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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은교회 2024.07.07. 주일예배 설교 전문: 베드로의 복음 증거 (행3:11~16)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생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 돌리는 귀한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 일터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평생을 일어나보지 못했던 사람. 굉장히 일어나고 싶었고 걸어보고 싶었고 뛰어보고 싶었던 한 사람.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살던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어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에게 나타난 기쁨의 엔돌핀, 그것을 뛰어넘어서 감동의 다이돌핀이 그에게 막 형성되었을 거예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그의 인생 가운데에 갑자기 그리고 단번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쁨과 감격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죠.
여러분 지금 이 사람이 고백하는 찬송은 그동안 한 번도 고백해보지 못했던 새 노래의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셔서 안전하게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면서 여호와를 의지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고백했거든요. 여러분 이 신의 고백처럼 새 노래는요 자신이 어떤 계획과 준비를 해서 고백한 찬송이 아니죠 또한 어떤 멋진 콘티가 있어서 일정에 따라서 맞춰서 이렇게 아름답게 불려진 찬송도 아닐 것입니다. 그의 찬송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 그것을 경험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송 올릴 수 있는 그 찬송을 우리 하나님께서 입에 넣어주신 것이죠.
자신이 경험한 바에 의해서 저절로 고백되어지는 찬송. 여러분 이 찬송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송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때 그냥 앞에서 인도하니까 따라 부르는 찬송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냥 따라 부르는 찬송이 되면요. 거기에는 감동도 없고요. 즐거움도 없어요. 지루해요. 찬양하지만 나하고 전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구원의 감격으로 드리는 찬송 속에는 여러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찬송 가운데 우리 안에 기쁨이 있고요. 우리 안에 감사가 있고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찬송할 때 그저 앞에 찬양하니까 하지가 아니라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내 입술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노래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의 찬송에 정말 기쁨이 있지 않게 해서 하나님도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여러분 오늘 맥주 감사 주일입니다. 많은 우리의 모습들 6개월을 이렇게 쭉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왜 없었겠어요? 지금도 힘들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기에 함께하여 주셔서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주시고 순간순간 도우시고 인도하셨던 그 하나님께 감사로 오늘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시간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이 사건은요. 치유받았던 본인도 놀랄 만한 일이죠.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면서 깜짝 놀랐을 거예요.
그런데 그만 놀란 것이 아니죠. 그를 알고 있던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않았겠어요. 여러분 그가 몇 살부터 그 성전 미문이라는 성전 앞에 앉아서 구걸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요 날마다라는 표현을 써서 좀 오랜 시간 그가 있었겠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날마다라는 이 말씀 속에 그가 참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여러분 성전에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봤겠어요? 안 봤겠어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은 그래 날마다 구걸하는 친구지 다 인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오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요. 그가 앉은 뱅이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보면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을 것이죠. 누군가로부터 듣는 순간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현장 가운데 나타난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삽시간에 퍼져가게 된 것이죠. 소문을 들은 사람이요. 정말이야 정말이야 그러면서 이곳저곳에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인 장소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오늘 성경은 말하죠. 솔로몬의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동편에 위치한 대리석으로 지은 것인데요. 솔로몬 왕이 세웠기 때문에 솔로몬 행각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곳에서 당시에 랍비들이요 제자들이나 군중들에게 교육하고 훈련하는 그러한 장소로 많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 서서 외치는 사람들이 주변에 지나가다가 모이는 거예요. 저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그러니까 좀 지식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 또 성경을 알고 싶은 사람 지나가다가 또 한 번 서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모이죠. 어떤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서 모이는 인파가 달라지겠죠. 그러면서 메시지를 듣고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면서 모이는 장소가 솔로몬의 행각이죠.
예수님도 이곳에서 교훈을 베풀기도 하셨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요. 앉은뱅이가 어떻게 치유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왜 없었겠어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는 거예요. 이 앉은뱅이가 그러니까 곁에 있는 그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 야 도대체 어떤 경위로 일어났을까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현장을 본 사람도 있지만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베드로는요. 이때다 싶어가지고 모인 자들을 향해서 복음을 증거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안 그래도 성령 충만해서 담대했던 베드로가 지금 옆에 누가 서 있어요?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 있으니까 얼마나 담대했겠어요?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 하니 얼마나 더 힘이 있었겠습니까? 자신 있게 아주 담대하게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게 두 가지 질문으로 이 말씀을 펼쳐가기 시작합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은요. 이스라엘 동포들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이게 첫 번째 질문이에요. 두 번째는 마치 왜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이 두 번째 질문 여러분 그러면 이 질문을 한 의도가 무엇일까? 먼저 우리 12절 말씀을 보면서 베드로가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실까요? 12절 시작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길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질문 가운데에는 분명히 그들을 향해서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지 야 너희가 이것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근데 그 질문을 잘 들여다보면 답은 참 쉽게 나옵니다. 첫 번째 왜 놀랍게 여기느냐 이 질문은 놀라지 말라는 거죠. 그렇죠 왜 이게 놀라울 일이냐 사실 그렇죠 사람의 눈으로 보면 놀랄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데 누군가가 한 명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막 떼굴떼굴 굴면서 배가 아파서 죽겠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막 이럴 때 손을 놓고 딱 기도했는데 거기에서 갑자기 괜찮아졌어요.
