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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世 시조왕 박혁거세의 四世는 박아도이다
연오랑 천일창 박아도, 일성왕
개산팔경 박 희 용
1. 문제의 제기
가전되고 있는 『밀양박씨세보 상권』에 보면 一世 시조왕, 二世 남해왕, 三世 유리왕에 이어 四世로 ‘사 일성왕(嗣 逸聖王)’이다. ‘사(嗣)’ 자는 ‘후사를 이었다’로서 일성왕이 유리왕의 적장자로서 후사를 이었다는 말이다. 조상 어느 분이 『삼국사기』 [연표(年表)]를 근거로 하여 족보의 世代를 설정한 것 같다. 그러나 일성왕의 탄생 연도, 왕위 등극 연도, 사망 연도를 살펴보면 세대 설정에 하자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69년에 태어나고, 알영은 혁거세가 17세인 서기전 53년에 태어났다. 옛날 사람들의 보편적인 일생에 비추어 보면, 두 사람의 결혼과 맏아들 남해의 탄생이 기원전 36년경일 것이다. 그러면 손자인 유리의 탄생이 기원전 16년에서 기원전 10년 사이일 것이고, 증손자인 일성의 탄생은 기원후 10년 전후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일성왕이 서기 134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보통 사람으로 치면 일성이 124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게 된다.
그러나 『밀양박씨세보 상권』에는 일성왕의 탄생과 사망이 <漢光武建武二十年甲辰誕生 漢桓帝永興二年甲午春三月薨>이므로, 서기 44년에 탄생하여 111세인 서기 15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서기 44년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연표]와 비교하면, 80년 파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일성은 37세였고, 파사왕 치세 32년과 지마왕 치세 22년의 합인 54년 후인 134년에 일성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91세였다. 일성왕은 20년간 재위하다가 154년에 111세로 훙했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111년 동안 생존하기가 불가하다. 김수로왕이 42년에서 199년까지 157년 동안 재위하고, 고구려 태조왕이 53년에서 146년까지 93년 동안 재위했다고 [연표]에 나와 있지만 그것을 사실로 믿기 어렵다.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 초기에 김수로왕 이후 거등왕(居登王)까지의 100여 년 동안의 왕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김수로왕으로 묶은 것이고, 고구려 태조왕 전후에 왕계가 바뀔 정도로 엄청난 권력 투쟁이 벌어진 것을 얼버무려 태조왕 하나로 묶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밀양박씨세보 상권』에서 일성왕의 나이를 111세로 늘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족보에 보면 三世 ‘유리왕’ 다음에 四世 ‘嗣 逸聖王’이라 하여 적자로 나타내고, 파사왕과 지마왕을 방계로 간단히 나타내고 있다. 족보의 세대 배치를 보면 뭔가 아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감정과 함께 내가, 우리가 적장자라는 긍지가 은연중에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세대를 정리하다 보니 유리왕 바로 아래에 일성왕을 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성왕의 생몰연대에서 불합리한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이것을 박씨 족보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사서 이후 모든 사가들이 그렇게 알고 인용하고 있다. 현대에도 각급 학교에서 고대사를 가르칠 때도 그러하다. 이것은 사서와 사료를 치밀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신화와 설화의 상징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가설의 설정
이와같이 일성왕의 불합리한 생애 연표를 교정하는 한 가설로 유리왕과 일성왕의 사이에 ‘갈문왕 박아도(朴阿道)’를 설정한다. 그러므로 『밀양박씨세보 상권』에서 四世는 ‘박아도 朴阿道’가 된다. 일성왕은 이분의 아들로서 五世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삼국사기』 <일성이사금>,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연오랑과 세오녀], 『일본서기』 [천일창]을 근거로 하여 논증하니, 사학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금과옥조로 받드는 인습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로 정리해야 할 것이며, 앞으로 박씨 각 관향과 각 파에서 만드는 『신라박씨세보』는 선조들의 오류를 시정하여 一世씩 물린 족보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3. 『삼국사기』 [일성이사금]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 십오년 봉박아도위갈문왕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하다
[첨언] 조선 시대에 왕이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왕비의 아버지를 부원군으로 봉한 것처럼 신라 시대 갈문왕은 왕의 근친이나 왕비의 근친에게 주는 봉호였다. ‘갈문왕’에서 ‘王’ 자가 붙은 것은 왕과 같은 반열이란 의미이다. 일성이사금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한 것은 무단히 봉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관계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재위 15년이 되어 왕권이 안정되자 일본에서 죽은 아버지 박아도를 기려 갈문왕으로 추존했을 것이다.
