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이
김 영 숙
매미가 울어대는 한여름이었다. 방학이라 할머니 댁에 놀러온 나는 아침나절부터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했다. 참깨 밭이나 옥수수 밭에 몸을 숨기다보니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 되어서 시냇물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한참 몸을 씻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진성이라는 애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환하게 웃었다. 유난히 하얀 이가 다 보여 나도 모르게 순간 멍하니 쳐다보았다. 졸졸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살은 그 아이가 나에게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아이들은 냇가에서 몸을 씻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으로 가려면 논두렁을 지나 골목길을 가야 했다. 진성이가 멀찌감치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문 앞에 서니 덩치가 크고 성질이 사나운 수탉이 버티고 있었다. 무서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는데 어느새 뒤쫓아 온 진성이가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들고 와서는 멀리 쫓아주었다. 무사히 집 안까지 데려다주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 아이가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저녁에는 연옥이 집에 마실갔다. 두 개의 큰 평상에 아이들이 전부 누웠다. 우리는 서로 하늘에서 별자리 찾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별들이 반짝였다. 백조자리와 독수리자리, 거문고자리, 헤르쿨레스자리와 왕관자리, 뱀주인자리와 궁수자리가 빛났다.
한참 동안 평상에서 놀다가 일제히 일어나 논밭으로 뛰어갔다. 반딧불을 발견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들에는 온통 불빛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날아다녔다.
아랫동네에 사는 영자 네는 아주 넓고 여러 채가 있는 집이었다.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아래채가 있어서 그곳에서 마음 편하게 놀았다. 어느 날달걀 파티를 했다. 계란이 아주 귀할 때여서 실컷 먹고 싶다며 한 사람당 쌀 한 되를 가져와서 달걀과 과자를 샀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는 돈이 없으니 쌀로 계산하곤 했다. 나는 현금으로 주었다. 큰솥에 삶아서 대야에 담아보니 대략 200개 정도나 되어 보였다. 스무 명 가량 둘러앉아서 달걀을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먹는 애들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얼마 뒤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그날 아이들과 큰 대야 두 개를 들고 집마다 밥과 나물을 얻으러 다녔다. 각설이 노래를 부르면 어른들이 나와 큰 그릇에 담아 주었다. 우리 아지트에 도착해보니 김치가 없었다. 순자가 얼른 집으로 가서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는 김치를 양푼에 담아왔다. 겨울밤에 찬 김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보름달을 보면서 온 동네로 돌아다녔다. 논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깡통에 불을 붙여 돌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논밭의 큰 짚불은 마치 사다리처럼 활활 타 올랐다. 달에 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생겼다. 불꽃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면 신이 나서 더욱 고함을 질렀다.
그때 아이들이 우루루 들녘 끝으로 달려갔다. 나도 모르게 진성이와 손을 잡고 그 대열에 끼었다. 우리를 따라오는 붉은 물결을 피하려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도망가다가 둘이 잠시 멍하니 쳐다보곤 가슴이 두근거려 황홀한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는 시골소년과 도시소녀의 애틋한 만남이야기다. 처음 개울가에서 만나게 된 두 아이는 꽃을 꺾고, 송아지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원두막으로 들어가게 되고, 불어난 시냇물을 소년이 소녀를 업고 건너고, 그 후 소녀가 죽으면서 등에 업혔을 때 입었던 옷을 함께 묻어달라고 하는. 마치 진성이와 나와의 이야기 같았다.
동네 아이들은 술을 거르고 남은 고두밥 찌꺼기를 먹고는 술에 취해서 영자 방에 누워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막걸리도 마시고 술 찌꺼기도 먹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논 마당에서는 쌀, 보리, 콩 등 여러 곡식으로 강정을 만들었다. 아저씨는 외지에서 와서 열흘 정도 머무르다가 다른 마을로 떠났다. 온 동네 사람들이 튀길 재료를 가져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아이들은 종일 펑펑 소리를 내는 뻥튀기 옆에 앉아 있다가 흩어지는 튀밥을 주워 먹었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시골아이들은 부산 시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진성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편지로 연락을 해왔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제과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들어가서 그 애를 보니 약간 술을 먹은 얼굴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에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곤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난 뒤 연락이 와도 답장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부산 동래에 사는 남학생 네 명과 여학생 네 명이 시골에 놀러 가기로 했다. 장소는 할머니 동네에 있는 절이었다. 산이 높고 물이 깨끗하다며 친구들이 연신 좋다고 했다. 냇가에서 고기를 굽고 준비해간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기타에 맞추어 팝송도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10명 정도의 시골아이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남학생들은 과자와 음료수를 같이 먹으면서 텃세를 하는 시골 남학생들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바위 옆에 숨어 있다가 대각선으로 진성이를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제과점에서 뛰쳐나와서 그런 것일까? 나는 왠지 실망스럽고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는 진성이를 만나지 못했다. 할머니 댁에도 가지 않아서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어릴 때 시골에서 만났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가끔씩 보름달을 보면 불길 일렁이는 들녘 끝으로 손을 잡고 아득하게 뛰어가던 그 때가 생각난다.
첫댓글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