그럼 여러분 안 놀라겠어요? 놀라겠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고 고백해도 그 현장을 보면 놀랄 거예요. 그리고 그거는 우리가 눈으로 볼 때 모르잖아요. 자기 내적인 거니까 배가 아팠는데 안 아픈 것은 자기 소견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기는 자기 소견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 있잖아요. 눈으로 보이는 거 시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사실 배가 아프다는 거 거짓말할 수도 있잖아요. 짜가지고 배가 아픈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을 줄 다 했는데 안 아픕니다. 짜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앉았다 일어나 이거는 그들이 40평생 그 삶을 봤잖아요.
근데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베드로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지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럼 여러분 그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게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 기준으로 보면 놀랄 일이 아니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만 보면 놀랄 일인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은 놀랄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없는 것 있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 살리신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것이 믿어질 때에 그때 우리의 삶의 형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와 일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그러한 기적 같은 역사들은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받을 수가 믿는 것이죠.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찾아오고 힘든 일이 있고 그러할 때 주를 찾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리잖아요.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다 믿을 수 있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을 딱 폈는데 그 1절이 믿어져요. 그러면 그 이후의 사건은 다 믿어지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날마다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나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하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요. 왜 우리에게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해서 그 사람이 일어나며 찬송 부르고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이 치유와 회복의 일을 하신 하나님을 주목해야 된다. 우리를 주목할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성경 사도행전을 쭉 읽다 보면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는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면 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 지금 바울과 그 일행을 통해서 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지금 우리 가운데 내려왔다. 그래서 바나바를 제우스라, 바울을 헤드메스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반응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안을 가지고 대문 앞에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요. 깜짝 놀라서 옷을 찢고 그들에게 뛰쳐들어가서 선포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느냐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우리 사람이다. 우리 신이 몸을 입고 온 자가 아니라 우리 너희들과 똑같은 성경의 사람이다.
여러분 이렇게 외친 이유가 뭐겠어요? 첫 번째는 너희 제사 우리한테 드릴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이야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죠. 즉 그들의 제사를 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된다. 우리를 봐야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봐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시죠.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사를 받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될 대상은요. 하나님 한 분이심을 저와 여러분들이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 말씀하죠. 믿음의 주도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라.
여러분 예수만 바라보는 귀하고 복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선이라는 찬송을 우리 가끔 하죠. 거기에 보면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그때 뭘 본대요? 주의 일을 보겠다는 무슨 말이냐면 내가 내 삶에 있는 영역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안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그때 이 안 좋은 일을 보지 않고 이것을 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를 볼 때 우리 주님이 내 삶에 있는 이 문제를 주목하시고 일하기 시작한다면 내 삶의 영역에 기쁜 일이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그 기쁨 안에 혼자 도취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쁨을 가지고 감사로 하나님 앞에 눈을 들어 고백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더 감사를 풍성하게 하신다.
할렐루야 이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늘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그것을 통해서 주를 보는 은혜가 있어야 돼요. 그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일하심을 통해서 내가 경험되어질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새 노래로 찬송하게 되는 것이고 그 새 노래의 찬송을 보는 주변의 사람들은요. 깜짝 놀라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인 것이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봐야 할 대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셔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우리 주님 바라보며 하루하루 걸어가시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13절 이하 15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제 모여 있던 그 군중들을 향해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증거하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오늘 구절 세 구절을 통해서 세 가지 예수의 모습을 한번 좀 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첫 번째 메시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이 놀라운 사건을 하셨습니다. 이 일을 하셨습니다. 종 되신 예수를 영광스럽게 나타내기 위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여기에 보니까 예수를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 13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13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예수를 너희가 거부했다. 빌라도는 분명 풀어주기로 결의를 했는데 너희가 거부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그 예수를 바로 하나님의 종이다. 그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빌립보서 2장에 보시면 예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어요.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우리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니라.
예수님께서 종이 되어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해 이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종으로 오신 것이죠.
여러분 바울이 서신서를 써서 보내잖아요. 그 서신서를 썼을 때에 서두에 보통 기록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종 된 바울이라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바울은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그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고 새로운 생활을 살아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그는 편지 서도에 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종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십니까?