4.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연오랑과 세오녀]
延烏郎細烏女
第八阿逹羅王即位四年丁酉東海濵有延烏郎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忽有一巖一云一魚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邉邑小王而非真王也.. 細烏恠夫不來歸尋之見夫脫鞋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奏献於王, 夫婦相㑹立爲貴妃.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降在我國, 今去日本故致斯怪.” 王遣使來校勘 二人, 延烏曰 “我到此國天使然也. 仐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寳,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又都祈野.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서기 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국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전후 시기에 신라인을 왕으로 삼은 적이 없다. 이것은 변방 읍의 소왕이고 진짜 왕이 아닐 듯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괴이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다시 그 전처럼 세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 왕에게 나아가 아뢰니 부부가 다시 서로 만나고 [세오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입니다. 지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므로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면서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자,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낸 이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첨언] 일연은 [연오랑과 세오녀]를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제1편>에서 [혁거세왕], [남해왕], [노례왕], [탈해왕], [탈해왕 대 김알지] 다음에 넣었다. 왜 그랬을까. [연오랑과 세오녀]가 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서기 157년)이지만, 64년을 당기면 서기 93년으로 『일본서기』 의 [천일창] 이야기가 된다.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를 처음 만든 사람이 서기 93년 파사왕 14년이라 직설하긴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박씨 아달라왕대로 설정함으로써 천일창을 귀양 보낸 김씨족의 추궁을 피할 수 있었다.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에서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라는 말은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할 연오랑과 왕비 세오녀가 무력에 쫓겨 일본으로 망명하고, 엉뚱한 사람이 왕위에 앉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세오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은 천일창 대신 보낸 일성왕자를 상징한다. 신라 백성들이 김씨족의 권세에 의해 왕위가 적장자 박아도가 아니라 아우 파사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반감을 품었고, 일본으로 쫓겨간 왕자 박아도를 동정하여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연오랑(延烏郞)은 ‘郞’ 자에서 보듯이 바닷가에 사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라 귀족 이상의 신분이다. 유리왕의 적장자 박아도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영일현 바닷가에서 감시하에 살다가 일본으로 밀항하여 망명한 것 같다. 자리를 잡은 몇 년 후에 부인을 데려간 모양이다.
연오랑 이 이야기는 다음에 제시하는 천일창 이야기와 등장인물과 구조가 같다. 왕위 변칙 계승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신라에서는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설화로 남았지만, 무관한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천일창]이란 기사로 남았다.
