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 ‘조반니 디 피단자’인 ‘보나벤투라’는 1217년(1221년?) 이탈리아 중부 바뇨레지오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자’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가 이후에 편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기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전기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심한 중병을 앓았는데,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병이 낫도록 기도해줄 것을 청하자, 프란치스코가 기꺼이 아기를 위해 기도해주었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란치스코는 "이것 참 좋은 소식이로구나! (O, Buona Ventura!)"라고 감탄했고, 이것을 계기로 아기의 이름도 ‘조반니’에서 ‘보나벤투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기의 내용에 등장하는 일화에서 그의 어머니가 찾아간 사람이 생전의 프란치스코였는지 아니면 당시 바뇨레지오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배받았던 사후의 프란치스코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보나벤투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록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17살이 되던 1238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으로 썼다고 하는데,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 2005. 4.19 ~ 2013. 2.28)의 강론에 따르면 그가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243년부터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서기 1234년, 그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알렉산더 핼렌시스’(1185~1245)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왕국의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알렉산더에게 깊은 영감을 받으며 총애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더는 그를 일컬어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파리 대학교에서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마친 그는 스승인 알렉산더를 따라 파리에 있는 작은형제회에 입회하게 되는데, 1248년부터는 자신이 수학했던 파리 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1250년부터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석에 착수하여 1254년 이를 완성하면서 파리 대학에서 신학 강의를 할 자격을 얻는 동시에 당시 프란치스코회에 할당된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서 활동할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교수로 취임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재속 신학자들과 수도회 신학자들 사이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시기의 보나벤투라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나 정확한 연대 확정의 문제와는 별개로 그가 로마 관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르비에토(이탈리아 중부 도시)’가 아닌 파리에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고 대학 과정의 수련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확실한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전부터 파리 대학교에서 재속 신학자와 수도회 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갈등은 그가 신학 강의 자격을 얻어 교수로 막 취임하려던 순간에 생따무르의 ‘기욤’이라는 인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당시 파리 대학교의 재속 교수였던 기욤은 1254년 자신의 저작을 통해 프란치스코회와 설교자회(도미니코회)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으며 갈등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고 1256년에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탁발 및 청빈이 도덕적 악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펼치기에 이르자 이에 두 수도회 출신 교수들을 비롯한 수도회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갈등과 반목이 심화하였으며, 이와 같은 양상이 3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파리 대학교의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프랑스의 왕 ‘루이 9세(재위 : 1226. 11. 8 ~ 1270. 8. 25)’가 파리 대학교에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것을 종용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먼저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필두로 그의 동료인 프란치스코회의 요크의 ‘토마스’가 그와 함께 탁발 수도회의 청빈과 생활 방식을 옹호하는 동시에 기욤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박하는 저서들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얻게 되는데, 그 결과 1256년 10월 5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의 입장을 정죄하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지속되던 파리 대학교의 문제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취임이 확정된 지 3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257년 8월 그는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게 됩니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교수로 취임했지만, 그는 교수로서 오랫동안 재직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그가 교수로 취임하기 전인 1257년 2월 2일에 이미 그의 높은 학식과 성덕을 인정받아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으로, 40대 전후의 젊은 나이에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신생 수도회의 총장으로 취임한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단(요아킴주의) 혐의를 받아 프란치스코회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을 염려해 자진해서 총장직을 사임한 그의 전임자 복자 ‘파르마의 요한’의 직을 승계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대외적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인지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게 되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회의 위기 상황에서 총장직에 오른 그는 프란치스코가 만든 수도 규칙을 수도자들이 시대 상황에 맞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프란치스코회의 첫 회헌인 ‘나르보나 회헌’을 만들어 친히 모범을 보이며 말과 글로 수도자들을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 수도원을 방문하여 관심을 보이고 격려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프란치스코회의 대외적 위상의 안정은 물론 36개의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프란치스코회의 내적 갈등의 완화라는 커다란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라고 불릴 만큼 수도회의 운영에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남긴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전기의 보완과 완성입니다. 당시 수도회 창립자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이미 첼라노의 ‘토마스’가 남긴 3편의 전기와 스파이어의 ‘율리아누스’가 남긴 몇 편의 전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전기가 프란치스코회의 초창기 정신을 잘 반영하고는 있지만, 당시의 변화된 시대 상황과 한층 더 성장한 프란치스코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기엔 어려움이 많다고 판단한 그는 1260년 나르보나 총회의 위촉을 받아 기존의 전기문 및 민담과 전설들은 물론 성 프란치스코가 출생 및 선종, 그리고 활동했던 장소들을 실제로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후 예의 달필을 휘둘러 오늘날 《레겐다 마요르》라 불리는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이 새 전기는 1266년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공인되어 모든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이 새 전기의 사본을 최소한 한 권 이상 보유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그의 새로운 전기 외에 이전에 편찬된 모든 전기를 폐기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이와 같은 조치는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나가는 젊고 개혁적인 종단으로 거듭나려는 총장 보나벤투라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편찬된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는 이제 700여 년의 세월과 프란치스코회라는 수도원을 넘어 오늘날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삶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회의 개혁과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조 그리고 동방정교회와의 재통합과 같은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당대의 권위 있는 신학자들을 불러들여 1274년 5월 7일 제2차 리용 공의회를 개최했는데, 그중에는 교황이 지혜와 성덕을 흠모하여 1273년 3월 23일 추기경으로 임명한 보나벤투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추기경으로 임명될 당시, 과거 교황 클레멘스 4세가 1265년에 그를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했을 때처럼 추기경이라는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교회법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교황의 명을 받아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그를 만나 임명장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서기 1274년, 이렇게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리용 공의회 참석 중 7월 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와 다수의 동서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병환으로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리용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군중들에 의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다른 유골들과 함께 광장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고위 성직자 한 사람이 그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고 전해지는데, 아쉽게도 이 성직자가 그 장소를 비밀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 유해의 행방은 오늘날까지 미궁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혜롭고 거룩한 인물, 자비심과 덕이 풍성한 인물,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사로잡는 인물을 잃었다며 슬퍼했다고 하는데, 리옹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선언문에 그런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례식 때 사람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주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를 아는 사람마다 그를 깊이 사랑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시성은 그의 동료 교수이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도미니코회의 박사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그토록 해소하려고 노력했던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갈등이 다시 악화되어 그의 시성이 미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를 당대의 대표적 인물, 인간과 하느님에 관한 진리의 용감한 변호자, 신비주의적·그리스도교적인 지혜를 훌륭하게 해석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서 보여준 모범적인 삶과 그의 교리가 서방교회의 삶과 신앙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인정하여 1482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회 출신이었던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 되었으며,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서 ‘세라핌 박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가 ‘세라핌 박사’라 불리는 이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성흔을 받은 라베르나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여섯 날개 세라핌의 환영을 보았던 것도 있고, 그런 그가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이라는 저서에서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그 세라핌의 여섯 날개로 나누어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