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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20년 12월 20일, 강림절 제4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0년 12월 20일, 교회력으로 강림절 제4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강림절 제4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25장(면류관 벗어서)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 누가복음 1:46~55절까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 함께 기도합니다. [8세기, 젤라시오 전례서]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밝은 별빛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주를 경배하며
값진 선물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정의의 별이 항상 우리 마음 속에 비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우리의 보물처럼 주님께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6:25~27절입니다. (성경)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 특별 찬양] 낮은 곳으로 by WELOVE
*. 말씀 선포: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1. 들어가는 말
강림절 제4주를 맞이합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은 5월 15일이라고 합니다. 스승의 날인데, 혹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에 맞추어 그를 기념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의 업적을 기립니다. 업적 가운데서도, 누구는 한글 창제, 누구는 여러 과학적 발명품들(해시계, 물시계, 천문관측기구, 음악 악기, 무기 등등), 누구는 백성들을 위한 위민(爲民) 정치 등등 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을 주제로 하는 영화만 보더라도,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 하는, 감독의 시선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를, <천문: 하늘에 묻다>은 장영실을 등용하여 만든 과학적 발명품을 주제로 해서, 감독 나름대로의 해석과 시선이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오시는 성탄이 5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맞이하면서, 혹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시선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의 어떤 면을 보는가, 무엇을 기리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 특별히 사도 바울(이라는 ‘감독’을)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말씀 나눔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울만이 쓰는 표현입니다. 어쩌면 가장 솔직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보통은 자신의 복음을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쓰여졌기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도, 독자들이 잘 새겨 읽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즉, 저자의 의도, 표현 등을 살펴 읽어야 합니다. 사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서의 저자들도 그들이 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세종 대왕을 주제로 하는 여러 영화감독처럼, 예수님을 주제로 삼아 (‘감독’으로서) 그들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 복음서를 보면서 저자의 의도와 표현의 방식 등을 함께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 구약을 포함한 다른 성경책들도 모두 저자의 신학과 사상이 토대가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아예 “나의(바울의) 복음”이라고, 자신 있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얻은 그의 깨달음이 크고 견고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살펴봅니다.
2. 본문의 개괄적 이해
오늘 본문은 집중해서 잘 읽어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각없이 읽으면 무슨 말인지 조금 헷갈립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영어로 번역된 것을 살펴봅니다. (영어 번역이 조금 쉽게 되어 있습니다) 25-27절 까지 입니다.
[Praise God! He can make you strong by means of my good news, which is the message about Jesus Christ. For ages and ages this message was kept secret, but now at last it has been told. The eternal God commanded his prophets to write about the good news, so that all nations would obey and have faith. And now, because of Jesus Christ, we can praise the only wise God forever! Amen.]
본문 이해를 위해서 잘라서(거친 표현으로) 직역을 해 봅니다.
[하나님을 찬양! 그가(하나님께서) 당신을(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 강건케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에서 깨달은 나의(바울의) 복음(좋은 소식)을 통해서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비밀에 부쳐진 것이었다가 마침내 (우리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복음(좋은 소식)에 대하여 그의 선지자들에게 쓰도록 명하신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나라가(민족이) 이 복음(좋은 소식)에 순종하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아멘.]
