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선생과 아내 최준례 홍소연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
홀로 이국땅에서 눈을 감다
1924년 1월 1일 중국 상해,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독립운동을 하는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홍구폐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입원한 백범의 아내 최준례를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홍구지역은 일제의 힘이 미치는 곳이다. 특히 김의한에게는 위험한 곳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환자가 운명 직전이라고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으려했다. 두 사람은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최준례는 얼굴에 핏기하나 없이 탈진해 말도하지 못했다. 운명 직전의 위중한 중에도 정신만은 똑똑하였다. ‘선생님께 오시라고 할까요?’ 묻자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한 홍구지역으로 남편을 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를 모셔올께요’라는 말에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백범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1919년 3월 백범은 혼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아내가 큰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뒤따라왔다. 1922년에는 어머니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가난하지만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둘째아들 신이 태어났다. 몸이 약한 아내는 신이를 낳고 채 회복되기 전에 계단에서 실족하여 병을 얻었다. 치료비가 없었다. 무료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 아내를 홍구폐병원으로 보냈다. 그것이 아내와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보러 가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내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다.
‘신이가 보고 싶어요’ 얼마 전 병문안 온 김규식 박사 부인 김순애 여사에게 최준례가 한 말이다. 젖 한번 제대로 먹여보지 못하고, 어쩌다 우유를 먹일 뿐 끓인 물에 설탕을 타 먹인 신이였다. 그나마 어미가 홍구폐병원으로 온 뒤로는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변변한 옷 한번 입혀보지 못한 신이가 보고 싶었다. 남편이, 큰아들 인이, 시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보고 싶다고 할 수 없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심정인들 오죽 하겠는가.
환갑이 넘은 시어머니에게 어린 두 아들을 두고 가야했다. 너무 어려 키우기 힘드니 신이는 고아원에 맡기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했다. 김순애 여사가 신이를 안고 병원으로 왔다. 그나마 신이를 볼 수 있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1월 4일 장례를 치르고 묘비를 세웠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8일 기사이다.
이
사진은 항자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야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격지 못한 고생으로 간 장을 녹이다가 몇 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 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쌍히 여기어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어학자 김두봉(金枓奉) 씨가 지은 순 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 씨(郭氏, 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 남편 김구(金九, 49) 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이는 큰아들 김인(金仁, 7)이요, 왼편에 있는 아이는 그 둘째아들 김신(金信, 3)이다. 늙은 시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이 누운 그에게 이 빗돌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백범은 독립운동 기간 중에 혼례나 장례에 돈쓰는 것을 반대하였다. 형편도 어려웠지만, 능력이 된다 해도 독립운동으로 하루에 수십 수백의 동포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집을 잃는다는 비참한 소식을 들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장례도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동지들이 아내가 백범으로 인해 고생을 한 것은 곧 나라 일에 공헌할 것이라 하며 돈을 모아 장례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뜻에 맞아 선택한 사람
『백범일지』에 의하면 백범은 다섯 번 혼담이 있다가 여섯 번째에 결혼하였다. 백범이 네댓 살 때,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 김순영이 취중에 함지박장사 김치경에게 8, 9세 된 딸이 있는 것을 알고, 농담같이 청혼을 하였다. 김치경은 승낙하였고 사주까지 보내왔다. 아버님이 그 아이를 종종 집에 데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백범을 ‘함지박장수 사위’라고 놀려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심은 자식 혼인시키는 것이 유일한 일이 되었다. 백범의 부모님도 동학접주로 바쁜 19살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하지만 백범은 이 혼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뜻을 부모님께 한사코 말씀드렸다.할 수 없이 아버님은 김치경에게 자식이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혼약해제를 상의하였고, 그의 딸은 다른 곳으로 출가시키기로 하였다.
동학접주로 황해도 해주성 공격에 패한 백범은 동학을 토벌하던 안태훈 진사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평생의 스승 고능선을 만났다. 고능선은 백범이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 인물임을 알아보고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백범을 자신의 손녀와 혼인시키기를 원하였다. 백범은 청혼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무척 만족하였다. 그런데 김치경이 찾아와 훼방을 놓았다. ‘첩이면 모를까 정실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혼사에 말썽을 부리면 돈푼께나 얻으려니 했던 것이다. 그때 김치경은 이미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기로 한 상태였다. 일이 순조롭지 않음을 알고 ‘혼사는 단념하고 의리로만 선생님을 받들겠다’고 했지만 매우 섭섭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상중에 작은아버지의 농사를 열심히 도우니, 작은아버지는 돈 200냥을 주면서 인근 상놈의 딸과 혼인하라고 하였다. 상놈의 딸은 고사하고 정승의 딸이라도 재물을 따지는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형님이 없으니 당연히 조카를 결혼시켜야한다고 생각한 작은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27살 되는 해 정월에 백범은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다니다가, 먼 친척 할머니의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다. 삼십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는 할머니께 노총각 백범은 조건을 걸었다. ‘재물을 논하지 말 것. 상대자가 학식이 있을 것.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상이 끝나면 혼인하기로 하였다. 손수 책을 만들어 약혼녀 여옥을 가르치러 먼 길을 다녔다. 아버지의 상이 끝나자 어머니는 혼례준비를 하였다. 여옥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장감(長感)이었는데 산중이라 약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병세가 위중한 중에도 반가워하던 여옥은 며칠 뒤에 죽었다. 백범은 여옥을 염습하여 안장하였다.
