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수 설교신학: 설교의 변화(2)
설교는 성경해석을 전제로 한다
IV. 메시지(Message)
위에서는 변화를 위한 설교에서 설교자를 거론했거니와 이제 메시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청중이 설교자는 접하는 통로가 된다. 메시지가 좋지 않으면 청중이 모이지 않는다. 많이 모이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왜 그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대게 ‘메시지가 좋아서’ 라는 대답을 한다. 메시지는 청중을 일단 끄는 요소이고, 메시지를 통해서 청중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 설교자는 어떤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해야 할 것인가?
메시지를 다룰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관이다(설교는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경적 설교는 성경으로 흠뻑 젖어들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전체 폭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Faris D. Whitesell은 성경적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성경적 설교는 설교의 형태나 전달방식보다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한다. 2) 성경적 설교는 성경에 제한을 그대로 따른다.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책의 한계 안에 즐거이 머물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무제한적 조망을 발굴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항상 흐르는 원천을 마시며 하나님의 생각을 전개함에 있어서 진리의 영과 함께 비상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16-17). 3)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활용한다. 4) 성경적 설교는 경건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감사하게 사용한다. 5) 성경적 설교는 성경이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로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교리적어야 한다. 6) 성경적 설교는 기록된 말씀 속에서 살아 있는 말씀(그리스도)를 발견한다. 7) 성경적 설교는 세상적인 인기나 보편적인 승인을 기대하지 않는다. Biblical Preaching, 16-18.). 설교자는 어차피 성경을 전해야 하는데 성경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르면 성경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다. 성경에 모순과 오류가 있다고 보는 설교자라면 성경을 전할 때에 확신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모순이나 오류가 발견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설교를 하지 않거나, 슬쩍 지나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오늘의 삶에 발판 정도가 된다고 보는 설교자라면 성경 본문을 읽어놓고 성경을 설명하지 않고 다른 얘기만 하다가 설교를 끝낼 것이다. 소위 뜀틀(springboard) 설교를 하고 말 것이다. 성경을 설교하지 않고 시류에 유행하는 사상을 전한다거나 심리학이나 경영학 리더십 이론을 전하면서 성경 본문은 맹장 정도로 다루고 말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하나님의 숨길이 들어간(God-breathed)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숨길은 창조의 능력이 있는 숨길이며, 부활의 능력이 있는 숨길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다. 여기 ‘생기’(루아흐)는 ‘숨길’(breath)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숨길’을 불어넣으셨을 때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창조적 숨길이 들어 간 책이다. 에스겔 37장 9-10절에 골짜기의 심히 마른 많은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그 뼈들이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부활의 ‘숨길’이 들어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히브리서 4장 12-13절도 이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때에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이러한 성경관이 없을 때에 설교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말만 하고 성경 말씀을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넣어두게 된다(이렇게 하는 것은 권위의 위기 시대에 시류를 타는 것이다. 헤돈 로빈슨은 권위를 위기와 설교자의 고민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회의 모멸--‘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라는 딱지가 붙은 박스 속으로 좌천당한 상태에서--많은 설교자들은 권위 문제로 씨름을 한다. 왜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목하겠는가? 우리를 믿어줄 신빙성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러한 풍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설교가 복음을 능력과 효과를 가지고 전달하는데 필요한 정당한 권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 (Raddon Robinson, "What Authority Does A Preacher Have Anymore?" in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Portland: Multnomah, 1989), 19.). 이러한 성경관이 없을 때에 설교자는 성경으로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소개함으로써 청중에게 감동을 주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런 말씀이 돋보이도록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을 설교하듯!”(Hybels)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창조의 생명을, 죽은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전하는 자세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개혁주의 성경관을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서 찾는다. 이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성경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사상만이 아니라 언어에 있어서, 전체만이 아니라 부분에 있어서, 성경이 다루는 역사와 과학 부분에서까지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 바른 성경관이다.
개혁주의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바른 것인데, 개혁주의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들이 성경을 실제로 생명의 책으로 강조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성경을 생명의 책으로 밝힌 다면 생명의 반응이 실제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는 것은 이미 설교의 정의에서와 성령과 변화에서와 설교자 부분에서 계속 거론해 오고 있다.
