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출신 48명의 의병독립유공자님들께 묵념을!
지난봄에 쌍치면 사무소를 방문하였다.
순창군 문화원에서 발행한 ❮6.25 전쟁❯ 관련 기록을 눈물로 읽었는데 특별히 쌍치면의 전쟁 피해가 상상을 넘어섰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쌍치면사무소에 그런 구체적인 자료가 전혀 없었다.
현재 면지 발행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서 조만간에 책이 발간될 것이라는 부면장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뜻밖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면사무소가 전소되어 면민들의 호적 복구가 참으로 힘 들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공적 문서가 다 소실되어서 집터의 문제, 토지 분쟁 등 문제들이 발생하였을 때 처리가 곤란하였으며 전쟁 전에는 면 인구가 1만2천 명 정도이었는데 전쟁 후에 4천명으로 줄어서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특별히 2000년대 들어서 관계부처에서 전쟁기간에 인민군과 군경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 명단을 조사해서 보내라고 하는데 근거가 되는 호적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정부가 원하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전쟁이 발발한지 71년째라서 증언자들이 생존율이 많지 않지만 인민군과 국군에 의한 피해지역인 쌍치면이 슬프고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바르게 기록하여 남겨주기를 바라며 순창문화원으로 향했다. 이미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혹시나 해서 들렸는데 운 좋게 ❮순창군 6.25 전사❯단행본을 받았다.
문화원의 박선생님과 대화중에 쌍치의 많은 면민들이 6.25 전쟁 중에 인민군과 군경에 의해
대학살을 당한 역사적 사실이 분명한데도 희생자 명단 작성이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박선생님께서 문화원도 비슷한 애로사항이 있다고 하였다.
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선정한 순창군 출신의 48명 유공자 후손들에게 훈장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공자의 후손을 찾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하였다.
첫째는 ❮6.25 전쟁❯기간에 후손들이 다 죽었을 가능성이고,
둘째는 유공자의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가문 전체가 고통을 당하게 되자 족보에서 파냈을 가능성이고,
셋째는 유공자의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족들이 그 지역에서 살기 어려워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고,
넷째는 유공자가 다른 지역 출신이나 의병장이 순창 출신이므로 순창으로 적었을 가능성이고,
다섯째는 유공자가 가명을 사용하여 가족들과 연계를 끊었을 가능성 때문이고
여섯째는 출신이 한미하였기 때문에 기억되거나 기리어지지 않고 잊히어졌을 가능성 때문이라고 하였다.
독립유공자!
말만 들어도 피가 끓고 가슴이 뛴다.
생명 바치어 일제에 저항한 가슴 팔팔 끓는 장본인의 이름도 있고 본적도 있는데 후손을 찾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하신 48분의 독립유공자 명단을 마음에 새긴다.
아래는 순창문화원에서 받아 온 ❮독립유공자 훈장 미전수자 명단❯이다.
독립유공자 훈장 미전수자 명단( 순창문화원 제공)
성명 | 사망년도 | 훈격 | 당시 본적 | 현재 행정구역 |
유공술 | 1911.7.25 | 애족장 | 순창 하치등 옥산 | 순창 쌍치 옥산리 |
유재순 | 미상 | 건국포장 | 구암 율복 | 구림 율복리 |
이경선 | 1910.10.26 | 애국장 | 상치등 농동 | 쌍치 |
이광신 | 1912.11.20 | 애국장 | 호계 쌍암 | 인계 쌍암리 |
이영선 | 1910.1.23 | 애족장 | 구암 금동 | 순창 구림 |
이황룡 | 1910 | 독립장 | 무림 장암 | 구림 월정리 |
임병수 | 1909.12.26 | 애국장 | 호계 호계 | 인계 갑동리 |
임태원 | 미상 | 애족장 | 구암 금평 | 구림 금천리 |
장명운 | 1910.1.15 | 에국장 | 순창 팔등 월곡 | 팔덕 월곡리 |
장문동 | 미상 | 애족장 | 복흥 농소 | 복흥 답동리 |
장석봉 | 미상 | 애족장 | 호계 탑 | 인계 탑리 |
장홍집 | 1910.2.18 | 애족장 | 하동 원치 | 순창 동계 |
정기선 | 1910.3.4 | 독립장 | 구암 황계촌 | 구림 금창리 |
정자영 | 미상 | 건국포장 | 복흥 정동 | 복흥 정산리 |
정태경 | 미상 | 애족장 | 복흥 양림 | 순창 복흥 |
제봉렬 | 1911.8.17 | 애국장 | 무림 화암 | 쌍치 금성리 |
조복동 | 미상 | 애족장 | 팔등 대자 | 팔덕 광암리 |
조봉현 | 미상 | 애족장 | 좌부 은행 | 순창 순창 |
조양현 | 미상 | 애족장 | 복흥 칠립 | 복흥 금월리 |
조재학 | 미상 | 애족장 | 하치등 옥산 | 쌍치 옥산리 |
최병길 | 미상 | 대통령표창 | 복흥 대가 | 복흥 봉덕리 |
최산홍 | 1910.4.30 | 독립장 | 구암 통안 | 구림 율복리 |
최인숙 | 1910.1.19 | 애국장 | 복흥 마치 | 복흥 |
추재엽 | 미상 | 애족장 | 복흥 칠립 | 복흥 금월리 |
구영숙 | 미상 | 애국장 | 좌부 하전 | 순창 남계리 |
권얼동 | 미상 | 애족장 | 쌍치등 구산 | 쌍치 |
김공찬 | 미상 | 애족장 | 하치등 옥산 | 쌍치 옥산리 |
김기룡 | 미상 | 애족장 | 호계 용암 | 인계 용암리 |
김만룡 | 미상 | 애족장 | 복흥 임동 | 복흥 |