5. 『일본서기』 [천일창]
三年春三月 新羅王子天日槍來歸焉 將來物 羽太玉一箇 足高玉一箇 鵜鹿鹿赤石玉一箇 出石小刀一口 出石桙一枝 日鏡一面 熊神籬一具 幷七物 則藏于但馬國 常爲神物也一云 初天日槍 乘艇泊于播磨國 在於宍粟邑 時天皇遣三輪君祖大友主 與倭直祖長尾市於播磨 而問天日槍曰 汝也誰人 且何國人也 天日槍對曰 僕新羅國主之子也 然聞日本國有聖皇 則以己國授弟知古而化歸之 仍貢獻物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赤石珠 出石刀子 出石槍 日鏡 熊神籬 膽狹淺大刀 幷八物 仍詔天日槍曰 播磨國宍粟邑 淡路島出淺邑 是二邑 汝任意居之 時天日槍啓之曰 臣將住處 若垂天恩 聽臣情願地者 臣親歷視諸國 則合于臣心欲被給 乃聽之 於是 天日槍自菟道河泝之 北入近江國吾名邑而暫住 復更自近江經若狹國 西到但馬國則定住處也 是以 近江國鏡村谷陶人 則天日槍之從人也 故天日槍娶但馬國出嶋人 太耳女麻多烏 生丹馬諸助也 諸助生但馬日楢杵 日楢杵生淸彦淸彦生田道間守之
3년 봄 3월 신라 왕자 天日槍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羽太玉 1개, 足高玉 1개, 鵜鹿鹿赤石玉 1개, 出石小刀 1자루, 出石鉾 1자루, 日鏡 1개, 熊神籬 1개 등 7가지였는데, 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天日槍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播磨國에 정박하여 宍粟邑註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이 三輪君의 시조 大友主와 倭直의 시조 長尾市를 播磨에 보내어 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天日槍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日本國에 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赤石珠, 出石刀子, 出石槍, 日鏡, 熊神籬, 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천황이) 天日槍에게, “播磨國 宍粟邑이나 淡路島 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를 내렸다. 이 때 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天日槍이 道河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近江國 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近江으로부터 若狹國을 거쳐 서쪽으로 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近江國 鏡村谷 陶人은 바로 天日槍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天日槍은 但馬國 出嶋의 사람 太耳의 딸 麻多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다. 諸助는 但馬日楢杵를 낳고 日楢杵는 淸彦을 낳았으며 淸彦은 田道間守를 낳았다.
[첨언] 『일본서기』 가 무단히 신라의 왕자가 망명해왔다는 기사를 남길 이유가 없다. 천일창의 망명과 귀화가 사실이었기 때문에 자세하게 사서에 기록했다.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와 천일창 이야기가 거의 비슷한 시대로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사건을 필자는 유리왕의 왕자 박아도의 망명과 그의 아들 일성의 귀국과 왕위 등극으로 해석한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 가 허황하다면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한국 고대 사서로는 훨씬 후의 시대인 1100년대와 1200년대에 지어진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뿐인 조건 속에서 『일본서기』 등의 일본 고대 사서들이 한국 고대사를 지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거품과 왜곡을 보정하면서 읽어들여야 하겠지만, 무조건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될 수 없다.
6. 四世 박아도의 망명과 五世 일성왕의 귀국
김씨족은 초기부터 강력한 씨족으로 왕비족의 위치를 점했다. 2대 남해왕의 왕비와 아우 박특의 부인이 김씨이고, 3대 유리왕의 왕비도 허루갈문왕 김씨의 딸이었다. 서기 65년 탈해왕 9년에 김알지 신화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김씨족이 허루갈문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박씨 왕들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다. 또한 허루갈문왕 김씨는 5대 파사왕의 왕비의 아버지였다. 6대 지마왕의 왕비가 김알지의 아들 마제의 딸 애례부인인 것을 보면, 탈해왕에게 금궤짝으로 발견되어 아직 후사가 없는 탈해의 아들이 된 김알지가 대보가 되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탈해왕이 죽은 후부터는 허루갈문왕계가 약해지고 김알지 김씨계가 세력이 주류가 된 것 같다. 그 흔적이 이전의 김씨족과 구별짓 고자 만들어진 계림 금궤 탄생 신화일 것이다.
허루갈문왕은 한지부(漢歧部, 또는 韓岐部)의 족장(族長)이었다. 한지부는 동해변에 위치해 해상 활동에도 익숙하였다. 한지부와 신라왕실이 결합한 것은 신라왕실의 통치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김씨족은 본래 한 갈래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의 갈래인 것 같다. 서기 23년에 신나라가 망하자 화북지역과 산동지역에서 활동하던 흉노족의 부족 여러 개가 동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남부 경주 지역까지 왔다. 그 한 줄기가 안동 지역에 머물고, 다른 줄기 하나는 동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한지부가 되고 다른 한 줄기는 경주 북쪽 지역에 정착한 것 같다. 후일에 내물왕-눌지왕계는 문무왕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같은 흉노족으로 연나라에 복속하여 고구려와 전투를 하다가 패한 기마군대가 연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한반도 남부로 진격하여 신라를 점령하여 왕조를 세운 것 같다.
