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보이질 않는다. 전화를 걸었더니 벌써 도착해 자기들도 우리들을 찾고 있는 중이란다. 무량수전 앞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무량수전? 우리 절 안에 있는데 무량수전은 없고 극락전만 있는데' .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라고 했더니 아뿔사,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에서 두시간반이나 떨어진 충청도 서산 부석사로 간 것이다.
내비에 부석사를 찍으면 첫번째로 뜨는 것이 스산 부석사(서산은 서산이 아니라 스산이라고 발음해야 맛이 난다). 아무리 길치에 전적으로 내비를 믿어도 그렇지 4명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서산 부석사에 갔는지 나는 아직도 그것이 궁금하다. 부석사 근처에서 하룻밤 자는 일정이었기에 망정이지 당일치기였으면 각자 놀다 돌아올뻔 했다. 그 뒤 우리들은 어딜 가든 서산 부석사의 교훈을 기억하며 꼭 목적지를 맞춰본 뒤 길을 떠난다.
떠 있는 돌에서 유래한 부석사란 이름도 똑같고, 의상대사의 창건설화도 똑같고, 용이 되어 의상의 뱃길을 호위한 선묘 아가씨를 모시는 선묘각이 있는 것까지 똑같다. 영주 부석사가 아흔아홉칸 대갓집 같은 분위기라면 서산 부석사는 소박한 고향집 같다. 두 부석사에 인연이 닿아 하룻밤씩 자봤는데, 영주 부석사는 모과빛으로 물든 밤 무량수전이 좋았고, 서산 부석사는 마루에 앉아 낙수물 떨어지는 소리가 가슴을 적셨다.
아주 오래전 서산 부석사를 소개하는 신문의 흑백 사진을 수첩에 끼워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소개글 말미에 미리 전화를 하면 절에서 하룻밤 잘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서해의 드넓은 갯벌 천수만이 육지가 되고, 달을 보고 홀연히 깨우친 무학대사의 전설을 간직한 섬 간월도가 육지로 변한 직후였다.
만조로 바닷물에 잠긴 간월암을 들어가지 못하고 부석사에 전화를 걸었다. 혹 하룻밤 유할 수 있느냐고... 마침 절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집에 다니러 가 빈 방이 있다고 있다고 했다. 어스름한 시간 부석사에 닿았다. 축대 위에 일렬로 늘어선 요사채와 법당, 절이 아니라 시골 친척집에 놀러온 것 같았다.
방은 두 사람이 모로 누운 뒤 돌아눕는 것도 불편할만큼 옹색했다. 부석사에선 아직 창호지 한장으로 안과 밖을 경계지으며 겨울을 나고, 개천에서 날 용이 될 꿈을 꾸는 고시생이 있었다.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이불 한채 짐은 단촐하고 방은 정갈했다. 밤새 겨울비가 내렸다. 처마끝 낙수물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토방과 댓돌, 손바닥만한 방문이 그대로 있었다.
부석사 앞까지 들어오던 바닷물과 비단결 같은 노을은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후였다. 왕벚꽃을 보러, 심검당의 휘어진 대들보를 만나러, 산신각의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개심사에, 대하를 찾아 간월도에 드나들며 부석사 표지판을 보이면 그리웠는데...밤새 창호지에 스며들던 겨울비 소리가 꿈이려니 했다. 그 작은 방도, 스님 방에서 마시던 차 맛도...
십수년만에 어제 부석사에 갔다. 세상에... 처마 끝 낙수 떨어지는 소리도 그 작은 방도 여전했다. 우리 엄마 민병숙 여사의 여든번째 생일을 축하고자 나선 길이었는데 이십년전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축대 위의 토방, 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천수만과 갯벌, 심검당 측면의 쪽방. 안개 낀 부석사는 선계였다. -2010.05.24 서산 부석사
백수와 반백수 둘이 개심사 왕벚꽃을 보러 나섰다 인파에 질려 부석사로 피신, 벚꽃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부석사를 둘러싼 느티나무... 검은 가지에 미친듯이 피어나는 연두새싹 때문에 내 겨드랑이가 다 간질간질하다. 늘 티나게 멋있어서 '느티나무'란건 알았지만 느티나무 어린잎이 이렇게 이쁜지는 처음 알았다. 종루와 찻집이 어우러진 풍경, 정갈함이 살짝 우리나라의 절간이 아니라 교토 뒷골목의 느낌이 났다
내가 부석사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 쪽마루에 앉아 토방에 발 걸치고 회랑의 기둥 사이의 풍경 바라보기. 비 오는 날 쪽마루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 한잔 걸치면 세상에 부러울게 없겠다. 그래도 법당에 들어가면 삼배를 올리는 얼치기 불자를 자처하는지라 막걸리 말고 좋은 차 한잔하는걸로. 중요한건 반드시 물왕관을 그리며 떨어지는 비가 내리는 날일것
부석사의 으뜸 풍경은 서해로 지는 노을. 갯벌을 메꿔 B지구 간척지가 되며 꼬불꼬불한 우리나라 지도가 직선으로 바뀌어 버렸다. 보릿고개 넘기는 것이 삶의 과제였던 배고팠던 시절엔 땅이 필요했고, 요즘같이 쌀이 남아도는 시절엔 사라진 갯벌이 아쉽다고, 부석사 거사님이 말씀하셨다.
만공토굴, 꽤 깊고 안온해 수행이 절로 될듯... 근대의 선승 경허선사와 달月에 비유하는 세 제자, 북녘의 상현달 수월, 중천의 보름달 만공, 남녘의 하현달 해월의 체취가 서린 서산의 절집들. 개심사, 부석사, 천장암 같은 서해안의 올망졸망한 절집 여행은 경허선사와 그 제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최인호의 '길 없는 길'과 유작소설 '할'은 이들의 일대기를 다뤘다.
개심사에 연두색 청벚꽃이 있다면 부석사에는 연두색 비목나무 꽃이 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이름 모를 비목이여... 노랫가사에 나오는 비목이 이 비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무에 이름표를 달고 있어 비목인걸 알았다.
-2017.04.29 스산 부석사
첫댓글 스산부석사...몇년전 스치듯 다녀왔는데...글을 읽으니 내년 봄 버드나무 새싹날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드네요. 겨드랑이가 간질거리나 살펴볼겸...ㅎ
버드나무 말고 늘 티나게 멋진 느티나무. 겹벚꽃도 비목도 느티나무도 근사하지만 스산 부석사의 매력은 긴 마루, 그리고 토방
아지랑이가 모락 모락 올라오고 겨드랑이가 간질거리는 내년 봄쯤에는 '절집 이야기에' 나오는 경관 좋은
암자를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네요..ㅎ
@너도바람 부석사 긴 처마 밑에 자리잡은 마루에 한 쪽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드러누워 서해의 지는 해를 바라보는 호사스러운 상상을 해보게됩니다..ㅎㅎ
@신상용 내년 봄 세계를 뒤덮은 역병이 물러나면 봄볕 받으며 서해로 떠나 도반들과 부석사 마루에 앉아 바다를 볼수있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