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손을 베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에는 더욱 그렇다
책장은 두께가 얇을수록 고급 종이다
그럴수록 종이에는 날카로운 날이 선다
그리고 베어지기가 쉽다
검지를 살짝 베었지만 쓰리다
마치 외계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전율이 온다
천왕성이나 목성, 토성에서 보내는 신호처럼 찌릿한 전율이다
미세한 흥분도 함께 느낀다
책장을 덮고
음악의 볼륨을 줄이고
몸을 가리기 위해 속옷을 입는다
여름 대낮 한복판 매미가 마지막 울부짐을 토해낸다
여기는 여름 침대 위
침대보가 신문지처럼 구겨져 있다
몸부림 내지는 뒤척임의 표시이다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전동차 안에서 책을 보는 사람을 만나면 신기하다
저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일까
나는 목적지가 멀 때 가끔 책 한 권을 들고 전철을 탄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금방 도착한다
저무는 삶이다 보니
아날로그 시대를 동경하게 된다
공중전화, 편지, 음악다방, 경양식집, 소공동 낙지골목, 피맛골 등등이 생각난다
김훈의 '허송세월'이란 글을 보면서 저물어가니 적막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저녁은 하루하루 더욱 고즈 녘 했다
베인 손가락은 경미해서 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할 때 쓰렸다
은근히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참을만한 통증이라 괜찮다
그동안 이런 산뜻한 통증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흐리멍텅한 일상들이 지루했다
희미해지는 세상이 멀어지는 것 같아 노여움이 일기도 한다
오늘은 아트페어 관람이 있는 날이다
학여울역 1번 출구에서 화우들을 만나 함께 한다
외출 전 투명밴드 한 장을 검지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붙였다
나만 아는 통증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