김씨라 해서 모두 같은 혈통이 아니다. 김해김씨를 제외한 김씨의 관향이 여러 곳인 연유가 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김씨가 신라 경순왕의 아들들을 중시조로 모시는데, 경명왕의 8대군처럼 경순왕의 많은 아들도 후세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삼태사 중의 한 사람인 안동김씨는 고려 태조로부터 김씨로 사성받았다고 한다. 권태사는 본래 김씨이나 권씨로 사성 받았다고 한다. 그럼 본래 김씨의 조상은 누구인가. 동시대를 산 경순왕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김씨가 아니었다. 안동장씨도 마찬가지다. 사성 받기 전의 성씨가 무엇인가. 그러니 삼태사의 안동김씨, 문소국의 의성김씨, 사벌국의 상주김씨 등은 경순왕보다 더 오랜 뿌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라 초기의 소국 서라벌은 외래의 강력한 부족인 박석김 세 성씨가 농경 정착민인 6촌민들을 정복하여 만들어진 국가였다. 박씨족 대표인 박혁거세가 신화와 추대라는 후세의 꾸밈으로 시조왕이 되었지만, 박혁거세가 왕이 된 데는 허루갈문왕 김씨족이 힘을 발휘했고, 그 공으로 남해왕비와 유리왕비로 대를 이어 왕비를 냈다. 박씨왕조가 강력한 석씨족 탈해왕으로 교체되었으나 이미 왕비족으로 권력을 굳힌 허루갈문왕계 와 김알지계 김씨족의 도움으로 23년 만에 다시 박씨왕조로 환원되었다. 파사왕의 어머니는 김허루 갈문왕의 딸이었고, 파사왕의 왕비는 김알지의 손녀였다. 지마왕의 왕비 역시 김씨였다.
그런데 탈해왕에서 파사왕으로 왕위가 바뀔 때에 파란이 일어났다. 탈해왕 말기에는 매우 어린 석씨 왕자라서 왕위 승계가 위태로웠다. 권력을 잡고 있는 김알지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왕위를 잇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고 명분이 없기 때문에 어린 석씨 왕자 구추를(벌휴왕의 아버지) 왕으로 세우기보다는 다시 박씨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권력을 계속하여 누리기에 유리했다. 이때 유리왕의 아들은 박아도(일성왕 15년에 갈문왕으로 봉한 朴阿道는 삼국유사의 연오랑, 일본서기의 천일창이다)와 파사왕 두 명이었다.
『밀양박씨족보』에 박아도의 아들인 일성왕의 왕비가 석씨인 걸 보면, 서기 44년생인 박아도가 서기 93년 일본으로 망명할 때의 나이가 50세이니 결혼하여 아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갈 때 아들의 나이가 25~30세 정도였을 것이다. 아버지 박아도가 일본에서 죽고, 134년 아들이 귀국하여 일성왕이 된 나이가 65~70세였을 것이다. 아달라왕은 어릴 때 조부와 부를 따라 일본으로 갔거나 일본에서 출생했을 것이다.
박아도가 맏이니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김알지는 둘째 왕자 파사를 왕으로 세웠다. 박아도의 비는 석씨이고 파사의 어머니가 허루갈문왕의 딸 김씨이고, 파사의 부인이 김알지 자가의 손녀이니 왕비족으로 권력을 계속하여 누리기 위해서 파사를 선택했다. 이후 파사왕과 지마왕은 김씨족과 더욱 굳게 결합하였다.
그렇다면 맏왕자인 박아도의 입지가 매우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아우 파사왕과 김씨족의 감시와 견제 속에서 14년을 견디다가 결국 박아도는 서기 93년 파사왕 14년에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일본서기』 <천일창>과 『삼국사기』 <일성왕 15년 조> 의 기사인 ‘박아도 갈문왕으로 봉하다’로 뚜렷이 남아 있다. 또한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일성왕이 무단히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할 리가 없다.