설교자가 올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올바른 설교를 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물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성경의 동시에 생활의 말씀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성경관을 다룰 때에 16-17절을 많이 강조하는데, 3장 전체 속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경관의 문제점이다. 개혁주의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생활 면에서 그렇다는 것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그 초두에 “고통하는 때”가 나오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여 부모를 거역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말씀이 나온다(3:1, 2, 5). 뒤이어 사람들이 정욕에 이끌어 간통을 하고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도 나온다(3:6-7).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이 이러할 것을 말씀하다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했다(3:13). 이것이 말세의 삶의 현실이다. 성경은 이런 종말론적 삶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라는 것이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전개하는 말씀의 요지이다. 성경은 험악한 생활 속에 들어가서 그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과 생활이 연결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 따로 있고 생활 따로 있으며, 성경을 전할 때에 가급적이며 삶의 현실을 덜 다루는 것이 더 경건한 것 같이 느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과거에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신문을 든 설교자는 세속주의적 설교자라는 매도를 당했는데, 성경의 말씀과 신문의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이 디모데후서의 성경관을 바로 깨달은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두 지평의 융합이라는 성경해석의 원리가 성경적 타당성을 발견한다. 흔히 보수주의적인 설교자는 성경만 설교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예화도 성경에서만 찾으라는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판이다. 서론과 본론과 결론과 설명과 예증과 적용과 논증까지 성경으로만 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설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설교를 듣고 난 청중은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몰라 “그래서 어쩌란 말씀입니까?(So what?)”이라는 반응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른 한편 진보주의적 설교자는 성경은 읽어놓기만 하고 시류적 사상과 현실적 이슈를 가지고 신문의 사설이나 텔레비전의 해설과 같은 설교를 한다. 성경 본문을 왜 읽었는지 알기가 힘들 정도로 본문을 거의 무시한다. 30분 설교에서 마지막 끝나기 전 약 5분간 그나마 성경을 대접해 주는 정도로 하기도 한다. 이런 설교를 듣고 가는 청중은 ‘저런 설교라면 교회에까지 와서 들을 필요가 무엇인가? 신문이나 읽고 텔레비전이나 보면 될 것인데. 청중은 오히려 설교자보다 시사 해설가가 더 전문가가 아닌가?“가 하면서 ”또 저런 소리야!(That again!)" 하는 반응을 보인다. 소위 보수주의적이라는 설교자와 진보주의적이라는 설교자가 다 문제가 있다. 양자가 성경의 지평과 생활의 지평을 융합시키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pell)은 성경의 본문을 강해할 때 타락한 상황에 초점(FCF, Fallen Condition Focus)을 맞추어야 할 것을 제의했다(Chapell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의했다. “본문정보(pre-sermon) → FCF 다룸 + 적실한 적용 =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 47).) 이것이야말로 디모데후서 3장의 성경관을 제대로 반영한 설교학 이론이다. 성경이 우리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서 그것을 바로 잡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41.) 설교자는 성경 본문을 놓고 FCF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본문이 타락한 인간의 어떤 문제를 지적하는가? 타락한 인간은 본문에서 어떤 면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의 말씀을 들고 다른 손에 신문이든 잡지든 책이든 아니면 그저 관찰한 현실이든 현실을 들고 둘을 녹여서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지평으로 성경의 지평을 변질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성경의 지평으로 현실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두 지평을 융합시켜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두 지평을 융합할 때 성경의 지평은 성경의 지평대로 글의 맥과 문학의 장르를 고려하는 문맥(文脈), 성경의 역사 문화 지리적 배경을 고려하는 사맥(史脈), 본문을 성경 전체의 흐름 면에서 보는 경맥(經脈),(헤돈 로빈슨은 달라스의 어떤 교회에서 요한복음 14장 설교를 한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로빈슨은 재림과 영혼 수면설 등 신학적인 문제를 충분히 연구한 다음 설교를 했는데, 설교 시작한 지 5분 만에 청중은 벌써 설교자를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설교 시작한 지 10분이 되었을 때 청중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중 앞 좌석의 한 사람은 코를 골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인가? 재림과 영혼 수면과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깊이 연구한 것은 좋았으나, 이제 곧 세상을 떠날 노인들이 많이 그 교회에서는 그런 설교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가 이렇게 접근했다면 좋았으리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집을 준비하러 가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자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2천 년 동안 집을 준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6일을 보내시고 그것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2천년 동안 준비하신 집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여러분이 인생의 황혼에 이르면 주님은 거기서 여러분을 맞이하시기 위해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Haddon Robinson, "Blending Bible Content and Life Application," in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Portland: Multnomah, 1989),56.) 본문을 성경의 저자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해하는 영맥(靈脈), 이런 맥을 잡아서 해석해야 한다. 