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切頭山)이 아닌 순교산(巡敎山)
2016년 5월 29일(일) 09시 49분에 5호선 마포역 1번 출구에서 씨모우 서류바 또파파 위짜추 패노우 까토나 여섯명이 만났습니다. 오늘 날씨도 거의 30℃에 근접하는 여름 날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포역에서 한강공원으로 진입하여 강가의 산책로를 따라서 성산대교 북단을 향합니다. 북단에서 성산대교를 건너 선유도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양화대교를 건너서 합정역까지 걸을 예정입니다.마포나루에서 기념 사진 한컷 찍고 출발하니 벌써 땀방울이 이마를 적십니다. 양화나루에서 오른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로 올라섭니다. 바로 여기가 절두산(切頭山) 천주교 성지입니다. 예전에는 차를 타고 지나면서 바라보기만 하던 곳입니다. 프랑스 천주교 신부의 죽임을 이유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합니다. 조약하기를 요구하지만 조선의 흥선대원군의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퇴각합니다. 그리고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까지 진격합니다. 이것이 바로 1866년 조선 고종 당시의 병인양요(丙寅洋擾)입니다. 이를 빌미로 어린 임금 대신 전권을 휘두르던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와 참수가 한강물을 피로 물들입니다. 목을 베여서 한강물에 던짐으로서 서양 오랑캐에 더럽혀진 강물을 피로 씻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희생 당한 천주교인의 숫자는 1만명에서 수천 수백명이라는 설들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수 많은 백성들이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빼앗긴 것입니다. 서양인들의 병인양요가 자국민들의 병인박해로 앙갚음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병인박해가 아닌 더 나아가 병인참수(丙寅斬首)라고 할 수 있는 광기(狂氣)에 의한 전횡이며 살인 행위입니다. 양화나루 이 곳은 풍치가 아름다우며 정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해서 조선시대 많은 풍류객들이 찾아와 산수를 즐기던 곳입니다. 중국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풍치를 만끽하며 뱃놀이도 하던 유람지이기도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곡물과 어류와 채소등이 이곳 양화진에 집하하여 다시 지방 곳곳으로 선적되어 나가곤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풍류와 생필품의 주요한 집하 장소가 있는 평화로운 나루터였습니다. 강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치 누에 머리와 같다 하여 잠두봉(蠶頭峰), 용을 닮았다 하여 용두봉(龍頭峰), 들머리라 하여 가을두(加乙頭)이라고도 했지요. 병인참수 이후로 올해로 15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낙엽처럼 떨어져 버린 수 많은 영혼(靈魂)들이 지금도 절두산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아래 시원한 강물 위로 내려가지도 못한채 가슴에 피를 토하며 "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스칩니다. 육신은 스러졌으나 혼(魂)만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아직도 절벽에서 신음하고 있을 저들에게 이제는 원혼(怨魂)을 풀어 주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야지만 저들이 절벽에서 내려와 편안한 하늘나라로 갈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날 종교인들 신앙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몫입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으며 거기에는 종단 종파가 수 만개 이상 존재합니다. 자신들의 종교 신앙만이 하나님의 적자(適子)이며 적통(適通)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타 신앙은 사이비로 비하하며 도외시 하기도 합니다. 그들만의 종교 울타리에 들어와야만이 천당인 하늘나라로 갈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리하여야 영생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교를 하며 전도하려 합니다. 무신론자는 색안경을 끼고 인간으로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탄생도 수천년 전에야 인간들에 의해서 주창하고 설파하여 전도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문명의 이기(利器)도 문자도 없는 암흑의 선사시대입니다. 작금의 의식주 생활과는 전혀 다른 생존을 위한 영장류(靈長類, primate)중의 최상급일 뿐이었을 겁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고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의 생활로 동물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태여나서 병들어 쉽게 죽을수 밖에 없는 정신도 육신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내가 메시야 구세주요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종파들이 태여납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 동안 서로가 반목하며 투쟁과 개혁등을 거치며 수 많은 교파가 양산됩니다. 기독교는 세계적으로는 현재 2만개 이상의 교파가 있습니다. 기독교(基督敎,Christianity)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구세주, 기름부음을 받은자)를 중국 음역으로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8세기 후반에 전파되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Jesus회를 야소교(耶蘇敎)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라 함은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Protestant)만으로 오용되기도 합니다. 