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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요 21:15-17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였고, 우리는 땅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예수님은 하늘에 것을 말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땅에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기차의 레일처럼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이루어서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개입을 합니다.
성령이 개입을 하시면 문자를 영으로 해석케 하십니다.
이러 할 때 성경의 진의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니 말씀을 볼 때 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가 마치 선문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건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또 다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건 주님이 나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 양을 치라” 고 합니다.
세 번째, 또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 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주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습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하여 봅시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에게 줍니까?
창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자기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수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 갑니다.
왜? 찾아 갔을까요?
이는 사랑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그걸 모르면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 식으로 해석을 해 버립니다.
우리 식으로 해석을 하면 베드로가 마치 의지적 결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예수님의 물음이 베드로 더러 예수님을 사랑해 달라는 물음인가요?
아니면 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심입니까?
이걸 우리에게 물은 것이라 생각하시고 스스로에게 답을 해 보세요.
나는 과연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것은 곧 우리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자입니까?
자기가 살고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서 도망을 간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찾아 와서 묻습니다.
베드로 너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진짜 맞니?
예수님이 왜? 도망 간 놈을 붙잡고 이런 질문을 하는지?
왜 세 번 씩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셨는지 그 진의를 알겠는가요?
그럼 예수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셨는지 탐사해 보십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서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장차 성령이 강림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물고기 잡는 것으로 이야기 해 주시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서의 일을 다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가십니다.
이제 아버지께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늘나라로 가시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창세전 언약인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은 중단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신 것도 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제자들을 통해서 대신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 돕는 분을 보내 주실까요?
이는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돕는가 하면 제자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하도록 돕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중단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행하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요?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구원 하는가 하면 마치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듯이 제자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서 성도들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찾아냅니까?
부활의 도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찾아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양들은 그 말을 알아먹고 따르게 됩니다.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로 비유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한결같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귀 있는 자들은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 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자들은 다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복음입니다.
새 언약의 복음이 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언약이라는 그물을 주어서 그 그물로 예수님의 양들을 찾아내게 하신 것입니다.
새 언약을 전하면 예수님의 양들은 알아들어요.
이 새 언약을 누가 증거케 하는가 하면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 안에서 증거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어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면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요?
이는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나와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 보면 생명수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동산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한 번 보고 갑시다.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10-14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을 하지요.
발원이란? 근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강물의 근원지가 에덴이에요.
여기서 보면 에덴과 동산이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산이 에덴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 됩니다.
이 강물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생명수 강이라고 했어요.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2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수 강이란? 생명을 유출한다는 말입니다.
이 생명이 어디서 나온다고 합니까?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이건 어린 양이 생명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이 생명 그 자체에요.
어린 양에게서 나오는 생명이 생수의 강이 되어서 온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수 강을 성령이라고 하셨어요.
요한복음 7장을 봅시다.
요 7:37-39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 목 마른 자들은 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생수를 준다고 합니다.
이 생수를 뭐라고 하는가요?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수의 강이 어디서 흘러내린다고 합니까?
그 배에서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그 배란? 우리 안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성령이 우리 안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 성령이 언제 오시는가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야 옵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이 하늘나라에요.
아버지가 계신 집을 이 세상 속에서 모형적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어디에 있나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우거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부활의 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부활의 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구원 얻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도를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부활의 도를 누가 증거 합니까?
제자들입니다.
그러자 수많은 예수님의 양들이 제자들의 말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남겨진 예수를 대신 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의 양들을 찾아내서 먹이고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양을 먹이는 것은 동일한 의미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양을 먹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이 베드로가 양을 치고 먹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달라집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진의는 다른데 있게 됩니다.
즉 베드로더러 양을 먹이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너는 내 양을 먹일 수 없다”는 다른 뜻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잘 보세요.
지금까지 일의 전개 과정을 잘 보세요.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정답이 나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고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으로 조반을 먹이고 난 후에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제자들은 스스로 물고기를 잡지 못하였어요.
물고기를 잡는 것이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그럼 스스로 물고기를 잡지 못하였으면 스스로 양도 먹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고기를 예수님에 의해서 잡았다고 한다면 양도 예수님에 의해서 먹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 힘으로 양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 속에서 내 양을 먹이게 하겠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제자들은 밤새도록 물고기 잡는 것을 허탕을 쳤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물고기를 잡은 것과 같아요.
자 보세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물고기 한 마리를 못 잡았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잡았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면 제자들은 아닌데요?
