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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1:6∼14
제목: 힘을 잃어버린 자녀 됨의 권세(노진준 목사)
저는 예전에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양반이었을까? 아니면 상민이나 노예였을까?' 근거는 없지만 제 몸에서 흐르는 기품이나 고상함을 보면 아마 저는 왕족이거나 높은 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에는 노 씨 성을 가진 왕족이나 귀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선 14대 왕 선조 때 이율곡과 함께 탕평책을 펼친 정치인 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노수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 사람의 자손인 것이라고 제 맘대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조선 건국 초기에 양반은 전체 인구의 5퍼센트를 넘지 못했고 전반 이상이 노비였다고 합니다. 1720년대까지도 10퍼센트를 넘지 못하다가 조선 만기 1860년이 되어서야 양반이 전체 인구의 60퍼센트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중인이나 상민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이들이 양반처럼 행세했기 때문입니다. 신분 차이가 있는 사회에서는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해서 어떻게든 양반이 되려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사회에서는 자녀의 권세라는 말이 금세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자녀의 권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 유산 상속인 것입니다. 신분상의 위치를 이어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재산 상속인 테니까요. 몇 년 전에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기증하거나 유산 상속한 돈이 있는데 몰라서 찾지 못한 돈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는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이메일을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사기성 메인은 아닌 것 같고 틀림없이 뭔가 있겠다 싶어서 저는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연락이 왔습니다. 메릴랜드 주 정부에 제가 환급받지 않은 돈이 있다는 것입니다. 53달러 45센트였습니다.
53 달러 45센트! 노수신의 몇 십 대 후손일 수 있는 막연한 가능성! 정말 시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이것보다 더 힘이 없고 시시해 보이는 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힘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 교회가 병든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자녀로서 긍지나 자존심도 없고, 존재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으로 인한 소망도 없이 보입니다.
• 더는 말씀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
최근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기독교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의 가치가 외면당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매우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들을 믿으라고 강요해서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다 보니 의미도 가치도 찾기 어려워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반하는 대로 태초부터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는 것은 현대인들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나 역사로 증명할 수 없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들과, 동정녀 탄생이니 성육신이니 부활이니 하는 만들은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로도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김희성 교수의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대한기독교서회)라는 책은 대속의 죽음이니 부활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하는 신화의 틀이 현대인들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 전통적인 신학의 볼을 바꾸지 않으면 기독교는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예언 아닌 예언을 읽으면서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인이 감소하는 것은 분명한 사신입니다. 그래서 다시 기독교의 부흥을 꿈꾸고 교회의 전성기를 이루도록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이 가진 고민이고 함께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최근에는 그동안 기독교가 보여 준 독선적이고 거만한 태도와 잔인하고 과격한 십자군 정신으로 중무장된 전투적인 모습을 생각해 볼 때 교회는 이제 죄나 전도, 구원과 같은 과격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고, 상생, 화합을 말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교회가 보여 준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면들과 세속적인 혐의 논리에 빠져서 과격하게 행동한 것들을 지적하는 이런 말들을 겸허히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전통적인 신학적 전제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현대인들이 믿고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들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풍조가 달라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 풍조에 따라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믿어지는 성령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본문을 통해서 현대 교회의 문제를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천국의 상속과 축복권의 관계
우선 저는 현대 교회의 문제가 정통 신학의 시대착오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 됨의 권세를 소홀히 여기는 풍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조선 시대에는 어느 신분으로 태어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부모를 둔 자녀 뒤의 권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고 이런 신분 차이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녀 됨의 권세는 이제 신분상의 힘이 아니라 재산의 힘, 즉 유산의 상속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은 아마도 돈인 것입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편리, 자존감, 풍족함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돈이 없어서 배고픔과 무시, 소외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돈이 절대적인 힘이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제법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면 그 권세는 신제로 큰 힘이 되고 편리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세상에서자녀 됨의 권세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이 아닌 축복권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와 타협했습니다.
