찰총장 후보자를 추천한 것을 두고 주변에서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는 해도 상식 밖의 일”이라고 우려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치 인생을 걸으면서 나는 검찰 조직과 특별히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특정 검사 그룹과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검찰총장 후보자를 추천하든지 결정적인 하자가 없고, 업무에 적합한 사람이라면 믿고 지명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먼저 추천위가 추천한 세 명의 후보에 대한 주변의 인물평을 들었다. 검사 출신인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도 채 고검장에 대해서 적임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나는 3월 15일 우리 정부 첫 검찰총장에 채 고검장을 내정했고, 그는 인사청문회를 거쳐 4월 4일부터 검찰총장 임기를 시작했다.
2013년 4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접견실에서 채동욱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후 채 총장은 혼외자 논란으로 9월 13일 자진사퇴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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