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47
ㅡ 고려의 무신정권시대 3 ㅡ
(무신정변 이전의 무신난)
무신정변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그보다 150년 앞서 무신 들이 잠시나마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바로 <김훈과 최질의 난>이다.
이 사건은 '고려사'에 단 몇 줄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상 이후 '무신정변' 씨앗이 된 최초 몸부림 이었다.
나 또한 '고려거란전쟁'을 정리 하면서 이 사건을 간과했는데, 이번 기회에 좀 더 세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사실 무신정변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서막은 '강조의 정변'(1009) 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으나, 거란 2차 침략에서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에 나섰다가 거란군에 포로로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정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강조는 문관출신 이었기에 무신들 불만에서 비롯된 무신정변 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긴 어렵다.
강조의 정변 이후, 거란과의 2차 전쟁(1010)에서 성장한 무신들,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바로 <김훈과 최질의 난>이었다.
이 사건은 고려거란전쟁 2차 (1010)와 3차(1019) 사이인 1014년에 일어났다.
고려 역사상 최초로 무신정권이 잠시나마 성립된 사건이었다. 비록 쿠데타는 불과 4개월 만에 무너졌지만, 김훈과 최질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며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들로 기록된다.
김훈과 최질은 거란 2차 침략 때 큰 공을 세운 고위무관이었다.
'김훈'은 강조가 '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잠시 거란군을 퇴각시킨 인물이었다.
'최질'은 통주 중랑장으로 있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통주를 항복시키러 온 거란의 사신들을 억류하고 성문을 굳게 닫으며 항전을 이끈 무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문신들 견제로 문관직을 겸임하지 못했고, 여기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추원 일직이었던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경군의 '영업전'(군인 사적 소유 가능)을 빼앗아 백관 녹봉에 충당 하고 병사들 월급까지 체납하자, 끝내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김훈과 최질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현종 앞 에서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고, 현종을 협박해 두 사람을 귀양 보냈다.
당시 영업전은 군인 생계뿐 아니라 군역 유지의 근간이었다. 이를 박탈당한 무신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이 일어난 직후 힘없는 현종은 무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어 무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는 이 시기 조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자들이 대각을 죄다 차지해 정치가 중구난방이 되니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 고려사 왕가도 열전 중에서 ㅡ
난을 일으킨 무신들은 민심수습운 명분삼아 '은전'(보은하는 의미로 주는 땅)을 마구 남발했고, 이는 곧 재정을 더욱 궁핍하게 했다.
이 때문에 이 쿠데타는 처음에 시도한 이유때문에 '가장 착한 쿠데타'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다.
이는 훗날 조선구한말 '임오군란' 과 흡사했다.
임오군란은 구식군인들이 처우 불만으로 들고일어나 초반 성공 하는 듯했으나, 결국 민비 측이 불러들인 청군 3000여명에 의해 허무하게 진압된 모습과 닮았다.
현종은 몇 달간 사태를 관망하다 전 화주방어사 '이자림'(훗날 '왕가도'로 개명)을 불러 반란 세력을 제거할 계책을 세웠다.
1015년 3월, 현종은 서경 장락궁 에서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한 김훈과 최질을 비롯한 주모자 19명을 한날에 몰살시켰다.
현종은 그 가족들은 처형하지 않고 귀향시키며 등용만 막는 온건책을 썼다. 이는 무신 공로는 인정하되 임금 권위를 무력으로 도전한 역적은 단호히 처벌 하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사건이 이렇게 신속하고 온건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면, 훗날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 사건은 무신들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일시 무신들에게 빼앗겼 지만 황제와 문신들 합작으로 암살이라는 비합법적 수단으로 반란지도부가 일거에 제거되며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훈과 최질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고려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무신들이 이미 11세기부터 체제의 모순에 도전했음을 보여주었다.
2) 토지와 병사 생계 문제는 왕조의 근본을 흔드는 뇌관임을 증명했다.
3) 150년 뒤 <정중부와 이의방의 무신정변>은 바로 이 씨앗에서 자라난 열매였다.
'고려사'는 이 사건을 단 몇 줄로 적었지만, 그 속에는 체제 모순과 개혁의 좌절, 무신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이 사건을 왕과 귀족의 시각에서만 다루며, 현종을 미화하고 김훈과 최질을 역적처럼만 그렸다.
그러나 역사는 작은 사건에서 큰 흐름이 시작되곤 한다.
<김훈과 최질의 난>
이 착한 쿠데타는 훗날 거대한 무신정변의 첫 물결이었다.
우리는 이 작은 역사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이어서 이의방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