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인-소상도
미우인 - 운산도
미우인 - 환축청운도
.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
(二米의 墨戱雲山)
** 중국 산수화에서 미불-미우인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미법산수라고 하여 문인화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미불은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북송의 전기에는 관료 문인들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회화는 재야 문인문인과 직업화가의 영역이었다. 북송 중기로 접어들면서 문인 사대부도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점차 많아 졌다. 산수화 영역에서는 미불과 미우인 부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불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산호첩(珊瑚帖)이 그의 진적이라고 하지만 믿을 바는 못 된다. 미불이 남긴 기법은 미점준법(米點皴法)과 발묵(潑墨)법이다. 말하자면 수묵점염(水墨點染)의 산수화법을 창시하였다. 아들인 미우인도 아버지 화법을 이어 받아서 미점 산수화를 잘 그렸다. 부자 간인 두 사람을 이미(二米) 또는 대소미(大小米)라 부른다. 그들이 남긴 회회 기법을 미가법(米家法) 또는 미씨운산법(米氏雲山法), 米家雲烟法이라고 한다.
미불은 한때 지방에서 행정관리직에 봉직하였으나 51세에서 55세까지 화원과 서원에서 화학박사와 서학박사로 일 하였다. 서사(書史)와 화사(畵史)라는 저서를 남겼다.
북송 시대에 화가들의 봉직관서로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을 두었다. 당의 한림원과 남당의 화원제도를 이어 받은 정부 기관이었다. 화가는 6등급으로 나누어서 임명하였고 책임자는 대조였다. 그림을 좋아하였던 휘종이 화원제도를 잘 정비하여 가장 번성하였다. 화원 중에도 휘종 때의 선화화원이 가장 유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원의 화가는 대조가 되어서 황제가 하사하는 금대(金帶)를 매고 다니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알았다. 남,북송을 통털어서 화원화가는 986명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조직을 가졌던 화가의 수는 76명 이었다.
미불이 살았던 시대는 경제가 번영하여 여유로운 삶을 즐기던 때였다. 문학과 예술이 크게 일어난 시기였다. 미불은 사대부 출신으로서 그림 뿐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송의 4대 서예가 중의 한 명이다. 미불은 물상을 빌어서 마음을 표현한다는 예술론을 수용하였다. 사대부인 그가 그린 그림은 직업화가가 그린 그림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형사(形似)를 중요시 하지 않고 뜻의 전달을 강조하였다.
그는 서화동원론을 신봉하였다. 행서와 초서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미불 그림의 뿌리는 남당 시대의 왕묵과 장지화 그림이라고 한다. 동원이 그린 남방 산수화를 받아 들여 안개와 비를 표현한 풍경을 그렸다.
미불은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지만 그가 이룬 최대의 예술적 성취는 미가산수(米家山水)라고 하는 독특한 산수화 기법을 창시한 것이다. 그가 창시한 수묵문인화풍의 그림은 중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발전이다. 회화에 크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그의 기법을 배운 화가들이 많아지면서 미가법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미가산수는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였다.
미가법(米家法)은 산이나 언덕의 입체감을 나타낼 때 붓을 옆으로 눕혀서 쌀알 같은 점을 찍는 기법이다. 미불은 강남의 뻬어난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미점준으로 산수화를 그렸다. 험준한 산 봉우리가 전혀 없는 평원산수화(平遠山水畵 )를 그렸다. 시대의 미의식도 바뀌었다. 화려한 표현을 싫어하고 천진평담(天眞平淡)한 표현을 좋아 하였다. 미불이 먹을 즐겨 사용한 기법은 종이에 먹물이 번지도록 하여 형상이 흐릿하고 어렴풋이 보이게 하는 용묵법이다. 발묵법(潑墨法)이다. 발묵법은 미불이 완성하였고, 중국의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 되었다.