문맥 사맥 경맥 영맥을 잡아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에 설교자가 성경을 바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현실의 지평을 분석하는 방법은 뒤에 청중 면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렇게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융합시키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작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융합할 때에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성경이 실제생활의 책이라고 했는데 다시 질문을 던져 놓고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성경이 실제적인 문제를 다룬 책인가? 그렇다. 모세 오경을 보라. 실제적인 생활이 아닌가? 역사를 보라. 실제적인 생활이 아닌가? 시서와 지혜서를 보라. 실제적인 생활이 아닌가? 예언서를 보라.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부딪히면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닌가? 복음서를 보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실제적으로 살면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비유설교가 얼마나 실제적이었는가? 서신은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권면이 아닌가? 계시록은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답변이 아닌가? 성경 전체가 실제적인 책이다. 그렇다면 성경강해라는 명목으로 실제적인 것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문법/문학적 의미, 역사적 의미, 신학적 의미를 다루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언자들이 모세오경을 사용할 때 그 의미를 따로 떨어뜨려 설명했는가? 그 역사적인 상황을 따로 떨어뜨려 설명했는가? 그 신학적인 의미를 따로 떨어뜨려 설명했는가? 모세 오경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생활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설교학이 상당한 반성을 해야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성경의 저자들은 신학과 해석학의 이름으로 공중에 뜬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생활에 뿌리를 내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두 지평의 융합이라고 할 때에 성경의 지평 따로, 생활의 지평 따로 해 놓고 연결시킨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지평으로 바로 생활의 지평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Fosdick는 소위 강해설교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했다. “가령 많은 설교자들은 소위 강해설교에 습관적으로 빠져 있다. 그들은 성경에서 한 본문을 선택하여 그 날 아침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에서 전진하여, 그 구절이나 그 장을 역사적인 배경으로 해설하는 데 반 시간 이상을 보내고 청중에게 몇 가지 실제적인 적용을 첨가한다. 이보다 더 지루하고 공허하게 되기로 확실히 예정된 과정이 있을 수 있는가?” (29-30). Fosdick은 주제설교(topical preaching)에 대해서는 더 냉혹한 비판을 가했다. 주제설교는 설교자가 주제를 선택해서 하는 것인데, 설교자가 선택한 주제는 성경본문보다 청중의 실제적인 관심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31).)
설교자가 올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두 지평을 융합하는 메시지를 전하되 성경의 본질에 따라 이야기 설교를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경의 본질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생활 이야기(대부분 실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조직신학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요즈음 이야기 설교(사람들이 이야기 설교를 듣기 좋아하는 것은 이야기 설교자가 인간 본성을 잘 알아서 항상 청중과 관련된 청중의 이야기를 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야기 설교를 듣는 것은 그것이 공상적이고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자기 자신들의 필요와 형편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야기를 포착해서 그것을 그 이야기, 즉 좋은 소식과 신앙의 역사와 연결시키되 개인이 문제들을 풀고, 삶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자원들을 발견하고 신앙의 계속적인 이야기에 기여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John Killinger, Fundamentals of Preaching (Philadelphia: Fortress, 1985), 30. ) 혹은 네러티브 설교가 유행하는 것(1980년에 갑자기 이야기 혹은 네러티브 쪽에서 '신설교학‘의 새로운 방향이 나타났다. Union 신학교의 은퇴한 설교학 교수 Edmund A. Steimle, Preaching the Story(자신의 graduate student 두 명과 함께: Morris J. Niedenthal, Charles L. Rice) (Philadelphia: Fortress, 1980). Eugene L. Lowry(St. Paul School of Theology in Kansas City, Missouri): 설교는 fictional stories가 아니라 experiences. 단계: 1) upsetting the equilibrium(Oops, 아이쿠: 삶이 이러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음), 2) analyzing the discrepancy(Ugh우: 혐오, 경멸, 공포: a diagnosis of sin), 3) disclosing the clue to the resolution(Aha 아하, revelation of a surprise), 4) experiencing the gospel(Whee,야아: 적극적인 제시), 5) anticipating the consequences(Yeah, 정말, 예스: apply the insight to future living) (The Homiletical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Form [Atlanta: John Knox, 1980], 25). Richard A. Jensen, Telling the Story: Variety and Imagination in Preaching (Minneapolis: Augusburg, 1980).) 같은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 ‘예스’와 ‘노’의 평가가 다 필요하다. ‘예스’라는 것은 일단 성경의 여러 부분이 이야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고 ‘노’라는 것은 자칫하면 설교가 실존주의적 주관주의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이 분명히 삶의 이야기로 하나님의 계시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부분과 전체에 있어서 그 메시지가 선명하다. 소위 이야기 설교와 함께 ‘귀납적 설교’ 방법에서처럼 설교 자체에서 선명한 메시지를 주지 않고 청중이 알아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과 다르다(이연길, <이야기 설교학> (쿰란). Joel B. Green, Michael Pasquarello, Narrative Reading, Narrative Preaching (Baker, 2003).)
