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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보혜사이신 성령님
Text Jh14, 16-29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9)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 자문 변호사나 개인 경호원 등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옵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김부장’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그런 기업 총수가 나왔습니다. 사기꾼이 유명 스포츠 스타를 속일 때에도 경호원 여러 명을 데리고 나타났었다고 하지요. 저도 젊은 시절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도 부럽지요? 꿈도 꿔보지 않았어요? 꿈이라도 자꾸 꿔야 꿈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꿈도 안꾸셨다니 아쉽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자문 변호사가 있고 경호원이 있는 삶을 사는 복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진짜로 축복합니다. 복을 받으세요. 헛된 꿈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말씀이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14-16장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사셨던 세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게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특별하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부분의 핵심은 ‘보혜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곧 떠나실 거라며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여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요14,16) 이 보혜사라는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곁으로 불러온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변호인(Advocate), 중재자(Mediator), 위로자(comf-
orter), 돕는 자(Helper), 상담자(Counselor) 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자문 변호사도 되고 경호원도 될 뿐 아니라 인생의 멘토, 위로하고 격려하는 상담자 역할까지, 다 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의 삶을 사는 성도에게는 가장 필요한 역할을 하는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2. 먼저, 16-18절을 봅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본문은 성령님을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여서 성도에게 주신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이신 분이라는 것도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성령님은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하실 분이라 가르쳐주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세상은 속성상 성령님을 받을 수도,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반대로 진리의 속성상 성도들은 성령님을 알고 또 함께 거하실 수 있는 분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도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것은, 보혜사는 성령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합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께서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동안 성도를 여러 가지 면에서 돕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역할과 사역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요일2,1에서는 예수님도 ‘파라클레토스’라고 하였는데 ‘대언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같은 헬라어 단어를 성령에게는 ‘보혜사’, 예수님에게는 ‘대언자’로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도 파라클레토스이고 성령님도 파라클레토스, 동일한 ‘보혜사’가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성도에게 보혜사 역할을 하셨던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사역을 연속성 있게 수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다른 위격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임재가 실현됩니다. 즉 성령은 예수님의 부재를 채우는 대체품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하게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설명할 때, 매우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후3,17에서는 "주는 영이시니"라 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하였고, 골1,27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아니 순례길을 걷고 있는 성도에게 어떤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이 떠나시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다른 파라클레토스가 오시는데,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과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이 오시면 아버지도 함께 거하시어서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서 신자를 위해 중보하시고, 성령은 땅에서 신자들 가운데 함께하시며 가르치고 인도하고 증언하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임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뛰어난 자문 변호사나 안전요원도 매우 귀한 도움을 줍니다. 큰 기업의 경영자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도움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변호사는 특정 사건에서 돕습니다. 코치는 특정 목표를 향해 돕습니다. 안전요원은 특정 위험 상황에서 돕습니다. 하지만 파라클레토스는 성경에서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필요할 때만 부르는 전문가"가 아니라 항상 함께하는 분입니다. 세상의 전문가는 계약 관계입니다. 필요할 때 찾아가고, 시간을 예약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상황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파라클레토스는 그 이상입니다.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성령님은 위기의 순간에만 호출되는 분이 아니라 성도의 삶 전체를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자문 변호사보다 더 깊은 것은 "나를 변호하시는 분이 나를 아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변호사라도 의뢰인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롬8,26) 파라클레토스는 사건 파일을 보고 돕는 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아시고 돕는 분입니다. 내 경호원보다 더 깊은 것은 "위험에서 건지는 것뿐 아니라 끝까지 목적지까지 인도하신다"는 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안전요원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구조 이후의 인생까지 함께 걸어가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위기에서 건져내는 분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하셨습니다. 즉, 넘어졌을 때 일으키시고,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주시고, 성숙하도록 빚어 가시는 분입니다.
최고의 파라클레토스가 도와주는 도움을 받고, 최고의 경호원이 지켜주는 것보다 더 좋은 파라클레토스께서 지켜주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파라클레토스를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존재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3. 다음 25-26절을 봅니다.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는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 즉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의 파라클레토스 역할을 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두려우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잘못하면 예수님께 꾸중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제자들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였거니와”는 이제 예수님은 떠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파라클레토스’여서 너희에게 이런 말까지 해 주고 있지만 지금 이후로는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른 형태는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을 통하여 파라클레토스 역할을 하게 하시어서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입니다. 제자들은 불안합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배우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26절입니다.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보혜사, 곧 성령"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문법이 나옵니다. 원문은 직역하면 "그 파라클레토스, 곧 그 성령"입니다. 즉 예수님은 파라클레토스가 누구인지 직접 설명하십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추측이 아닙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여기에는 삼위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즉 성령은 예수님과 무관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권위,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오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이 구절은 자주 오해됩니다. 모든 과학, 모든 철학, 모든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당시 제자들은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예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연결됩니다.
“생각나게 하신다” 헬라어 ‘휘푸네세이’는 단순히 기억력을 좋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기시키다” “깨닫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활 이후 성령께서 “아!”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가르치고”와 “생각나게 함” 둘은 다릅니다. 생각나게 하는 것은 이미 들은 말씀을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예전에는
패배처럼 보였는데, 성령께서는 ‘이것이 구속이었다.’를 깨닫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 구절은 사도들에게만 해당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성도에게도 적용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한 구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 마음을 비추는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예전에 읽었던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령의 조명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예수님을 소개하는 분이 아니라, 이미 계셨던 예수님을 다시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요16,14에서도 예수님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파라클레토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단순한 위로나 능력의 체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마음속에 새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놀라운 점은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의 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의 가장 깊은 의미는 순한 도움 서비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입니다. 세상의 일부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사와 안전요원을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파라클레토스, 곧 자신을 변호하시고,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붙드시며, 끝까지 함께 걸어가시던 예수님의 계속적 임재를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과 접니다. 힘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 끝으로 29절입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일'은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오심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이것이 모두 실패처럼 보일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에 충격을 받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해 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고, ‘예언의 성취’를 믿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자주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님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미래를 모르고 우연히 십자가를 당한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그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항상 즉시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일은 몇 년이 지나야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를 알게 됩니다. 믿음은 현재를 억지로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걸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이 길로 가요?’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따라가다 보면, 때가 되었을 때 ‘주님 말씀이 맞았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보혜사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최고의 파라클레토스가 계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