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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교분쟁'
1960년대에 들어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나세르를 경계하나 실제 무력 마찰은 시리아와 더 많이 일어난다. 문제의 핵심은 국경선이다.
현재의 이스라엘-시리아 국경선은 1920년대 중동지역을 위임통치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임의로 그은 경계선을 바탕으로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인들은 오랫동안 같은 시리아이던 팔레스타인을 느닷없이 분리한 긴 국경선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1948년 1차중동전쟁에서 시리아군은 자기들의 옛 땅 팔레스타인으로 치고 들어가 그대로 주둔하고 있다. 양 국간의 국경분쟁은 계속되고 유엔은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지만 서로 지키지도 않는다. 시리아는 파타(Fatah) 라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지원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맞보복하고 늘 긴장감이 돈다.
그런 상황에서 국경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1964년 이스라엘은 갈릴리 호수의 물을 네게브 사막으로 돌리는 수로공사를 시작한다. 이스라엘 국가 생존을 위한 대공사이다. 시리아는 이를 방해하기 위해 갈릴리 호수의 상류지역 강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하고. 수년에 걸쳐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강줄기 돌리는 공사 현장을 공격하여 결국 네게브 수로공사를 완성한다.
유엔의 비무장지대인 골란고원도 아슬아슬하다.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골란고원은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주요 수로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요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스라엘은 이 골란고원에 계속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전쟁을 주도하는 나세르'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한 명의 지도자 칼리파가 이끄는 하나의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추구한다. 이슬람을 따르는 무슬림은 모두 평등하다는 가르침에서 아랍인이든 페르시아인이든 투르크인이든 종족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아랍인'이라는 정체성은 사실 따로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으로부터 불어온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랍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서서히 고개 들기 시작한다. 튀르크인 오스만제국이나 서구 열강들과 투쟁하면서 이러한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멋대로 갈라놓은 국경선에 갖혀 아랍 민족주의가 제대로 발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던 중,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집트의 나세르이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이끄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나세르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다. 1차 중동정쟁(이스라엘건국전쟁)과 2차 중동전쟁(수에즈운하전쟁)이 그것이다. 선제공격을 했음에도 오히려 패배한 1차 중동전쟁 그리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공격 당한 2차 중동전쟁, 이들에게 당한 패배의 치욕을 모두 되갚아야만 진정한 아랍의 지도자로 인정 받을 수 있다.
2차 중동전쟁이 끝난 지 불과 8년이 흐른 1967년 예멘에서 정부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느라 한창 바쁜 나세르에게 소련이 군사 정보를 건네준다.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세르는 이번 기회에 이스라엘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 먹고 즉시 시나이 반도로 군대를 전진 배치시킨다. 소련의 다른 숨은 의도인지 단순한 실수인지 모르지만 이 정보는 잘못된 정보인 것으로 바로 확인된다. 그러나 나세르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는다.
이집트는 10만명의 병사와 탱크, 전투기 등을 대량 배치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티란 해협을 봉쇄한다고 선언한다. 시리아 역시 대량의 병력을 골란고원에 전진 배치시킨다. 갈릴리 호수의 젖줄을 막겠다는 계획이다.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요르단도 할 수 없이 군대를 소극적으로 배치시킨다. 이라크와 레바논 그리고 알제리, 쿠웨이트 등도 소량의 군사적 지원을 보탠다.
나세르를 중심으로 또다시 아랍국가들이 대대적으로 뭉친 상황이다.
'전쟁 개시와 이집트의 패배'
예멘 내전에 정신이 없을 나세르가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자기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미처 생각 못한 이스라엘은 큰 충격에 빠진다. 나세르가 진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한 건지 아니면 그냥 당당한 모습을 보여 위신을 세우려고 한 건지 지금도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나세르의 진짜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생존에 위협을 받는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이집트 군대가 시나이 반도에 진입하는 순간 전시동원체제를 발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떻게 할 지 아직 결정을 못내린 상황이다. 이 전쟁에서 패하는 순간 다시 처참한 살륙 현장으로 끌려나갈 거라는 극도의 공포에 빠진 이스라엘 국민들은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다. 이스라엘 정부는 2차중동전쟁의 영웅 애꾸눈 모세 다얀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모세 다얀 장관은 선제공격이라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세우고 병력을 준비한다.
반면 군사작전을 먼저 시작했던 이집트군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소련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냥 공격하자는 참모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공격을 주저한다. 소련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나섰다가 잘못될 경우의 두려움이 더 컸던 걸로 보인다.