설교 메시지가 이야기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요즈음 이상한 현상이 같이 발생하고 있다(설교가 유흥이 되면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다 (Lim, Power in Preaching, 13). ) 그것은 설교가 구수한 만담 형식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물론 적절한 유머는 있어야 하고 유머가 주는 효과도 많다(‘웃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 것이다’는 말이 있다. 불일치를 볼 수 있는 사람, 항상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이 건전한 유머 감각이 있다. 웃음은 비판을 말라버리게 하고 수용성을 늘여준다. 그러나 웃음에 취한 사람은 경박해지기 쉽고 모든 것을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게 하기 쉽다. 자연스러운 웃음, 적절한 웃음은 해가 없고 우울은 덕이 없다. Ralph L. Lewis, Speech for Persuasive Preaching (Berne, Indiana: Economy Printing Concern, 1968), 23-24.). 유머는 일단 설교를 지루하지 않게 하고, 청중의 마음 앞에 놓인 바리케이드를 치우게 하고, 메시지가 마음 속 깊이 새겨지게 하는 등 좋은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Walter J. Burghardt는 Elton Trueblood, Thu Humor of Christ (San Francisco: Harper &Row, 1964); Joseph A. Grassi, God Made Me Laugh: A New Approach to Luke (Wilmington: Machael Glazier, 1986) 등 그리스도와 복음서의 유머 연구를 언급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웃음은 신체 뿐 아니라 영혼에 양약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고도의 상상력의 복잡한 피조물에게 좋은 약이다. 강단에서 웃음을 추방하는 것은 우리를 짐승과 구분하는 것이 분석적 추리력뿐 아니라, 우리만 진정으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Preaching: The Art and the Craft (New York: Paulist Press, 1987), 171.) 그러나 지나친 유머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는 것은 상당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유머는 설교를 경박하게 하고 설교자를 가벼운 사람으로 보게 하며, 진지하고 심각한 메지지는 아예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고, 설교를 유흥 위주로 이해하려고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이와 반대로 설교가 권태로워서도 안 된다. 스튜아트 브리스코는 한 동안 시리즈 설교를 할 때 매마른 설교가 되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빨리 그 시리즈를 빠져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시리즈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브리스코는 그럴 때에 자신이 피곤해서 그런지, 자신이 성경에 매력을 못 느껴서 그런지 등을 체크하면서 대화를 통해서 그런 문제를 푼다고 했다. 대화를 하면 자신이 현실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흥미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남들이 흥미로워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꾸준히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Stuart Briscoe, "Filling the Sermon with Interest," in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Portland: Multnomah, 1989), 74-75,) 텔레비전에서 유머 중심의 설교자가 스타로 등장하게 되면 그런 설교를 좋아하고 그런 설교에 익숙해진 청중은 진지한 설교를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 유흥(Theological entertainment)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성경적 설교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성경적 설교가 설 자리를 잃으면 교회가 죽는다. “성경적 설교의 부족은 교회의 사망 통보”이기 때문이다(Carson). 그렇게 되면 유흥 설교로 “교회 좌석은 꽉 차 있는데 설교는 텅 비어 있다”(Os Guinnes). 성경은 이런 것을 미리 경고해 두었지만, 요즈음 설교자들과 청중은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나 하는 듯이 가볍게 넘기는 마는 것 같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마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성경은 설교자들에게 개그맨이나 영화감독이나 심리학자나 마케팅 전문가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다(딤후 4:1-5).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문가이지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만담가가 아니다(Edmund Clowney). 모든 설교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보여주려고 애쓰되(Fabarez) 과도한 유머는 삼가야 한다.