미불이 살았던 시대에는 문동도 있었고, 소식도 있었고, 서예가 황정견도 있었다. 그의 예술 사상은 문동과 소식의 예술사상과 같았다. 이들이 예술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함으로서 중국 회화사에 변화가 나타났다. 변화를 주도한 소식과 문동은 문인이다. 소식(동파 1038-1101)은 ‘그림의 목적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다’ 라는 새로운 개념을 주장하였다. 산수화의 경우도 행려도나 와유(臥遊)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매개물이다. 라고 하였다. 물상의 형태를 빌어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다면 감상자는 그림을 통해서 소상의 풍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성정을 알 수 있다. 그림은 화가의 개성과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소식의 주장이었다.
예술관의 변화가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흔히 당의 왕유가 그린 그림에서 뿌리를 찾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변화된 예술관에 의하여 문인화가 나타난 시기가 송대이다.
송대에는 새로운 유학 사상인 성리학을 중심으로 신유학이 정립하였다. 신유학에서는 모든 현상과 자연의 힘 그리소 심성(心性)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관에 의하여야 가능하다. 존재하는 사물들은 보편적 체계(규범화된 구조)와 연관지어져 있다. 신유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실적인 형상에서 이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형상 너머에 있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원리를 찾으려 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과학적인 탐구를 무시하였다. 미술에서도 사실적인 표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현실 체계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치부하여 무시하였다. 지식층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추구함으로 가치관에서 일반 대중층과 분리되었다.
사실적인 북방 화파가 유행하던 북송에서도 이미 이런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동파의 그림에서 찾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작가미상의 그림에서 이미 이런 기미가 보인다. 갈필로 그린 감각적인 필선과 시각적인 소소력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두루마리 그림에서 문인화가의 취향과 기법이 나타났다. 문인화풍으로 그린 초기 화가 중에는 미불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미불이 항주에서 소동파를 만나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소동파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미불의 기법이 너무 급진적이었으므로 휘종은 미술작품 소장 목록에 미불은 작품은 넣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 미불의 진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이유인지 모른다. 미불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아니라 새로운 미술을 개척한 화가이다.
미우인(米友仁1081-1165)은 미불의 맏 아들이다. 미불의 회화 기법을 전수 받아서 그림을 그렸으므로 미점산수(米點山水)를 미가법(米家法)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미우인은 아버지와 다르게 많은 작품이 전해 온다. 미우인은 휘종 때부터 여러 곳에서 살면서 벼슬살이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미우인 회화의 기본은 발묵법이다. 50세 쯤되면 적묵(積墨)과 파묵(破墨)을 사용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초묵(焦墨)도 나타났다. 윤곽선도 그리고 준법도 사용하는 변화도 보였다. 이렇게 변화를 꾀하였더라도 미씨 기법의 기본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라는 인상을 준다.
동기창은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미가 산수의 연원을 동원의 그림에 두었다. 동기창이 설명하기를 동원은 먼 곳의 나무는 점을 찍듯이 하여 마치 작은 나무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미점산수의 뿌리를 바로 여기에 두었다.
등춘(鄧椿)은 화계(畵繼)에서 미우인은 빠른 붓놀림으로 점을 찍지만 천진함을 잘 지키고 있다고 평하였다. 북방의 산수화는 건조한 기후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산의 윤곽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남방의 산수화는 다습한 기후로 안개와 비를 흐릿하게 보이도록 그렸다. 이런 정경은 동원과 이미(二米)가 잘 그렸다. 이처럼 흐릿하게 표현한 그림은 문인들의 기질과도 잘 맞았다. 송대의 시인들이 쓴 시를 보아도 모호한 표현을 하였다.
가장 단순한 기법으로 남방의 풍경을 그리는 데는 놀라운 효과를 지녔으나 좋지 않는 점도 있었다. 너무 단순하여 누구나 쉽게 모방하였다. 이것이 문인들이 쉽게 그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미불, 미우인 이전의 산수화가들은 사실적인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학 사상이 형상(形像)보다는 이치(理)를 더 높이 평가하면서 문인화가가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하는마음 전합니다 촌정선생님...
서예가로 만 알 고 있어습니다
기온이 많이 내려 갔습니다
늘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