티란해협 봉쇄 2주가 지난 6월 5일 아침 갑자기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이집트군 기지로 향해 솟아오른다. 마침 이집트군의 레이다망에 문제가 있어 낮게 날아오는 이스라엘 공군기의 기습 비행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폭격은 대성공을 이룬다. 출격 3시간만에 이집트 공군기 189대가 파괴된다. 대부분은 미처 땅에서 이륙하기도 전에 이스라엘 공군기의 희생이 된다. 공격 하루만에 293대라는 이집트 공군의 전투력 대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즉각 반격하라는 긴급 지시에 '공군 전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처참한 대답만 돌아온다.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공격에 이어 지상군이 3개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에 이집트 지상군은 이미 정신이 없다. 서로 먼저 도망가기 바쁘다. 교전 중 전사자는 2천명 남짓인데 후퇴하는 도중 사망자는 1만명에 달할 정다.
승기를 잡은 이스라엘군은 거침이 없다. 모세 다얀의 원래 작전계획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 앞까지만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리멸렬하는 이집트군을 보고 작전을 바꿔 수에즈 운하를 넘어 카이로 110킬로 지점까지 진격한다. 그동안 나세르가 떨쳐온 위용에 비하면 너무나 어이 없는 이집트군의 졸전이다.
'요르단과 시리아의 패배'
사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요르단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이기 때문에 국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그는 군대를 배치하고 전쟁의 진행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 당일, 이집트 정부에서 긴급 전보가 온다. '적의 공군기 중 약 75%가 파괴되었거나 작동 불능이다. 우리는 지상에서도 적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집트 라디오 방송도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 상황과 정반대인 거짓정보다. 정보력이 한참 뒤떨어진 후세인 국왕은 이 긴급 전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이스라엘 공격을 명령한다. 요르단군이 국경을 넘자마자 이스라엘군은 바로 반격하여 요르단 공군기지를 초토화시킨다. 순식간에 후퇴하는 요르단 병사를 후세인 국왕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수도 암만의 50킬로 지점까지 진격한다.
시리아는 요르단보다 더 신중하다. 그동안 잦은 국경분쟁으로 이스라엘군의 전투력을 잘 알고 있는 시리아는 이집트와 요르단의 패배를 지켜보면서 더욱 신중해진다. 요르단 국왕이 시리아의 공군 지원을 요청하자, 시리아는 '훈련 때문에 불가하다'고 대답한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모세 다얀은 애초 시리아의 '골란고원'은 점령하지 않는다는 작전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시리아와의 전쟁이 본격화될 수 있고 이 경우 시리아를 지원하는 소련의 군사개입 가능성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전쟁 상황이 일방적으로 유리해지자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생명수 갈릴리호를 지키는 골란고원으로 진격한다. 단숨에 골란고원을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60킬로 지점까지 진격해 들어간다.
소련과 유엔은 크게 항의한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의 지역이 아닌 유엔이 정한 시리아 영토이니 즉각 철수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경고를 무시하면서 오히려 시리아인 10만 여명을 내쫓고 골란고원을 계속 점령한다. 이후 골란고원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으로 남아있다.
'3차 중동전쟁의 결과'
공격 6일만에 상황이 끝난다. 일명 6일전쟁이다.
이스라엘로서는 꿈같은 승리이다. 이스라엘 전역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고 정부와 전쟁 지도자들은 영웅이 된다.
요르단이 지배하던 예루살렘의 올드시티 구역을 차지하면서 유대인들은 더 흥분한다. 예루살렘의 올드시티는 솔로몬 왕이 세웠다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대교 최고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증거'라며 전쟁의 승리가 종교적 열정으로 바뀌면서 이스라엘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서안(웨스트뱅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 등을 점령하면서 4배이상 크게 늘어난다.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 안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게되어 이스라엘 국민들의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집트와 중동국가들의 상황은 정반대다.
아랍인들은 이집트 군대를 시나이 반도에 배치할 때까지만 해도 아랍 연합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에즈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아랍 국가들의 안보 문제에도 개입하여 무수한 성과를 올리던 이집트군이 아니던가. 이번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것이라 자신만만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목격한 현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패배하는 이집트와 아랍 군대였다. 아랍민족주의의 몰락과 함께 나세르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많은 아랍인들은 6일전쟁을 보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여지껏 믿어온 아랍민족주의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기는 커녕 허울뿐인 구호였나.
이때 '이슬람주의(Islamism)' 가 강력하게 대두된다. 아랍인들이 다시 모색해낸 해법이다. 이슬람을 단순한 종교의 가르침이 아닌 정치적 이념 또는 국가 운영 원리로 믿고 현실에 적용하자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와하비즘에서도 나타났었고 20세기에 다시 등장한 것이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الإخوان المسلمون, Muslim Brotherhood)'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르의 탄압을 계속 받아왔지만 나세르의 위세가 무너지자 공개적으로 떠오른다. 이집트의 이슬람주의는 전 아랍세계로 퍼져나간다. 근대화를 내세우며 독재를 정당화하던 세속적인 이념이 실패하자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뿌리를 둔 종교적 이념을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다.
다음은 무슬림형제단입니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