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양철지붕에 방 3개인 큰집으로
이사했다.
70년대 시골의 90%가
초가지붕에 돌과 흙으로
쌓은 담장이었다.
집 바로 뒤에는
산이 있고 집 앞에는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은 우물물을
모두 퍼내고 청소를 했다.
우물안 한가운데에서
지하수가 뽀글뽀글
솟아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우물과 우리 집 돼지우리,
아랫방과 뒷산이 수맥이 흐르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러한 사실은
수십 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추정하게 된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 수맥파장 위에서
일어난 나만이 알고 있는
우리 가족의 불행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린 나는 아랫방과 뒤뜰을
이상하게 무섭고
이유 없이 가기 싫은 장소였다.
나도 모르게 오래 있지 못하고
방에서 언른 나오고 싶어 했다.
돼지가 병에 걸려 죽는
것도 보았다.
돼지우리 앞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죽기도 했다.
뒤뜰 울타리 사철나무는
항상 잎이 마르고 나무 아래에는
검은 이끼가 덮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가까이 가기가 가장 싫었다.
셋째 형님과 연애 중이던
형수님이 아랫방에서
임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카를 출산하면서
형수님은 난산으로 일주일 넘게
아기가 나오지 않아 밤낮으로
산통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조카는 살아 가면서
삶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방황하고 속도 썩이고
나이가 많은데 결혼도 못했다.
아이는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랫방을 부수고
방을 더 크게 늘렸다.
이번엔 셋째 형님이 형수님과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둘째 조카를 낳고
집으로 데려 왔는데
조카 이마의 인당혈에
동전 크기의 붉은 반점이 보였다.
조카는 뇌성마비장애아로 태어났다.
경찰관 부부가 딸아이를
데리고 세를 들어왔다.
아이는 자주 보채고 울었다.
사모님도 힘들어 보였다.
형님들이 모두 떠나고
누군가 집에 오면
나는 아랫방에서 자야만 했다.
여름에 태풍주의보가 내려지면
며칠씩 배가 육지로 나가지 못했다.
엄마는 선착장에서 비바람에
떨고 있는 대학생 누나들을 데려다가
여객선이 운행할 때까지 재워주고
밥을 해주었다.
섬에는 해수욕장이 있었다.
예전 우리나라
시골 인심이 모두 그랬다.
나는 아랫방에서
매일 밤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땅속 깊이 빨려 들어가는
똑같은 장면들이었다.
시신이 매장되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때부터
빙의되었는지 모른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나와 분리된 감정들을 느꼈다.
그리고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영어를 배웠고 첫 시험에서
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오락부장을 맡기도 하고,
과학수업 해부그림을
선생님은 모두 내게 맡기셨다.
담임선생님은 반 환경미화도
모두 내게 맡겼다.
나는 그림과 포스터 글씨를 잘 썼다.
그러나 나의 재능들은
더 성장하지 못하고 중졸과
함께 멈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너 화가 안됐니?”라고 말했다.
새로 집을 지었고
그 자리는 안방이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병든 몸으로
돌아가셨다.
삶의 무게와 고통은 모두가 같다.
나만 삶이 고달픈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뒤돌아
볼 때마다 나는 울고 싶다.
카페 게시글
진선생의 도
수맥이 흐르는 자리
진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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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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