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 박영보
“이거 한번 먹어봐. 딴에는 한다고 해봤지만 제맛이 날른지 모르겠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미소를 짓는다.
침대가 두개뿐인 세미 프라이벹 병실이지만 환자라고는 아내 한사람 뿐이어서 독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침대 주위의 커튼을 두르고 나서 가지고 온 종이 봉지를 베드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봉지를 열고 담아온 밥과 국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아직 식지 않아 그릇엔 따끈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큰 아이를 낳을 때에도 산전이나 산후에 이렇게 걱정을 하거나 당황스러워 했던가 싶기도 했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님이 계셨고 주변에는 친인척이나 가까이 지내는 이웃과 친지들도 많았으니 내가 이런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단지 산모나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바라고 있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나 했던 것처럼.
이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상 분만도 아니었으니 고통또한 그만큼 더했으리라.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세식구가 전부였던 곳에서 어디에 마음을 기대거나 도움을 청할 수가 있었을까. 다행히 수술 후 별다른 후유증이 없다는 것만도 고마워 해야할 형편이었다.
수술실에서 나와 병실로 옮겨져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가 사르르 눈을 감는다. 마취기운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낯선 이역의 병실에 혼자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바라다보고 있자니 안스럽기 이를데 없었고 마치 큰 죄를 짓고 있는것 같은 마음이기도 했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잠시 자리를 뜬다해도 간호요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련만 자리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 트레이를 가지고 온 간호원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아내는 먹는 둥 마는둥 스푸 그릇을 두어번 끄적이다가 스푼을 놓고 말았다. 평소 이 사람은 아무 것이나 잘 먹는 편이었다. 수술 후 식욕도 떨어졌겠지만 그들의 식단이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술 일정이 확정된 전날부터 입원을 하여 수술 직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빨대로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고 나서 다시 잠이 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들면 일단 집에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다시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이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한국에 있었다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었을까마는 무엇에든 매달려 보거나 기댈 곳은 있었을 것 같았다.
갑자기 한국의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이 떠 올랐다. 이제까지는 나 자신과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찾으려는 데에만 골몰하다보니 다른 생각이 떠 오를 겨를이 없어서였을까. 아내의 친정 가족들, 그 중에서도 친정 어머니의 모습이 떠 오르기도 했다. 이럴 때 친정 어머님께서는 딸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내가 지금 그 친정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가 있을까. 어머니. 이는 아내의 친정 어머니일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어머님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미역국. 바로 이것.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럴 때 그녀에게 한 다발의 장미 꽃이 필요했을까. 과일 바구니나 쵸콜렛 상자가 필요했을까. 작으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데 대하여 주먹을 불끈 쥐며 얏호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서는 이보다 더 낳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평소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는 했지만 그때까지 미역국을 직접 끓여본 적은 없었다. 요즈음 같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어깨 너머서라도 할머니나 어머니의 조리하는 모습을 넘겨다 본적도 없었으니.
다행히 이민보따리에 넣어준 미역이 아직 몇가닥 남아 있었다. 그곳에는 쌀이라고는 흔히들 ‘안남미’라고도 하는 끈기도 없고 긴 모양의 쌀밖에 없었다. 한국쌀과 비슷한 종류의 쌀은 가끔 한 파운드씩 플라스틱 봉지에 담아 파는 것이 있었지만 그곳 식품점에 많아야 서너봉지씩밖에 없었다. 이 한봉지는 우리 세식구의 한끼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선반에 진열돼 있는 쌀들을 싹쓸이 하듯 모두 가지고 온 것이 조금 남아 있어 명색은 쌀밥에 미역국을 곁들인 밥상을 준비할 수 있게 된 셈이 되었다.
수프용으로 사용되는 부위의 소고기를 골라 기름기를 떼어냈다. 보다 부드럽게 하기 위해 도마 위에 놓고 칼등으로 치댄 다음 먹기에 좋은 크기로 얇게 저며 썰어놓았다. 고기를 끓인 물은 냉장고에 넣어 굳어진 기름덩이를 걷어내니 육수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반찬이라고는 알고 지내는 미스터 베어드의 농장에서 따다 담은 깻잎장아찌 한가지뿐이었다. 장아찌라고는 하지만 다른 양념재료를 구할 수 없어 간장에 절여놓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병원의 저녁식사가 끝나는 시간을 감안하여 밥을 짓기 시작했다. 이사람의 현재 식욕이나 병원 음식의 종류를 감안하면 이번에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사전에 아내에게 저녁식사 준비를 해 오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던 것은 작은 일이지만 예상치도 않았던 일을 대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일종의 ‘깜짝 쇼’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아내가 나중에야 해 준 말이지만 ‘그 맛은 꿀맛’ 이었다고 한다.
전기 밥솥이 있었지만 구태여 스테인레스 냄비에 밥을 지었다.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한국에서 무쇠 가마솥에 지어낸 밥과 약간만이라도 비슷한 맛을 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불을 낮추고 뜸을 들이는 시간은 왜 그렇게나 길게 느껴지던지.
병실에 들어가니 이미 저녁식사가 끝나고 트레이도 치워져 있었다. 커튼을 두르고 베드사이드 테이블을 끌어다 놓고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제법 고향의 저녁상 앞에 서서 느껴지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술을 입에 떠넣고 나를 힐끗 올려다보며 씨~ 웃던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미소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었으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상관할바가 아니었다. 다 먹고나서 “이제 좀 살 것 같다”라던가 “맛 있었다”라는 등 몇마디는 내 솜씨나 작으나마 모아본 나의 정성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가보다 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내가 병원에 있는동안 이같은 일을 몇번이나 더 해 주었는지의 여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몇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기쁘게 받아주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었고 큼지막한 일에만 기뻐하거나 실망을 주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요즈음도 미역국을 자주 끓이는 편이다. 식구들 모두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삼십여년 전의 그 일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아내를 위해 끓여냈던 그때의 그 맛을 되 찾을 수가 없다. 모두들 맛있게 먹어주기는 하지만 간을 보기 위해 한 스푼씩 떠서 맛을 보며 느끼던 그때의 그런 맛이 아니다. 아내의 입맛으로는 어떻게 비교가 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음번 끓일 때에는 그때의 조리 방법을 더듬어 봐가며 그 맛을 되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