지마왕이 후손을 두었다면 일성이 귀국하여 왕이 될 수 없었다. 지마왕이 죽자 왜 신라인들이 일본에서 박아도의 후손을 찾아 귀국을 종용했을까. 이때는 석탈해의 아들 구추도 나이가 50여세였으니 연부역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신라는 구추와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지 않고 일본에 있는 박아도의 후손을 선택했을까.
박씨족 지마왕이 죽자 김씨족과 석씨족의 권력 투쟁이 팽팽했을 것이다. 물론 왕비족인 김씨족이 더 강했지만 어른이 된 왕자 구추도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김씨족은 다시 석씨족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었다. 석씨족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두 왕을 거친 박씨족과 김씨족의 연합 세력을 꺾을 힘이 아직은 없었다. 박아도의 비가 석씨이고, 일성의 비가 석씨이니 석씨족은 일성이 왕이 되면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중립인 박아도계가 김씨족과 석씨족 두 세력 간에 타협점이 될 수 있었다.
어부지리로 왕이 된 일성왕은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어머니와 왕비, 며느리가 석씨이니 석씨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더구나 김씨족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일본 망명 생활을 했으니 김씨족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후 석씨족이 권력을 잡고 김씨족은 숨을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8대 박씨 아달라왕이 후사 없이 죽자 다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탈해의 아들 구추가 각간으로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구추의 아들 벌휴가 더욱 권력을 강화하여 184년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 아달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세웠다’로 나와 있지만, 박씨와 김씨를 권력투쟁에서 꺾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벌휴왕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강력한 증거로는 9대부터 16대까지, 13대 미추이사금(262~284년)을 제외하고 7대 172년 동안 시조왕인 박씨족을 제치고 신라를 지배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강력한 석씨왕조도 김씨족의 꾸준하고 강력한 힘에 의해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미추이사금으로 중간에서 힘을 보인 김씨족은, 같은 신나라 흉노족의 후손으로 고구려를 지나 경주에 도착한 신김씨족들과 함께 356년 드디어 석씨족을 꺾고 내물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호공의 집을 간계를 써서 뺏을 정도로 탐심이 강한 석씨족이 순종할 리가 없다. 거세게 왕권에 도전하다가 결국 417년 눌지마립간에 의해 석씨족이 모조리 도륙당하고 말았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昔씨가 1만명 조금 넘는다. 신라 초기 같은 시대에 산 박씨와 신라김씨와 가야김씨에 비해 너무도 턱없이 적은 인구이다. 그때 석씨족이 뿌리째 뽑혔다는 사실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김알지의 후손들은 박씨와 석씨 왕손은 물론 육부촌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리고, 박시족과 힘을 합해 석씨왕조를 도려내어 미추왕에 이어 내물왕부터 신라가 멸망에 이르는 시기까지 왕위와 핵심적인 권력을 거머쥐고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다가 삼국통일 후부터 김알지계와 내물왕계의 왕위 계승 투쟁이 빈발하다가 왕 씨와 국력이 쇠약해지자 왕위를 박씨족에게 넘겼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신라를 박씨족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15년 동안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더구나 918년 김씨족 김헌창의 반란은 국운을 더욱 기울게 하였고, 927년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왕비가 능욕당한 포석정의 비극으로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김부 경순왕이 마침내 935년 신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그리고는 태부가 되어 호의호식하다 죽어 타관 객지 개성에 묻혔다.
7. 결어
살펴본 바와 같이 연오랑과 천일창이 유리왕의 적장자 박아도이다. 박아도는 김씨족의 견제에 밀려 왕위를 아우 파사에게 빼앗기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지마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신라 백성들이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처럼 유리왕의 적장자 박아도를 찾아 왕위를 잇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이미 박아도는 노쇠하거나 죽고, 그의 아들인 일성이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시조왕 박혁거세를 一世로 한 『밀양박씨세보』와 여타 모든 박씨의 족보는 二世 남해왕, 三世 유리왕 다음의 四世를 박아도로 해야 한다. 이어서 五世 일성왕, 六世 아달라왕, 七世 벽방이 된다.
2025년 2월 24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
010 8587 4092
추신) 족보 계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함께 연구하고 의논할 종친께서는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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