우리는 예수님 양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먹이게 해 주셔야지만 됩니다! 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베드로가 예! 제가 먹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되어요.
도리어 우리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도와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희들은 내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물고기 잡는 것으로 확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왜? 이런 결말로 끝이 나는지 아세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고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도망을 가고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예수님이 찾아가서 고기를 잡게 하시고 이런 자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묻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너희는 내 양을 먹일 수가 없다는 것을 반어법(反語法)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놈이 어찌 예수를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면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친 자기 주제를 아는 베드로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주님을 사랑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도 내가 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양들은 오직 주님만이 먹이고 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불가능성을 알 때 마치 고기를 잡고 나서도 이건 내가 잡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잡게 해 주신 것이야! 라고 하는 것처럼, 양을 먹이는 일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것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도망을 간 놈을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하고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예를 들어 설명할게요.
중풍 병자가 있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했어요.
이건 축구를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축구를 할 수 없는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까?
당신은 축구를 할 수 없는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중풍 병자에게 축구는 상상이에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안 들어 먹어요.
그러니까 중풍 병자는 축구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아! 내 몸은 병든 몸이구나!
이 병든 몸에서 나를 좀 낫게 해 줄 사람이 없을까!
구원자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베데스다 못의 전설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못 가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 못의 전설은 하늘에서 천사가 가끔씩 못에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물이 동한다는 말은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운동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는 때는 그 어떤 병자라 할지라도 그 못에 들어가면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게 베데스다 못의 전설이에요.
38년 된 병자도 이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못가에서 혹시나 병이 나을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38년 된 병자는 물이 동(動)하여도 들어 갈 수가 없어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에게는 물의 동함은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한계성만 더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묻습니다.
그러자 그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하여도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자기 가능성은 제로(0) 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를 구원하세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의지하지 예수를 믿지 않아요.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 물이 동하여도 들어갈 수가 없는 자기 가능성이 전혀 없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이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서 자기의 무능력함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말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베드로의 불가능성을 확인시키고자 함입니다.
베드로는 불가능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이 자기에게 얼마나 부당한 말씀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 할 때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록 베드로가 양을 먹이는 일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가르치고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먹이라고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난 후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된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후에 곧 바로 터져 나왔어요.
사도행전 3장을 봅시다.
행 3:1-16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지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순절 날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충만을 입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합니다.
나면서 된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립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손 사래를 치면서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우리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너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살아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한 결과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어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을 알아요.
이건 자기들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들 안에서 하신 일이란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건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기들 안에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간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도 우리 생각으로 말이에요.
이 모두가 내가 누구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린 예수님을 사랑 할 수도 없을 뿐 더러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도 없어요.
우린 중풍 병자들이에요.
이 몸뚱이가 그렇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랬잖아요.
죄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 뜻을 알고서도 그 뜻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꼬!” 라고 탄식을 하였잖아요.
모든 신앙은 이 탄식의 바탕에서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고지(告知)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적 기능이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 말씀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말합니까?
죄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에요.
죄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된다고 하면 그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에요.
오직 그 속에 죄가 없는 의인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오셔서 우리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더러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육신은 죄 아래 팔린 몸이에요.
이 몸뚱이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중풍 병자와 같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어 먹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죄를 먹고 마시는 일들을 자행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졌다는 것은 곧 빛이 어둠에 비췬 것과 같아요.
빛이 어둠에 비취는 순간 어둠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것이 폭로 되고 말아요.
이처럼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오는 것 자체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당하는 것이에요.
어! 내가 빛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나는 어둠이었네!
빛 앞에 서 보니까 비로소 자기 실존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빛 앞에 선 어둠이 토해내는 고백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이 이와 같아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결국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곧 어둠 속에 빛이 비추인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내가 어둠이고 내가 죄인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묻는 물음이 그러한 의도의 물음이에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늘 물어야 해요.
나는 누구냐?
하나님 앞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Who am I?
하나님이 죄인에게 이러저러한 말씀들을 한다고 하여도 그 말씀은 우리 죄인들에게 순종을 이끌어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죄인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말씀이 너는 죄인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진의를 올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감정(마음)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감정)을 읽어내야 해요.
이걸 성령의 감동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문자 속에 담겨진 내용을 볼 수가 있어요.
이럴 때 말씀은 성경이 문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숨결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습니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하고 부인한 전력이 있는 전과자에요.
그것도 예수님이 빤히 보는 면전에서 부인하고 저주했어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으면서도 자기 살 궁리를 하고 도망을 갔다가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찾아진바 된 악당이에요.