아멘이시다면 저와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 도께서 종으로 오셨고, 사도 바울이 그 그리스도를 만나서 복음을 위해서 종이 되었다면 우리도 복음을 접한 자로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종의 삶을 살아야 된다.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가지요. 여러분들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를 풀어주지는 못할 망정 여러분은 예수를 대신해서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사건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14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일을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하는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여러분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예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의로우신 따라 합시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 없으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으로 오셨다.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인의 목숨으로 그 안에 죄가 가득했다면 어찌 우리 죄를 사해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죗값을 치러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을 해요.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인데 한번 읽으면서 같이 한번 우리도 고백했으면 좋겠는데 같이 읽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즉 의인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불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일을 감당하셨다.
여러분 죄로 막혀 있던 그래서 하나님께로 갈 수 없던 담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예수의 의가 이 담을 헐어버린 것이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막힌 담을 허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길을 열어놓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아니한다면 우리 주님이 같이 가자 말씀하시는데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전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그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헐어주셨는데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 계속해서 설교를 이어갑니다. 결국 여러분들은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박아 죽였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 15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
여러분 이 구절에서는 예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어요? 따라 합시다.
생명의 주 생명의 주
이 표현을 원문상으로 보면 생명의 근원자, 생명의 부여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문맥과 더 잘 어울린다고 보죠. 여러분 예수님은 실제 우리 생명의 근원자가 되시죠.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잖아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항상 예수를 기억하며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 그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치고 나를 따르라. 이것은 주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씀을 해주세요.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예수의 생명이 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생명 이 생명이 있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요. 복음의 중심이었던 예수의 이름, 그 이름을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종 예수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 생명의 예수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흡수되어서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소망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롭고 거룩하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살아가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로 오셨기에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있어 저와 여러분들도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증인의 삶에는 예수의 이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죠. 특별히 여러분 복음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종으로 오신 초림의 예수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종으로 초림의 예수로 오셨다. 그리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생명 대신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다. 이것이 참된 복음의 진리 아니겠어요 이 복음의 진리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잘 새겨지고 또한 세상 가운데도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복된 소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했던 이 베드로는 이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이 사람을 주목시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어떻게 치유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 주게 되는데요. 여러분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제 곁에 있는 이 사람이 본래 일어나지도 못하던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지금 이렇게 치유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완전히 치유받게 된 이 이유는 오직 예수님에게로부터 비롯된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을 강조하기 시작했어. 이 사람이 앞서 소개했던 그 예수를 믿어서 이렇게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뭐예요? 여러분도 그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예수를 마음 가운데 신하고 고백하셔야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구절을 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낳게 했다. 그 이름이 누구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따라서 그 이름이 지금 사라서 역사한 거죠. 무슨 말이냐면 지금 시기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그렇게 먼 시간이 아니잖아요. 우리처럼 2천년 전의 일이 아니잖아요. 근데 얼마 전에 죽으셨던 그 예수가 부활하셨고 오늘 지금 이 현장에서 생명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그 예수님께서 가까이 있었던 그 당시에만 일하셨을까요? 아니죠.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그 예수께서 일하신다.
할렐루야 그 주님을 믿어야 된다. 과거에 역사하셨던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오늘 내 삶 속에서 일하시는 그 예수를 믿어야 된다. 그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허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구약이 그래 누가 이런 예수를 믿었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쭉 읽어하면서 그래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렇지 이삭의 믿음이 이렇지, 야곱의 믿음이 이렇지 이러고 끝낼 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현장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오늘 나의 믿음이 나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고 할렐루야 내 믿음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 그 내 믿음이 삶의 현장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찬송하며 증거되어지는 삶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예수의 이름에는 지금에도 권세가 있습니다. 지금에도 이 예수의 이름 가운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 성경에 예수의 이름이 가져다준 능력에 대해서 많이 기록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기도 하고 생명도 얻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고침과 치유와 기사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납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기도 응답이 있더라.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현장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응답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하나님 2024년 전반기에도 함께하셨는데 후반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해서 제가 추수감사주일 때는 하나님께 더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야 신앙생활이 재미있지 않겠어요. 신앙생활하는데 늘 안 되고 힘들고 어렵고 그러면서 해결받지 못하고 그런데 안 될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이 평안 주시고 하나님이 혼내주시면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고 소망 아니겠어요.
물론 이 땅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게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을 소망하면서 살지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봐야 되잖아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은총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갑자기 스스로 내가 생겨난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작심한다고 생겨나는 믿음이예요. 내가 오늘부터 믿어야지 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믿어야지 믿어야지 믿습니다. 믿습니다. 100번 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의 이름으로 그 예수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공급이 예수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될 건 하나 성령님 예수의 이름으로 나도 예수로 말미암아 믿어지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내 믿음이 부족합니까? 나도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내가 막 믿으려고 애쓰고 노 왜 안 믿어져 왜 안 믿어줘 믿어줘야 돼 이게 안 된다니까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만지셔서 깨닫게 하시고 고백해 하시고 그렇게 해서 믿음의 자리를 안 되면 구해야죠. 하나님 나도 그 믿음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 믿음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