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
1) 인상과 관념
로크, 버클리를 이어 보다 경험론적 측면을 더욱 계승시켜 나간 사람이 흄(D. Hume, 1711~76)이다. 흄이 로크나 버클리보다 더욱 경험론적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인식의 기원을 인상(impression)에 두고 있는 점이다. 이 인상이란 의미하거나 모호한 지각이 아니라 매우 강렬하고 뚜렷한 지각을 의미한다. 즉 흄은 우리의 모든 인식은 어떤 희미한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뚜렷하게 경험될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인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정신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관념(idea)이다. 이 인상과 관념은 항상 서로 상응한다. 이 인상과 관념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강도(force)나 선명도(vivicity)의 차이일 뿐, 다른 점에서는 유사하다. 말하자면 인상이 매우 강렬한 것인데 반해 관념은 인상에 비해, 그 강도가 약하다는 차이 외에는 어떤 다른 점도 없다. 이처럼 흄 역시 로크나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추상적인 관념은 결국 개별적인 감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명론적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흄은 로크나 버클리의 경우보다 더 강한 경험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드러난다.
2) 회의론적 입장
모든 인식은 관념과 관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예를들어 ‘이 꽃은 붉다’라는 인식은 ‘꽃’이라는 관념과 ‘붉음’이라는 관념이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흄은 이 관념과 관념의 결합이 로크의 경우처럼 오성의 능동적 작용(반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수동적인 연상작용에 의해 설명한다. 흄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연상심리학을 끌어들여 인식의 과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흄은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즉 경험=인식이라고 믿는 자로서, 경험에서 인식이 구성되는 과정 속에 어떤 경험 외적인 작용을 개입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관념과 관념의 결합도 경험심리학의 관점에서 연상작용에 의해 설명한다.
흄은 관념의 결합법칙을 유사성(resemblance), 시간 혹은 공간에 있어서의 근접성(contiguity),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라는 인과성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그는 인식이 어떤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구성되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연상, 즉 반복적 경험에 의한 기대나 누적된 기억에서 파생된 신념(belief) 혹은 습관(habit)에 의해 결합된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흄은 로크와 마찬가지로 복합관념을 관계, 양상, 실체로 구분하지만, 이것이 로크에서처럼 어떤 오성적 작용에 의해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연상적 작용에 의해 결합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관계’라는 복합관념, 특히 인과관계 역시 일종의 신념적 결합의 유형이다. 우리가 불이 붙고 연기가 나는 것을 공간적으로 근접해서 그리고 시간상 계기적으로 여러번 반복해서 경험한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습관적으로 ‘불이나면, 연기가 난다’는 식으로 마치 불이 원인이고 연기가 결과인 것처럼 결합한다. 그러므로 이 불과 연기 사이에 어떤 필연적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개연적인 연관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흄은 인과관계를 근거로 이루어진 모든 인식은 어떤 객관적 근거도 가질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에 이르게 된다.
또한 양상이나 실체도 단순관념의 우연적인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흄은 특히 모든 실체라는 복합관념은 개별적 감각경험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물리적 실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체 역시 지각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흄은 인상에 대응하지 않는 어떠한 단순 혹은 복합관념도 그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결국 버클리가 부정한 물질의 실재성뿐만 아니라, 정신의 실재성마저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