이런 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할 말이 없어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설령 베드로가 예수님의 물음에 예~! 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진정성 있는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대답을 해도 안 믿고!
대답을 안 해도 안 믿어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반대로 너는 나를 사랑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실존을 고발하는 것은 너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너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떠난 것은 독자적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독자적으로 살게 내 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이란? 선택을 하신 분이 선택을 당한 자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책임지는 것은 스스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를 지켜주는 분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지켜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보혜사에요.
그런데 이 사실들을 자기 백성들이 몰라요.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떠나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도 죄인이니까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겠지요.
맞아요.
우리도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죄성이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이 본성이 틈만 나면 두더지처럼 머리를 쳐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본성을 깨트리고 꺾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봅시다.
눅 22:24-34절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한 번은 제자들끼리 다투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다투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았어요.
무슨 내용인가 하면 서로 높은 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서로가 예수를 자기가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고자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예수가 정권을 잡으면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겁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나라 사고방식을 이야기 해 줍니다.
예수님이 다투는 제자들을 불러 세워놓고 묻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생각에는 앉아서 먹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냐?
아니면 서서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냐?
그러면서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라고 묻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앉아서 먹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지요.
나는 높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나는 분명히 너희보다 높은 자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섬기고 있지 않느냐!
내가 높은 자이면서 낮은 너희들을 섬기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고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늘나라의 사고를 우리 가정에 두셨어요.
부모와 자식 중에 누가 높은 자이고 누가 낮은 자입니까?
부모가 높고 자식이 낮아요.
그런데 누가 누구를 섬깁니까?
부모가 자식을 섬겨요.
부모기 뼈 빠지게 일해서 자식을 먹여 살린단 말입니다.
이게 하늘나라 방식이에요.
세상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대접을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과 반대로 높은 사람이 섬기는 곳입니다.
이건 제자들의 바램과는 정반대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다닌 것은 높은 자가 되어서 섬김을 받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졸지에 죄인으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탐심으로 예수를 쫓아 다녔다는 것이 들통이 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사고가 곧 마귀적 사고라고 알려 줍니다.
이 모두가 마귀가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까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세상 사고로 예수를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실족하게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 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또 우리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면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뜻대로 척척 알아서 잘 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역설적으로 내게 믿을 것이 없어야 해요.
믿음이란? 믿는 대상의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것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면 내가 의지할 것이 없어야 해요.
로마서 9-10장을 봅시다.
롬 9:30-10: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 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넘어졌느냐?
그건 자기 의를 붙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가능성을 의지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붙잡은 자기 의를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의 반대를 하나님의 의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냐! 행위냐!
두 싸움인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행위 또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과 달라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믿음이 일으킨 사건을 말하지만,
로마서에서 말하는 행위 즉 행함은 인간이 일으킨 사건을 말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성도에게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좋은 것이에요.
이 행함은 마치 생명의 운동과 같아요.
믿음이 발생한 행함은 살아 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같아요.
움직임이 없는 사람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그러한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0장에서 말하는 행위는 믿음과 상관없이 죄인인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행함을 말해요.
이건 죄가 생산해낸 행함이므로 죄의 산물이며 이걸 의지하는 것은 악한 것이 되어요.
그러니까 로마서의 행함과 야고보서의 행함은 극과 극으로 다른 것이므로 잘 분별하세요.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필요가 없고,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주고 힘을 준다는 뜻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고 하시고는 오늘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반전(反轉)의 이야기를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의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막아 준다고 장담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준다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고맙다고 하지 않고 반대로 오늘 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하면서 베드로의 의기 앙양한 모습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는 말은 마귀에게 무참히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기도하면 부인하지 말고 자기가 한 말을 끝까지 잘 지켜야지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이에요.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도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힘을 주어서 베드로의 의지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넘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안 넘어진다고 생각을 하는데,
예수님은 도리어 그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합니다.
“돌이킨 후에” 라는 말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거든 이란 말이에요.
이는 네 각오가 무참히 깨어지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거든 야! 예수 믿는 것은 우리 각오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네 형제들에게 알려 주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면 무얼 말할까요?
자기 힘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할까요?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할까요?
당연히 안 된다는 것을 말하겠지요.
왜냐하면! 자기도 자기 힘 믿고 장담을 하다가 넘어졌잖아요.