청년 교육운동가 최광옥이 도산 안창호의 동생 안신호를 소개하였다. 서로 마음이 맞아 약혼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혼인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얼마 전 도산이 미국으로 가면서 상해에 들렀을 때 양주삼에게 안신호와 결혼할 것을 권했었다. 양주삼은 아직 학생이라 학업을 마친 후 결정하겠다고 하였는데, 하필 안신호가 백범과 약혼하기로 마음먹은 직후 양주삼으로부터 학업을 마쳤으니 결혼 여부를 알려달라는 편지가 왔던 것이다. 안신호는 양손의 떡이라 두 사람 중 누구를 택하고 누구를 버릴 수 없어서,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김성택과 혼인하기로 결정하였다. 몹시 섭섭하였다.
애국계몽운동에 열심이던 백범은 황해도 신천 사평동의 교회지도자인 양성칙 소개로 최준례를 알게 되었다. 최준례는 서울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언니와 함께 어머니 손에 자랐다. 언니가 제중원 의과생인 신창희와 결혼하고, 형부가 신천 사평동에 개업을 하자 준례는 어머니와 함께 언니부부를 따라와 사평동에 살고 있었다. 준례는 어려서 어머님이 정해준 혼처가 있었다. 하지만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롭게 결혼하겠다고 어머니의 명에 따르지 않아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선교사들이 강제로 출가케 하려다가 준례의 항의로 실패하였다. 그 때 양성칙이 백범에게 준례와 혼인할 의양을 물었던 것이다.
백범은 어려서 함지박장사 딸과의 혼담으로 고능선 선생의 손녀사위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컸고,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안신호와 혼담도 그랬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님이 정한 혼사로 인해 생긴 일들이었다.조혼에 대한 폐해도 절감하고 있던 백범은 준례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준례를 직접 만나 혼인을 약속하였다. 그러자 준례의 약혼자가 선교사에게 이를 고발하였고, 교회에서는 두 사람에게 혼인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백범은 준례를 집으로 데리고 와 약혼을 하고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교회는 백범에게 금지권고를 듣지 않는다고 책벌을 내렸으나 끝내 불복하였다. 교회가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사회악풍을 조장한다고 항의하였다. 그랬더니 교회에서 혼인을 인정하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최준례는 백범과 어려운 결혼을 하였다.
만장의 기염으로 호령
1911년 백범은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5년형을 받고 4년 8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일제가 신문하는 방법은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 가혹한 고문, 둘째 굶기기, 셋째 우대하기다.
채찍과 몽둥이로 난타하기, 두 손을 등 뒤에 포개고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아 질식시키고 냉수를 온몸에 끼얹어 숨이 돌아오게 하기, 화로에 쇠막대기를 즐비하게 늘어놓아 벌겋게 달군 후 온몸을 함부로 지지기, 손가락 크기의 능목(菱木) 세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나무 양끝을 노끈으로 동여매기, 거꾸로 매단 후 콧구멍에 냉수 부어넣기 등등이다.
일제가 신문을 할 때에는 음식의 양을 보통 수인의 반으로 줄여 생명만 유지하게 한다. 온갖 고문으로 온전한 살가죽이라고는 없이 감방에 던져질 때 다른 사람들이 사식(私食)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아내가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을 들여보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참기 힘든 것은 우대하는 것이다. 일제는 가혹한 고문과 굶기를 견딘 사람들을 우대하였다. 일본인만으로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있는 조선인들이 필요한데 당신 같은 사람이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점잖고 예의 있게 대우해주면 가혹한 고문과 굶기를 참아낸 사람도 그 술수에 넘어간다는 것이다.
백범은 모두 여덟 번의 신문을 받았다. 여섯 번째까지 매번 정신을 잃은 후에야 유치장으로 끌려왔다. 여덟 번째 신문 때였다.
