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문제의식
일반 존재론, 변증법적 존재론 등의 사유 속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대개 우연적 존재자로 간주되어 소외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지로 살고 죽는 것은 개인이지 인간 일반이 아니다. 개인은 소외되어도 무방한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삶의 주체이다.
반면, 실존론적 존재론은 개인의 구체적 삶(실존)을 사유의 중심에 놓고, 거기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구명하는 존재론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묻는 '내'가 물음 밖에 있으면서 나 이외의 모든 것을 그냥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분석하는 존재론이 아니라, 나를 물음 속에 넣어서 나를 통해 존재를 구명하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방식을 익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일상적으로 늘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것으로 족하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성찰하고 분석하는 존재론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다.
존재와 시간의 문제 의식
죽음,양심, 무, 불안, 시간성, 본래성, 결의성 등은 개별 과학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 고유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이후 그것들은 대게 기독교와 일부 과학에 맡겨지고 철학은 불면의 실체만을 탐구하는 일에 급급했다. 존재와 시간은 이런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서이다.
시간과 존재는 기본적으로 현상학이며, 현존재적 해석학이다. 현존재의 존재구조, 존재 양식 등을 현상으로 받아들여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개념 정리
실존, 실존적, 실존론적
현존재가 문제삼는 그 존재(자기자신의 존재)를 실존이다. 실존은 인간의 현사실적 삶을 말한다. 자신의 실존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반성, 이해를 실존적existenziel 이라 한다. 그리고 현존재의 구조적 자기 성찰 내지 자기 분석을 실존론적 existenzial 이라 한다.
현사실faktum 과 현사실성faktizitat
객관적인 현실에서는 사실이라고 해야 할 사태를 현존재의 경우에 사용한 표현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분명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존재가 이렇게 막연하고 평균적인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현사실성이라 한다.
용재자와 적소성 그리고 전재자 vorhandenes
삶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존재자는 도구이다. 도구적 성격을 가진 존재자를 용재자라 한다. 이 도구가 제대로 쓰일 자리에 적합하게 있는 것을 '세계 적소성'이라 한다.
구체적 삶 속에서 현존재가 존재자를 도구로 삼으면 용재자가 되는 것이고, 단순한 관찰 대상으로 대하면 전재자가 된다.
유의의화 작용
용재자로 하여금 용재자로서 의의 있게 하는 것으로 시장에 가서 버스를 타고, 물건을 사면, 버스와 물건을 유의의화 하는 것이다. 유의의화는 이 세계를 세계이게 한다. 이렇게 보면 세계는 현존재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미의 그물이다.
세인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양식으로,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타자와 더불어 공동 존재를 구성하는 공동 현존재를 세인이라 한다. 즉 대중을 말한다. 우리도 물론 대중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아무도 세인을 벗어날 수 없다.
세인의 존재 양식
빈말
세인 즉 대중의 말이다. 빈말은 일상성 속에서 공공적으로 해석된 것(피해석성)을 전달한다. 빈말은 공공연한 여론으로 둔갑하면서도 사람들은 이 빈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빈말은 무엇을 개시하기는 커녕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빈말은 근거없이 이야기되고 광범위하게 이야기가 퍼져 있다는 것으로도 개시작용을 폐쇄작용으로 반전시키기에 족하다.
호기심
일상 세계에 몰입해 사는 세인의 봄의 경향을 말한다. 호기심은 보기만을 구하여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헤맨다. 호기심은 늘 새로운 것을 찾는다. 요즘 관광이나 유행등이 그 좋은 예이다.
애매성
무엇이 진정한 이해속에서 개시되어 있는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것인지 분명하게 결정되어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만사가 진정으로 이해되고, 파악되고 언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런 것을 가리킨다.
항상 만사가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곳, 즉 늘 새로운 나날이지만 어제와 다름 없는 오늘인 그 일상적 오늘, 거기에서의 세인의 존재 양식이다.
퇴락
빈말, 호기심, 애매성은 세인 자신이 세계로부터 해석되고 있다는 데서 성립하는 비본래적 모습 즉 퇴락의 양상이다. 퇴락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즉 공공적 해석의 세계에 몰입해서 사는 삶의 모습이다. 그 공공적 해석이란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와 인기 등 세속적 명리가 인간을 평가하는 그런 해석을 말한다.
존재의 양상과 죽음
피투성 geworfenheit 과 기투 entwerfen
현존재는 기본적으로 세계 내 존재로서 던져져 있다. 현존재가 이렇게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피투성이라 한다.
인간은 어쨌든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피투성'이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현사실성이라 한다.
반면 현존재가 내일 무얼 해야 겠다. 내일 신발을 사야겠다 등 '앞을 향해 자기를 기획하는' 것을 기투라 한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
나무, 돌, 짐승 등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다.
배려 besorge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맺는 교섭을 말하며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마음씀을 배려하고 한다.
본래성과 비 본래성
비 본래성은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골몰하여 (세계에 몰입해 있는) 분주하는 사는 나머지, 자신을 상실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일상성이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다. 즉 세인의 존재 양식이다.
본래성이란 현존재가 실존론적으로 본래적 자기에 입각해서 자기의 존재를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내면의 양심에 따라 독자적 자기를 회복하는 경우를 말한다.