그럼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건히 한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되겠지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불가능성을 말해주고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알려주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베드로의 각오와 의지를 꺾고 힘을 무너지는 실패를 경험하고 일어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만약에 자기 의지와 힘을 가지고 믿음을 지켰으면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형제들에게 자기 힘을 기르라고 하지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예수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사람의 각오나 힘으로 되지 않아요.
언제 믿음이 가장 좋은가 하면 내 힘이 없을 때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거두어 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하는가 하면 힘이 있을 때에요.
등 따습고 배부르고 살기 좋을 때에요.
우리 생각에는 복 받고 잘 살면 더 잘 하나님을 섬겨야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그와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복 받고 잘 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16-2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 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하나 지어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노래인가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망한다는 노래에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언약을 어기게 되는가 하면 먹고 배부르면 어긴다는 것입니다.
이건 악담이에요.
아니!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축원을 하고 축복을 하여야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축원이 아니라 저주를 하고 있어요.
어떤 저주인가요?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앙을 당하고 환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세요.
하나님을 떠나서 망하는 역사에요.
인간은 안 되더라는 것을 고발하는 역사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교회를 무너뜨렸어요.
우리의 역사를 보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언제 하나님을 멀리 합니까?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다가도 먹고 살만 하면 멀어지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그 어떤 인간도 등 따습고 배부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잘 살아서 예수 잘 믿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몸이 편하면 몸에 종노릇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은 몸이 좋고 편한 것은 못 이겨요.
우리 몸뚱이는 좋으면 더 좋은 것을 찾게 되고 편하면 더 편한 것을 찾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 몸뚱이에요.
성경을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역사로 기록을 한 것은 인간은 이런 종자들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폭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예수 잘 믿을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힘을 가질수록 하나님과 멀어져요.
죄인은 하나님을 싫어해요.
하나님을 싫어하는 본성을 가진 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에요.
설령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고자 뇌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사랑을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 솔직히 날 사랑하느냐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씀을 들으면 쥐구멍에도 들어가서 숨을 만큼 아픈 기억이 있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자 자기가 죽는 데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을 지켜 준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웃기지 마라!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그 날 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했어요.
그리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도망을 갔어요.
이런 배신자이고 배은망덕한 인간에게 예수님이 부활 하여서 찾아 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사람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속에는 부모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고, 친구도 있고, 재물도 있어요.
그런데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불가능한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아요.
죄인에겐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물음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이 말씀 앞에서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사랑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면!
예! 사랑 할게요 라고 하지 말고,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 할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사랑해 주셔야지만 살 수가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도움을 구하란 말입니다.
즉 나는 잠시라도 하나님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자각 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실존을 아는 자라야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가 있어요.
누가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자인가?
자기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고 예수를 부인 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은혜로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실패하는 자리로 내려 갈 수밖에 없어요.
그 실패의 자리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내가 너를 사랑 한다” 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그 반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묻고 계신지를 아시겠습니까?
모두가 베드로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세요.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폭로 당한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건 마치 법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과 같아요.
법궤 뚜껑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법궤 속에는 3가지 불순종의 증거물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법궤 속에 담긴 3가지 증거물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해요.
죄인을 말해요.
그런데 그 위에 흠 없는 제물의 피를 뿌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요.
용서가 임해요.
은혜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와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고발하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은혜로 먹이는 것입니다.
은혜로 먹이자면 은혜를 받아 본 자라야 해요.
그래서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간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씀으로 베드로의 아픈 생체기를 긁어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
나~ 주님 사랑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이렇게 도망을 쳤지요!
주님이 다 아시잖아요!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주님의 용서가 아니면 저 설 데가 없어요!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말을 듣고자 함입니다.
자기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양은 은혜로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실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양들을 은혜로 먹여요.
법으로 먹이지 않고,,
은혜를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자는 법으로 양을 쳐요.
그럼 양은 다 죽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은혜와 용서와 긍휼을 몽땅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양떼를 맡기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자라는 것을 알고 이런 자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그리하여 법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악당이 살고 있다는 것에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긍휼만이 우리가 거하고 앉을 자리입니다.
그 은혜와 긍휼의 자리를 귀히 여기시고,
올 한 해도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한 해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순간 순간 내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고 나 살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법대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오니, 은혜로 지켜 주시고, 은혜로 완성케 하옵소서. 올 한 해에도 변함없는 은혜 속에서 강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목사님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심에 감축 드립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아멘입니다.
아멘!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실제 삶으로
사랑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바라는 신앙이 실상으로 살아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Amen,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