‘토지를 사들인 지주가 논밭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백범은 ‘나를 논밭의 뭉우리돌로 알고 파내려는 너희들의 노력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며 기둥을 들이받고 정신을 잃었다. 백범은 15년형을 받았다. 1912년에 명치(明治)가 죽고, 1914년 명치 부인이 죽어 연달아 감형이 되었다. 곧 감옥을 나가게 되었다.
감옥에서 일제에게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일제에게 순종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석회질이 섞인 뭉우리돌이어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와 같이 바닷물에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백범도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자신도 석회질이 섞인 뭉우리돌이라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석회가 섞이지 않은 뭉우리돌이 되리라’는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白凡, 白丁凡夫)이라 고쳤다. 감옥 밖에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고통이 있었다. ≪신한민보≫ 1924년 2월 21일 기사다.
김구 씨 부인 최 여사의 장의, 파란 많은 망인의 일생 경력 상해 김구 씨의 부인 최준례 여사는 지난달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의식은 동 4일 오후 2시에 법조계 하비로 공무국 묘지서 기독교식에 의지하여 목사 조상섭 씨의 사회로써 상해에 있는 남녀동포가 많이 모여서 엄숙하게 거행하였는데, 일동이 모두 깊은 느낌의 얼굴로써 지내었고, 윤기섭 씨가 설명한 역사 중에 김구 씨가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서15년의 징역선고를 받은 뒤에는 김구 씨가 가출옥이 되기 전 4년 동안에는 안악군에 있는 안신여학교에서 선생이 되어 약간의 봉급으로써 늙은 시모를 봉양하나 또한 넉넉지 못하여, 교수한 여가에는 친히 동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삼동의 얼음 같은 찬방을 녹이고, 소생의 어린 딸 하나와 함께 삼대의 여인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즐거움 없는 세월을 보내었다는 말에 대하여는 회장한 일동의 눈에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풍파와 고초를 많이 당하고 쉬지 아니하며 분투하는 남편을 다시 만난 뒤에도 가난살림을 하든 일이며, 이번에 최 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김구 씨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이와 같으니 극히 검소하게 상례를 지내려고 결심하였으나, 많은 동지들의 권고와 주선으로써 창피치 않은 장례를 거행하게 된 것이라더라.
종전에는 시어머니 곽낙원과 며느리 최준례 사이에 충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백범이 안악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는5년 가까이 고부간에 서울과 황해도를 오가며 옥바라지를 하면서 일심동체가 되었다. 서울에서 지낼 때 최준례는 일제 토지국(土地局)이 운영하는 책 만드는 공장에서 고된 일을 하기도 하였다. 황해도 안악에서는 안신학교 교사를 하면서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기도 하였다.
아내는 종종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옥바라지하느라, 어린 딸과 어머니를 돌보느라, 서양여자가 공부시켜주겠다는 것을 못했다며 백범을 괴롭게 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늘 며느리 편을 열배백배 들었다.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으면 백범에게 불리한 일이 생겼다. 그래서 백범은 한 번도 집안일을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부부간에 싸움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최준례의 남편 김구
1945년 11월, 일제의 항복으로 환국하는 길에 백범은 상해 아내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1948년 아들 신을 중국으로 보내 몇몇 분의 유골을 국내로 봉안하였다. 중경에서는 이동녕·차리석 선생과 어머니 곽낙원, 28살 꽃다운 나이에 죽은 큰아들 인의 유골을 찾아왔다. 상해에서는 아내의 유골을 찾아왔다. 어머니와 아내,인을 정릉에 안장하였다.
1982년 세 분의 유골은 금곡으로 이장되었다.백범 서거 50주년인 1999년에는 곽낙원 여사와 김인의 유골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고, 최준례 여사의 유골은 효창원 백범 묘에 합장하였다. 75년 만에 임종을 앞둔 자신을 찾아오지 못했던 남편을 찾아온 것이다.
최준례는 1889년 3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열여섯에 백범과 결혼하여 서른여섯이던 1924년 1월 1일 이국땅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남편의 옥바라지와 망명생활을 빼면 십여 년에 불과한 삶이었다. 그 삶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일제에 쫓기고, 가난에 시달리면서 육신의 고통을 겪어야했던 시간이었다. 백범은 90여 년 전 최준례가 자신의 뜻에 맞아 선택한 사람이었다. 고능선 선생처럼 백범을 알아본 것일까. 김구의 아내 최준례가 아니라, 최준례의 남편 김구다. |
첫댓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은 어떻게 규정되고 인습은 어떤 굴레를 씌우는가? 백범 선생님 부부의 이야기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