위 본문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께서 당신을 (말씀을 듣는 이들을) 강건하게 하시는데,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나의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에서) 바울이 깨달은 나의(바울의) 복음의 특징은, 1) 아주 오래 전부터 비밀에 부쳐졌다가 마침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고, 2) 모든 나라가(민족이) 순종하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에게 명하여 이 복음에 대하여 쓰게 하신 것(예시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삼위(三位)의 등장, 그리고 일체(一體)
앞 부분부터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말씀을 듣는 이들을) 강건하게 하시는데,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나의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 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이 깨달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듣는 이)를 강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의 일체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시고, (바울이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성자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를 통해 나를 강건하게 하신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기서 ‘나’는 곧 성령하나님의 지평이 됩니다. 성령은 늘 ‘나’와 함께 동행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의 뜻을 이루신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마치 땅과 씨앗의 관계와 같습니다. 땅은 씨앗을 필요로 하고, 씨앗은 땅을 필요로 합니다. 둘 다 서로 다른 쪽이 있어야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땅과 씨앗이 만나야 비로소 생명이 있는 나무와 식물을 냅니다. 성부와 성자는 땅과 씨앗으로 만나고, 성령은 그 만남의 신비 속에서 나무와 식물로 생명을 터트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삼위 중 어느 하나 엄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치 플라톤의 눈의 비유에서처럼, 볼 물체가 없어도, 볼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게 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없듯이, 삼위 가운데 어느 한 위(位)라도 없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깨지고 맙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곧 성자의 지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만은, 그 모든 일을 이루시게 하는 이는 하나님 아버지, 성부의 지평이요, 그로 인해 강건케 되는 것은 ‘나’ 자신으로 성령의 지평이 된다는 것 역시 결코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우리의 시선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의 영혼을 강건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바울 자신이 깨달은 바울의 복음,그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3. “나(바울)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
바울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깨달은 좋은 소식, 곧 복음은 한 마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케리그마(kerygma)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 케리그마는 ‘복음에 대한 말씀 선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으로 인해), ‘십자가와 부활’을 케리그마와 거의 동일시하여 이해합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 하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싶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 복음을 믿는 자는 십자가를 전한다고 했습니다(ref. 고린도전서 1:22-23a).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가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ref.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사형 도구’인데, 바울은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 되었다고 보았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셨고, 결국은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구세주,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되신 까닭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지평이 부활로 가는 길목에 있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본받으려고 합니다. 이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0b-11절입니다.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더 나아가, 바울은 구체적으로,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는 길, 그 의(義)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라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첫번째 믿음은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믿음입니다. 곧,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의(義)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또 다른 믿음으로 이끌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끈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이 두 믿음을 ‘믿음’으로 산다는 세번째 믿음이 나옵니다. 곧, 이 두 믿음을 믿는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울의 유명한 신학적, 신앙적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 바울이 통찰한 이 말씀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회심으로 이끈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를 종합해서 바울의 로마서 1:17절 표현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성부 하나님을) 믿음으로 (성자 하나님의)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성령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앞서 말씀드린 땅과 씨앗 그리고 생명을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 깨달음이 얼마나 컸든지 바울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유익한 것을 오히려 해(害)로 여기고, 더 나아가 심지어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7~9a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요약하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에서 깨달은 그의 복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으로 ‘믿고’ 그 고난에 동참하면 죽음을 이기는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와 부활’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 이제 나타난 것”(25)이며, “선지자의 글로 나타나 예시된 것”(26a)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4. 십자가와 부활, 그 의미
바울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그의 복음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바울의 복음은 그의 표현대로, 1) ‘아주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것’이며, 2) 선지자의 글로 기록되어 예시되어 있으며 이 또한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봅니다.
첫째, 십자가와 관련하여, ‘아주 오래 전부터 감추어진 것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세상은 “권선징악(勸善懲惡)”에 의해서 질서를 잡아 왔습니다. 사실,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초적인 틀이 됩니다. 좋은 일하면 상(賞)을 주고, 나쁜 일 하면 벌(罰)을 주고! 성경의 많은 구절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잘 새겨야 할 것,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賞)과 벌(罰)이 방편(方便)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상과 벌을 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잘한 이에게 상을 주는 것 혹은 잘못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훈육(訓育)의 의미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상벌(賞罰)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상벌(賞罰)은 방편(方便)이 됩니다. 방편, 수단이라는 말, 굉장히 쉽고 단순한 것인데, 이것이 참 많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원래는 알았으나, 어쩌다 보니 (사실은, 죄가 들어와서) 그 의미를 놓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6장에서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람인)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나지 못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기는 것, 곧 상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경우, 사람의 병을 고치고 살리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 그로 인해 받는 상이(수익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상벌(賞罰)은 삶의 방편(方便)입니다. 혹 삶을 상벌의 방편으로 살고 계시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아주 오랫동안 놓치고 있던 이 점을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3:3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a). [*.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는, 말씀은 구세주로서의 미션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저들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악인 혹은 죄인입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입니다. 죄없이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밝혀 벌을 내려달라고,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정의(正義)입니다. 십자가가 방편이 아니고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방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꾸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하시며 하나님께는 오히려 버림받고, 버림받아야 할 저 죄인에 대해서는 용서해달라고 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 (십자가를 방편 삼아) 죄인인 저들도 부활(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있게 되고, (희생양이신) 예수님 자신도 부활(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목적으로서의 부활(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오랫동안 감추어진 것이고,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벌이 목적이 아니라는!!! 상벌(賞罰)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방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방편이 됩니다. 부활이 목적이 됩니다.
