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쪽글
_양준하 201812003
아담 스미스는 현대 경제학자들이 자기 주장의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보이지 않는 손”만 남겨두어 냉혈한 시장주의자로 만들어 놓았으니 무덤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묘비명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라고 적어달라 했던 것일까? 아무튼 그가 도리어 강조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능력’이자 이타심이었다는 사실은 짐짓 놀랍다.
인간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담 스미스 주장은 좌파의 입장에선 구조적 맥락을 사상한다는 점에서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선 시덥잖은 감정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별로 환영 받지는 못한다. 어디도 설자리가 없어 보였던 아담 스미스의 감정이론은 현대에 이르러 ‘행동경제학’이라 일컬어지는 대안 경제학파에 의해 다시 소환되었다. 행동경제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감정에 메마른 인간상을 비판하며, 우리는 충분히 감정적인 존재라는 것을 경제학 모델에서도 고려해야지만 더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동경제학은 지금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담스미스의 통찰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이근식 교수의 <상생적 자유주의>도 단순히 이기적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상생적’ 소통관계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시장에 대해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는 점에서, 개인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소유권을 보장해야 하고, 무엇보다 개인들의 이타적-상생적 마음가짐이 사회발전의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다만 스미스는 인간에겐 선천적으로 상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는 반면, 이근식 교수는 교육이나 제도를 통해 개발된다고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이 부도덕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논의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선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먼저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완벽한’ 1인분의 삶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독립된 개인이란 존재하는 것일 까? 모두가 일정부분 서로에게 의존적이란 점에서, 자연에게 거의 의존적이란 점에서 완벽한 개인이란 없다. 물론 이런 고려가 없지 않았기에 아담 스미스의 ‘공동체’나 이근식의 ‘상생’ 개념이 등장한 것일 게다. 다만 여기서 고려하는 상호성은 단순히 기계적 연결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보단 우리 존재의 필요조건 자체가 ‘의존’이라는 것, 그렇기에 우린 일정부분 늘 ‘취약’하다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자각은 우리를 더 깊은 연결성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자각이 오히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인간의 공감능력의 근거가 될 거라 생각한다. 공존이 최선의 생존방식임을 깨달으면 이기심은 무효한 것이 되고 이타심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의존성이란 말 그대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그리고 죽어서까지도) 다른 이들의 직접적인 육체적/심리적 도움/개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중심인 ‘나’라는 주어에 우선하는 타자인 ‘너’와 맺고 있는 관계 없이는 자아도 언어도 세계도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이연숙, 2022)”
다음은 불평등에 대한 논의다. 아담 스미스는 ‘불평등’이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그 불평등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불평등의 원인은 정보의 비대칭성이나, 개인 소유권의 확실한 보장이나, 시장의 자율성만 잘 돌아가면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친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논지는 ‘자본주의적 시장’ 자체가 애초에 불평등하게 구성되었다는 사실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탁월한 선구안으로 당시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구체적 운동방식에 대해선 표면적인 설명에 그친다. 그렇기에 ‘구조적 관점’이 동반되어야 더 정확한 분석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선 마르크스의 비판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맺는 방식(생산양식)을 살피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있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발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생산수단이 없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자유계약’이란 이름의 ‘종속계약’을 한다는 점에서 그 시작부터가 불평등한 것이었다. 이 본원적 위계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늘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논의는 자유주의적 시각과 함께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