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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올라있는 글들을 보다가 눈을 통해 알아보는 상대방의 심리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화할 때 상대를 보지 않는 사람은 뭔가 숨기려는 마음이 있는 경우라고 합니다. 상대에게 시선을 던지는 시간이 30퍼센트 이하이면 그 사람은 무언가 감추고 있다고 추측가능하다고 합니다.
대화할 때 시선을 이리저리 불안정하게 돌리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불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어떤 민완 형사의 말에 의하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자백을 하기 전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가능한 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상대를 곁눈질로 쳐다보는 경우는 이야기의 내용에 불만이나 의문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선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시선의 방향도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남이 부당한 소리를 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곁눈질을 하는데, 그것은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하지만 못마땅하다든가 석연치 않다는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는 상대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기분 나쁜 소리나 부당한 억지를 부리면 당신도 양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입니다.
상대를 관찰하면서 발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얼굴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상대를 불신하거나 경멸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을 볼 때 얼굴을 먼저 보는 것이 정상적인데 형사나 불량배 같은 사람들은 상대를 아래서 위로 훑어봅니다. 왜냐면 그것은 상대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는 경우는 상대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는 놀라거나 강한 흥미를 가졌을 때 눈을 크게 뜨는데, 이것은 자율 신경이 눈동자의 개폐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할 때 상대를 오래도록 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의 내용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는 시간은 대화 전체 시간의 30~60퍼센트라고 합니다. 이 평균치를 넘어서 상대를 계속 주시한다는 것은 말의 내용보다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외에도 많은 눈동작을 통해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보는 통계가 나와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체로 상대방을 안다고 할 때 나이, 출생지역, 학력, 살아온 배경등을 알면 그를 안다고 보통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우리도 유명 연예인의 프로필을 찾아보고 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대표작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잘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말에 비판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들의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하고 본질적인 그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런 것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참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법을 깨닫고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첫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44절,4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본문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도무지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택하시는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은 택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청년 때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으로부터 공적으로 위임받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몰라 무지막지하게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사울이라는 청년...하나님께서는 전혀 쓰임받을 자격도 없고 빨리 없어져 버려도 시원치 않을 사울을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복음전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전파의 위대한 역할을 감당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사도 바울로 만드시고 복음전도의 귀한 그릇으로 쓰신 것은 그 당시 어느 누가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택하심의 섭리가 정말 놀랍고 탁월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자신이 너무나 무지막지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며 나중에 이름을 바꿉니다. ‘가장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 이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하나님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죽을 때까지 믿는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죄를 가슴깊이 파묻고 늘 빚진 자의 마음, 작아진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행했던 크나큰 죄악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있게 십자가만을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너무나 놀랍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가운데 특별히 택하여 구별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 17절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을 하시고 인도하여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선택받은 사람들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15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3편 10절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오늘 본문 6장 44절과 45절에도 분명히 예수님에게 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끄신 자만 올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올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들속에 들을 귀와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으면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생겨나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구원의 확신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에 가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배우시고 깨달아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의 날에 모두 천국에서 부활하여 영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둘째로 하나님을 본 분(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 46절,4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오직 하나님을 본 분이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영어성경에선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No one has seen the Father except the one who is from God; only he has seen the Father. / I tell you the truth, he who believes has everlasting life.”
영어성경을 보면 우리가 조금 오해하기 쉬운 본문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영어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9~1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즘 연예인 부모와 자녀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연예인 아버지와 그의 아들 혹은 딸이 함께 1박 2일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가하면, 또 어떤 방송국에서는 연예인 부모와 연예인의 자녀가 나와서 함께 퀴즈를 풀고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또 어떤 방송국에서는 이미 장성한 연예인의 어머니가 나와서 연예인 아들, 아들 딸의 사생활을 이야기하고 허심탄회한 생각들을 나누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혹은 그 엄마에 그 딸.... 부전자전, 모전자전 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자녀의 성격과 외모를 보면서 부모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속에서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유전적인 현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계속에서도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완전한 일체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한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길이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모습이십니다. 찬양곡중에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할 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로 믿고 참된 신앙으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님 주신 참 떡(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속에 항상 모셔야 합니다.
50절과 51절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오래전 작고하신 유명 코메디언 서영춘선생이 생전에 힛트시켰던 노래가 하나 있는데 ‘인천 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 곱뿌 없이는 못마십니다.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제일 끝부분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풉빠라 풉빠!! 피가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우리의 몸속에 음식이 들어가면 그 음식으로 우리가 힘을 얻고 생명의 연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음식의 열량이 사라지고 수분이 사라지게 될 때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없어 보이는 개그송에 나오는 유행어이지만 정말 찌개백반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으로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영혼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뜻하는데 우리 주님을 모시면 우리가 영원히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 주님을 우리의 삶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찾아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여러 모습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환경과 여러 사건들로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릴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 음성이나 사인들을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우리의 생활속에서 항상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문을 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겠다고 하십니다. 교제의 회복입니다. 즐거움의 회복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했던 일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를 반가이 영접한 것도 좋은 옷을 입힌 것도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킨 것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 것도 다 그의 아버지가 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지 손을 내밀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끌어당기시고 그 이후의 모든 일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바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예수님의 헌신에 대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버스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좁은 커브 길에서 아이가 뛰어나왔습니다. 갑자기 닥친 일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찰나처럼 짧은 순간에 운전기사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버스가 아이를 비켜가면 커브 아래로 굴러 전복될 것이고 그렇다고 아이를 살리자고 버스가 뒤집혀 더 많은 사상자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순간 선택을 했습니다.
버스는 아이를 쳤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승객들은 놀라서 밖으로 나와 운전사를 가리키며 "저 살인마!" 하고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몰매를 칠 것 같았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안고 아무 말없이 울기만 합니다. 그때 버스 안에서 한 청년이 내리며 흥분한 승객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잠깐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저 운전기사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만일 지금 다시 한 번 죄인된 우리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선택하셔야 된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죄인 된 우리를 선택하실 것입니다.
생명과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저와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속에 노크하십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여전히 문을 닫아놓고 계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속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보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삶속에 모시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과 함께 사시는 체험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