양심 gewissen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은 세인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것 뿐이다. 이를 제시해주는 것은 '양심의 소리'이다. 비본래적, 일상적 현존재를 본래적 현존재로 돌려놓는 것은 양심이다. 양심이 부르는 소리를 이해하는 것은 본래적 자기를 택하게 한다. 이것을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라 한다.
세인 속에서 자기 상실로부터 가장 독자적인 자기를 불러일으켜 세우는 것을 결의성이라 한다. 가장 독자적으로 '책을 지고 있음'을 향해 불안을 감내하면서 말없이 자기를 기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심은 침묵으로 말한다. 양심은 한결같이 침묵의 양상으로 말한다.
정상성 befindlichkeit
정상성은 어떤 정서적 상태, 즉 '기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 세계가 달리 개시된다.사람에게는 기분을 무시할 수가 없다. 사람은 언제나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러므로 정상성은 개시성이다. 반면,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우울한 기분이 든 현존재는 그 부담을 벗어나기 위해 고양된 기분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이런 정상성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 특히 불안은 근본적 정상성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환경세계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이다. 이에 반해 불안은 죽음을 향해 내던져진 세계 내 존재로서의 현존재 자쳉서 연원한다.
양심을 진정으로 개시하는 것이 불안이다. 양심은 개시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알아차리게 한다. 불안은 현존재의 불안 가능성으로서, 불안 속에서 개시되는 현존재 자신과 하나가 되어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 전체성을 명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지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없다. 불안거리는 무이다. 무가 두려운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불안의 대상은 세계 자체임을 의미한다. 불안은 근본적 정상성이다. 불안으로 현존재는 그가 가장 독자적으로 던져져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일상적으로 친숙하던 세계 내 존재는 생소하게 드러난다.
이 불안에 휩싸인 현존재는 차라리 퇴락적 세인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 도피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배려가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서 스스로 세인 속에 망실되어, 편안한 친밀감 속에 안주할 수 있는 바로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로의 도피이다.
요컨대 현존재는 불안을 통해 자기의 존재양식을 분명히 선택한다. 즉 본래성과 비본래성 중 하나이다.
죽음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기투(앞지를수있는)할 여분의 삶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을 '미제'라 한다. 미제가 없는 것은 곧 소멸이다.
그리고 모든 현존재는 종말에 이르는 존재이다.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있기도 하다. 죽음은 현존재는 존재하자마자 그 현존재가 인수한 하나의 존재 양식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하나의 두드러진 갑작스러움이다. 현존재는 실존함과 동시에 이미 죽음 가능성 가운데 던저져 있다. 이런 피투적 현 사실성을 개시하는 것을 불안이다.
그러나 세인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당장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자위하면서 독자적 가능성인 죽음을 회피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공적으로는 이미 겁에 질린 공포, 음울한 세계도피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세인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은폐하고, 유예하고, 타자에게나 해당된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세인에게 죽음은 회피의 대상이다. 죽음이 확실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건너뛸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닥친다. 이 때문에 사람은 죽음을 삶의 반면교사로 삼아 매순간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 앞에 바싹 다가갈 필요가 있다.
이것을 죽음에로의 선구라 한다. 죽음의 가능성이 회피하거나 은폐할 수 없는 확실한 가능성으로서 노정되도록 그렇게 태도를 취하는 존재를 '선구'라 한다.
시간성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간성인데, 시간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때가 익는다' 때에 따라 성숙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탈자적이다.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시간성은 본래적으로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때에 따라 스스로 익는 시간이다. 시숙하는 시간이다.
시간성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것이 가지고 있는 '시간적 성격' 또는 '시간적 구조'를 가리킨다. 후설의 '의식의 흐름', 하이데거의 '마음씀'이 이런것이다.하이데거의 경우 '흐름'의 의미는 없고, 마음씀의 구조가 시간적이라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가 바로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실제 삶을 보면 우리는 매양 전향적으로 얖을 내다 보면서(기투) 행위를 통해 존재자와 만나면서(현사실성), 살아온 자기를 뒤에 가지고있다.(피투성). 이것이 시간성이다.
다시 말해 과거,현재, 미래로 연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이 있고 현존재가 거기에 실려서 함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그 존재 즉 마음씀이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로 도래하는 것은 '장래'라는 시간성에서 가능하고, 이미 있었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은 '기존성'이라는 시간성으로 인해 가능하며, 행위하면서 존재자를 현전화하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기를 앞질러 있음, - 에 몰입해 있음, 이미 -내에 있음으로 분절되어 전개되는 통일된 전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을 시간성이라 한다. 따라서 시간성을 도래, 기존성, 현전화로 분절해서 해석한다. 이 때 기존성은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있었던 대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현존재는 장래적인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기존으로 있을수 있다. 기존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장래에서 발원한다. 현존재가 행위를 통해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만나는 것을 현전화라
한다.
/ 소광희 '하이데거 시간과 존재 강의'
하이에거의 문제의식은 쇼펜하우어의 문제의식과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입장은 바로 '나'에 의한 존재론이라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존재론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인간 개개인을 단지 사소한 우연적 존재로 보는 기존의 존재론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다. 물론 쇼펜하우어도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기존의 존재론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