주요 분파인 로마카톨릭교, 동방정교회,여러 개신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유일신 야훼를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모든 종교 단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얽히고 설킨 교파를 초월하여서 외로운 인간의 영혼에 기름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헌금과 같은 물욕에만 혈안이 되어 기업체의 사기업화가 되어서는 참다운 신앙을 가진 종교는 아닙니다. 밥그릇이 커질수록 신도수가 많을수록 형제 자매 부모 자식간에 불화와 이권 다툼은 치열해집니다. 이들에겐 삼강오륜은 잊어버린지 오래이며 오직 나만을 위한 법정 다툼은 다반사입니다. 기업체에서나 볼 수 있는 친족간의 볼썽사나운 경영권이나 재산 상속 문제의 처절한 싸움은 종교계에서도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도 신앙이라는 보호막을 가진 사업체에 불과한 것도 같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육체의 평강과 안일함 보다는 영혼의 평화와 믿음을 줄 수 있는 인간의 삶에 진정한 하나님이 되도록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절두산 절벽에서 신음하고 있을 그들에게도 원혼(怨魂)이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의 안식처를 찾아서 떠날 것입니다. 천주교 이태석이라는 신부의 모습이 뇌리를 스칩니다. 6년 전 어느 일요일 아침입니다. 친구들과 등산 배낭을 메고 찾아든 곳은 청량리역에 있는 시네마 극장입니다. 산행을 뒤로 미룬채 이태석 신부의 다큐 영상인 " 울지마 톤즈"를 관람합니다. 상영 시간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영상을 보면서 펑펑 울어보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몇년이 흐른 이 시간에도 이태석 신부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에서 솟구치는 눈물은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 분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슬픔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신부이기 이전에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무조건적 헌신과 사랑이 온 몸에 전율로 다가옵니다. 우리나라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멀고도 먼 황망한 아프리카 남수단의 자그마한 톤즈라는 마을에서의 실생활의 이야기입니다. 20년간 내전으로 모든 것은 파괴되었습니다. 기온이 50℃를 오르내리는 사막과 같은 작은 마을입니다. 먹는 물도 30℃를 웃돌고 위생 상태는 엉망으로 지저분합니다. 아이들은 먹을 것, 입을 옷, 신을 신발, 배울 수 있는 교실, 병든 환자를 돌볼 의사와 간호사 의약품등 어느 것 하나 가진 것이 없습니다. 교실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브라스 밴드부도 결성하여 부는 법도 자신이 배워 가르칩니다. 50여명이던 학생수가 천명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고국에서 어렵게 조달하여 먹이고 신기고 입히고 가르치며 치료를 합니다. 멀리까지 가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센 환자도 직접 만지고 닦아주며 돌봅니다. 그 나라 대통령 행사에 밴드부가 초청을 받고 힘차게 연주도 합니다. 병들고 시들어 아무 희망이 없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과 밝은 내일을 가질수 있도록 헌신과 사랑을 베풉니다. 자신의 육체가 병들어 망가지며 만신창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삶이 있을 뿐입니다. 악화될대로 커져 버린 모든 장기의 악성 종양은 더 이상 의사로서 신부로서 그 분의 사랑을 베풀 수 없게 합니다. 부러울 것 없는 48세의 젊은 나이에 못 다 한 사랑을 뒤로 한채 멀고도 먼길로 떠났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들을 걱정하며 " Everything is good "이라며 환하게 웃음을 보여주던 그 모습이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이 분이야말로 신앙을 몸으로 실천한 종교인으로서 살아 있는 천사이며 하나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평소에 친구들에게 우스개 소리를 하곤 합니다. " 나는 모든 종교를 마스터 했다 " 라고 말입니다. 너무나 말과 행동이 교리에 맞지 않는 종교인들을 수 없이 보아왔기에 하는 넋두리이기도 합니다. 다큐 영상을 생각 할 때마다 내 모습은 너무 초라하고도 보잘 것 없음에 스스로가 자책하기도 합니다. 과연 나의 걸어온 삶의 흔적은 무엇이며, 더구나 약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얼마나 아픈 사람들에게 가슴으로 대해 주었는지 되 묻곤합니다. 무신경하고 무책임하게 사업적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의 눈에는 나도 별 볼 것 없는 남들의 단점만 떠벌리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가 합니다. 이제는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을 순교산(巡敎山)으로 개명했으면 하는 생각을 홀로 해 봅니다. 목을 베어 버린다는 절두(切頭)라는 단어는 요즘 세계의 공공의 적(敵)인 I S(자칭 이슬람국가)가 연상됩니다. 몸서리 치는 이름은 버리고 기독교인들만의 성지 순례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친근감을 나타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까마득한 절두산을 뒤로 하며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깁니다.
2016년 5월 29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