김병갑 | 미상 | 애족장 | 복흥 동서 | 보흥 정산리 |
김봉률 | 미상 | 건국포장 | 우북 백야치 | 순창 백산리 |
김석기 | 미상 | 애족장 | 복흥 증산 | 복흥 |
김선여 | 1910.5.25 | 독립장 | 복흥 상마치 | 복흥 서마리 |
김성길 | 미상 | 애국장 | 좌부 하절 | 순창 남계리 |
김윤옥 | 미상 | 애족장 | 귀덕 남정 | 구림 운남리 |
김재화 | 미상 | 애족장 | 복흥 마치 | 복흥 |
김흥룡 | 미상 | 건국포장 | 구암 안심 | 구림 안정리 |
문동기 | 미상 | 애족장 | 하치등 윤룡 | 쌍치 학선리 |
박막동 | 미상 | 애족장 | 구암 치내 | 구림 금천리 |
박선경 | 미상 | 애족장 | 우부 백야치 | 순창 백산리 |
박중학 | 미상 | 애족장 | 복흥 수암 | 순창 복흥 |
봉순택(봉전주) | 1913.3.16 | 애국장 | 상치등 상방 | 순창 쌍치 |
신현명 | 미상 | 애족장 | 구암 황계 | 구림 금창리 |
양경학 | 1910 | 독립장 | 구암 구암 | 구림 구암리 |
양성언 | 미상 | 애국장 | 하치등 금정 | 쌍치 금평리 |
양창서 | 1910.3.20 | 애족장 | 아동 유점 | 동계 |
양춘범 | 미상 | 애족장 | 구암 구산 | 구림 구산리 |
엄일봉 | 1910.8.23 | 애국장 | 하치등 피노 | 쌍치 금성리 |
순창지역 독립유공자 훈장 미수자 명단을 정리하며 반복해 묵상하며 정확한 개념을 알고자 독립유공자와 적용대상, 훈격 등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다.
위키백과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하고 있다.
1) 독립유공자는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에 따라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말한다. 이러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 선양하고 민족정기와 민족단결을 고취하며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82년 1월 29일,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설립되었다. 2019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는 15,511명이다.
2) 적용대상은
*순국선열 :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자 또는 대통렬 표창을 받은 자
*애국지사 :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 건국 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이다.
3) 독립유공자 명단
*독립유공자 1급 : 대한민국장(31명)
*독립유공자 2급 : 대통령장(92명)
*독립유공자 3급 : 독립장 (820명)
*독립유공자 4급 : 애국장 (4,338명)
*독립유공자 5급 : 애족장(5,763명)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4) 포상 심사기준의 완화 및 확대
2018년 1~2월과 4월에 걸쳐 달라진 포상심사 기준에 따르면 의병이나 학생, 여성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기 위해 수형 • 옥고 위중의 포상기준을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경우로 완화했다. 3개월 이상의 옥로를 치루거나 6개월 이상의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는 공적이 있어야만 독립유공자로 지정될 수 있었으나 명백한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됐을 때는 수형기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또 독립운동을 했으나 광복 이후 사회중의 활동ㅇ 참여를 했다는 이유로 포상에 소극적이던 세서 벗어나 북한 정부 수립에 관여하지 않은 경우에는 포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2018년 8월 15일 제 73주년 광복절에 모두 177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했는데 이 가운데는 수형기간 완화 규정에 따라 포상한 독립유공자가 104명이었다. 특히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 이력이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훈이 크다고 판단된 손용우 등 12명의 독립유공자도 포함되었다. (이상은 위키백과에서 발췌함)
1945년 해방 당시 한국인의 인구는 총 2천만 명 정도 이었다.
그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이 해방을 맞이한 것은 생명을 바치어준 15,511명의 독립유공자님들과 유공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국내는 물론이고 북간도와 만주 들판에서, 중국 관내에서, 연해주 등지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피 값 덕분이다.
특별히 순창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을 섰던 의병들 중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하신 의병들의 피 값을 생각하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희생 없이 그냥 절로 해방이 오지 않았듯이
희생 없이 그냥 절로 ❮6.25전쟁❯이 휴전된 것은 아니다.
민초들의 희생으로 이어진 역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다.
민초들의 희생으로 국난과 위기는 극복되는데 민초는 사라지고 몇 사람들의 이름만 남는다.
2021.6.6.현충일에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