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때문이었나, 정치적 모함 때문인가?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는 수백년간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미궁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혜경궁홍씨와 정조의 증언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사도세자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영조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다. 이는 혜경궁이 남긴 생생한 증언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19살 무렵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영조까지 죽이려 할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이를 보다 못한 영빈이씨가 아들의 상태를 영조에게 숨김없이 전하면서 세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 <한중록>의 설명이다.
하지만 정조가 남긴 <현륭원기>에 등장하는 사도세자는 무예에 뛰어나고 매우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요순(堯舜)에 버금갈 정도로 제왕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노론 벽파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정조의 증언이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과 그의 아들 정조의 증언이 왜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게 된 것일까. 정조는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동궁시절 침실에 자객까지 보낸 벽파 세력을 반드시 숙청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은 반드시 억울한 죽음이 되어야만 했다.
혜경궁은 아들 정조에 의해 친정 집안이 멸문되다시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난 후 혜경궁은 손자인 순조에게 임오사변의 진실은 이러했다는 신세한탄을 하면서 친정의 명예를 되찾아주기를 호소했다. 그 기록이 바로 <한중록>이다.
정조가 <현륭원기>를 쓴 것도,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것도 각자의 정치적 목적이 담긴 행위였기 때문에 진실 여부를 가리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사도세자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는 영조의 빗나간 부성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평생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에서, 경종을 죽였다는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조는 아들만큼은 후궁의 아들이 아닌 제왕의 후예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100일이 갓 된 아이를 어미에게서 떨어뜨려 세자궁에서 홀로 크도록 했다.
영조는 아들을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 손에 크게 함으로써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또한 아들이 만백성의 스승(君師)으로 성장하여 왕권강화의 기틀이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유교적 덕치를 강조했던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무예와 잡문, 도교서적을 더 좋아했다. 이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는 아들만 보면 화를 내고, 꾸지람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세자는 궁궐 구석진 곳을 찾았고 점점 분노를 다스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에 폭발했다. 영조는 노론들과 손을 잡고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다. 그런데 세자는 노론들과 사사건건 반목했고 오히려 소론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다. 이에 노론 대신들은 세자가 궁에서 저지른 문제, 저자거리에서 일으킨 사건들에다, 떠도는 소문까지 보태서 영조에게 고해바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영조는 아들을 불러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300년 종묘사직이 망한다. 네가 죽으면 종묘사직은 보존할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네가 죽어야 한다.”
어린 세손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둔 채 8일간 방치했다. 외조부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침묵을 지켰고, 심지어 친할머니 영빈이씨와, 어머니 혜경궁홍씨조차 죽어가는 세자를 외면했다.
출처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