천국의 상속권과 축복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논리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넉넉하게 잘살기를 원치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왜곡입니다. 자녀 됨의 권세는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대조(contrast)되는 개념인데 비교(comparison)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자녀 됨의 권세는 세상에서 복 받고 잘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세상에서 형통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자녀 됨의 권세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도 잘살 수 있다는 말을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을 가져도 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저는 초대 교회가 현대교회와 다른 점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에서 비롯된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직 미개하고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믿을 수 있었고,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지식이 있고 머리가 커졌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자녀가 되는 권세가 영생에 관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초월하려고 애쓴 반면에 현대인들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천국의 소유권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공짜 입장권을 받는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은혜를 오히려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는 수단으로 더 많이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인과 현대 교인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정통적인 신학적 입장에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변해 버린 가치관에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를 입체적으로 읽기보다 평면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무조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면 무조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사임이 잘 풀리면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읽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변질되었습니다. 자녀 됨의 권세는 당장 손에 잡히는 좋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천국의 상속권에 관해 말했습니다. 물론 영원한 나라의 기업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편리와 안락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녀 됨의 권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원인과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얻을 수 있는 보너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 자녀 됨의 권세를 회복하라
자녀 됨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몹시 괴로운 아픔과 고난, 수치와 상실에도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 천국 관점에서의 변화된 신분 아닙니까? 가난해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도, 불공평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소유함이 아닙니까? 지금 교회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자녀 됨의 권세를 싸구려로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문제는 믿어지지 않는 영생이나 천국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믿는데도 자꾸 눈에 보이는 것들에 흔들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악전고투하며 살던 삶에 안식과 채움의 날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무슨 의미로 견디며 살아 낸단 말입니까? 초대 교인들은 이 믿음 때문에 순교의 길을 갔고, 믿음의 선배들은 이 믿음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며 우리 조국 땅에 들어와 수모와 가난을 경험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지금도 믿음의 동역자들이 숨죽여 가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지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쾌락의 삶을 살 수 있는 유혹에도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신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바로 이 자녀 됨의 권세 때문 아닙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이 권세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교회의 전망이고 교인의 무기력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성육신의 신학적 재해석이 교회를 살리고 교인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되는 권세의 가치를 회복함이 교회를 실릴 것입니다. 희생도, 용서도, 대화도 인내도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나라, 그 생명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에 다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본문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권세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을 크게 열고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으면 어떨까?' 편협하게 "오직 예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은 하나이지만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인 것처럼 모든 종교가 그 정상에 다 오를 수 있는 다양한 길이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정직하게 읽으면 모든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께로만 향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수단도, 사람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녀 뒤의 권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6-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6-8)”.
저는 사도 요한이 왜 여기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했을까 의아했습니다. 사실 사복음서는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세례 요한의 겸손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는 그의 사역 목적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겸손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절대로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지만 그는 그 빛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하지만 빛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경건하고 연심이 있지만 그 혈통도, 그 열심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니고데모에게 구도자의 마음이 있고 겸손함이 있었지만, 그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언했고, 예수님 자신이 증언했고, 자연 만물이 증언 한 바 오직 예수만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고, 그를 믿는 자들이 아버지를 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라서, 장로라서 직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령한 체험이나 교회에 대한 공헌도가 하나님께 입양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독선적으로 들릴 수도 있고, 타종교를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칠까 봐 예수만이 유일한 생명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인정합니다. 몹시 무례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려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교회에서조차 "예수만이 생명입니다"라고 감격스럽게 외칠 수 없고, 그 고백을 자제해야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가 다시 힘을 얻는다 한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고백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프고 답답해서 호전적으로라도 전도하는 분들을 이해하지만, 무례함과 독선으로 타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심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는 고백을 조심스러워하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이 고백을 담대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고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이 우리의 빛이고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고, 이 권세 때문에 힘든 세상을 믿음으로 견디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진준, 『읽는 설교 요한복음 Vol 1』(죠이북스), pp.10∼14.
첫댓글 저자 : 노진준
노진준 목사는 가슴 따뜻한 목회자이다. 이 땅의 모든 성도가 바른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꿈꾼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성도에 대한 이해로 듣는 이에게 깊은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다. 지금도 멈추지 않고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복음의 길을 안내하는 열정적인 설교자다.
토슨 대학(Towson University) 수학과를 졸업하고(B.A.),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으로 석사(M.Div.)를 받고, 변증학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볼티모어 갈보리장로교회(1992~2009)와 LA한길교회(2009~2017)에서 담임 목사로 섬긴 바 있다.
저서로는 『노진준 목사의 다니엘서』, 『회복하라』(이상 지혜의샘)가 있으며, 『조직신학』(은성), 『성경 이미지 사전』, 『개혁주의 은혜론』(이상 CLC)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경력을 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건전한 목사님이싱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와 진정성을 절 깨닫고 확실하게 믿는 변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22
위 설교문을 읽고 저도 자녀 됨에 대한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을 했습니다.
롬8:14-17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연관되는 좋은 말씀입니다.
아멘222
노진준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분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요. 설교문을 담백하고 단정하게 잘 쓰신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설교 좋네요. 일단 생각이 바르시고 깊이가 있으며 재밌습니다.
이 주제는 정말 한국 교회에 필요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는데 요긴하게 쓰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땅과 하늘에서 최고이며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것인데 그 가치를 못알아보는 만큼 세속화되고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져 밟힐 뿐인 것처럼 현대 교회들이 자기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흡수되니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믿음의 좌표를 잘 설정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