벌(罰)이 방편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는 벌을 내리면 안됩니다. 벌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벌이 아니라 용서를 해야 합니다. 구세주로서 오신 예수님께서도 때로, 벌을 내리시는 말씀을 하시지만, 방편의 의미가 없을 때에는 그냥 용서하십니다. 부자, 율법학자, 바리새인, 제사장들을 대하시는 예수님과, 세리, 창녀, 병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꾸짖으시며 벌을 내리는 말씀을 하시지만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품고 용서해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의 멸망 전과 후의 예언자의 메시지를 살펴 보십시오. 멸망 전에는 저주의 벌을 예언하지만, 멸망 후에는 구원의, 소망의 메시지를 예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상벌(賞罰)은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상벌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랫동안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 예수의 십자가, 옳은 이가 벌을 받아도, 옳지 않은 이가 상을 받아도, “상과 벌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라는 깨우침이 그의 머리를 쳤을 것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지혜가 됩니다.
둘째, 부활과 관련하여, 예시된 선지자의 글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십자가의 고난 후에) 부활과 단정적으로 연결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부활은 모든 것의 목적이 됩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되면, 이러한 통찰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4~47절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과연 마음이 열려야 성경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글, 선지자의 글은 마음이 열려야 그 성경을, 그 선지자의 글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목적이 보이지 않고, 방편을 목적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글 자체에 매여 엉뚱하게 본 뜻을 왜곡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선지자들의 글을, 그 참 의미를 일러주십니다. 바로, 방편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 입니다.
선지자의 글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해라! 혹은 하지 말라! 입니다. 방편입니다. 율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방편으로는 (방편이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이 따르고 믿음을 가지게 하는” 글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민족이 따르고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방편이 아닌 목적의 언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은 방편인 상벌을 ‘목적’으로 보는 우(愚)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죄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롭게 선지자들의 글을, 법을 완성시켜 주십니다. 보는 눈을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18절 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렇다면, 목적, 곧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 율법,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방편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또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아는 황금률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방편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황금-률(律)이 됩니다.
또 모든 선지자의 글로 표현된 법을 한 가지로 줄여서 우리에게 계명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서의 계명은 방편이 아니라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의 목적, 참 의미를 ‘사랑’으로 들려주십니다. 방편으로서 사랑이 아닌, 목적으로서 사랑, 곧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온 민족이 순종하고 믿음을 갖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방편이 아닌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이르러서야, 선지자의 글에서, ‘목적’이 발견되었음을 통찰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이 죽음을 이겨낸 부활 그 자체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5. 나가는 말
아기 예수 오시는 성탄을 5일 앞 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기립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업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로 인해 여러분의 영혼은 견고해 지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위의 질문에 답을 얻으셨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령의 뜻, 곧 우리 각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서,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난 것, 그리고 선지자의 글 속에 예시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참 의미가 드러난 것, 곧, ‘십자가와 부활’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케리그마(kerygma, 선포된 복음)로 전해줍니다. 바울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은 두말할 것 없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바울이 통찰한 이 복음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영(靈)이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고 강건하게 서게 하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업적, 곧 ‘십자가와 부활’을, 만나고, 기억하고, 기리고, 따르고, 감사하는 시간 속에서 성탄을 맞이하시고,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상벌(賞罰)로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사랑으로서, 삶으로서, 그 나라를 온전하게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가 94장(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1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헌금 기도합니다.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120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