설교자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유머를 통해서 설교를 가볍게 하고 설교를 가볍게 듣게 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 한다. 설교자는 동시에 설교 메시지가 알아듣기 쉽도록 해야 한다. 설교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헤돈 로빈슨은 위대한 운동선수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운동을 더 잘 하게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스포츠 스타들이 아니라, 그들은 보통 사람들을 스타 팀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거성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빈슨은 세상의 커뮤니케이션 거성들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배운다고 했다. 그는 그들을 통해서 감동과 도전과 교훈을 받는다고 했다. Haddon Robinson, Making a Difference in Preaching, ed. Scott M. Gibson (Grand Rapids: Baker, 1999), 116.)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청중으로 잘 알아듣게 하는 사람이다. 일단 설교가 알아듣기만 쉬워도 청중은 설교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CNBC 회장으로 3차례나 대통령을 당선시켜 준 정치 미디어 전문가 로저 아일즈(Roger Ailes)는 당신이 텔레비전 프로듀서라면 당신 자신을 게스트로 초청하겠는가 하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You Are the Message: Getting What You Want by Being What You Are (New York: Doubleday, 1988). )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연사인 당신을 ‘지루해/ 그런 대로 괜찮아 / 재미있어/ 기억할만해/ 다시 초청할만해’ 중에서 어떤 것으로 평가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로저 아일즈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커뮤니케이션 4대 요소를 제시했다. 그것은 1) 준비해서 하라, 2) 편안하게 하라, 3) 열정으로 하라, 4) 흥미롭게 하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메시지에 준비, 평안, 열정, 흥미 등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Calvin Miller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Empowered Communicator: The Keys to Unlocking an Audience [Nashville: Braodman &Holman Publishers, 1994], 13). )
설교는 케큐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인데 말로 된 커뮤니케이션이다. 글로 된 케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설교는 구두성(orality)이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말로 할 수 있는 메시지를 작성해야 한다. 설교는 읽고 듣는 것이 아니고 말하고 듣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 원고를 다 외우지는 못해도 거의 다 외워서 설교를 말로 해야 한다. 설교자가 청중과 눈 접촉(eye contact)를 하면서 표정과 온 몸으로 말을 할 때 청중은 쉽게 알아듣고 감동을 받는다(Ralph L. Lewis는 말과 글의 문체상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말: 당장 알아들을 수 있음, 더 많은 서스펜스, 더 직접적, 더 많은 비교/대조, 더 많은 직접 화법, 더 생생함, 더 많은 클라이맥스, 더 많은 반복, 더 많은 동사. 글: 더 많은 리듬, 더 많은 질문, 더 많은 능동태,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동작, 더 많은 인겻성, 더 많은 진지함, 더 많은 부드러움, 더 다양함. Speech for Persuasive Preaching (Berne, Indiana: Economy Printing Concern, 1968), 224. )
보통 설교하기에 좋은 설교가 읽기에는 나쁘고 읽기에는 좋은 설교가 설교하기에는 나쁠 수 있다(Philips Brooks, Lecturess on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1969), 108). 루터와 웨슬리의 설교가 듣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설교로 들었지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시체와 같은 글이 되었다(Lowell O. Erdahl, Preaching for the People (Nashville: Abingdon, 1978), 57.).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이 글로는 덤덤할 수 있고 글로 살아 있는 것이 말로는 덤덤할 수 있다(Edward F. Markqart, Quest for Better Preaching: Resources for Renewal in the Pulpit (Minneapolis: Augsburg, 1985), 193.). 청중과 눈 맞추면서 말로 설교하다가 갑자기 인용구를 두 세 문장 읽으면 설교가 죽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설교자가 문어체로 된 설교를 무게 있게 글로 읽으면 그 메시지가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 효과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글로 전달할 때는 마침표와 쉼표와 느낌표와 물음표 등을 글로 표현할 수 있지만, 말로 하는 설교는 그것을 글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을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글로 전할 때는 못 알아볼 경우 다시 돌아가서 다시 읽을 수 있지만, 말로 할 경우 청중석에서 다시 테이프를 뒤로 돌려서 들을 수가 없다. 후에 카세트테이프로 들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일단 설교를 듣는 동안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지나간 부분을 다시 듣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다른 메시지는 계속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말이라는 것을 감안할 줄 아는 설교자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반복적인 표현이나 표정이나 제스처를 통해서 글로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을 충분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가 말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감각호소(sense appeal)에 유의해야 한다. 감각호소라는 것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오관을 이용해서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를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감각으로 호소하면 설교는 듣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 만지는 것, 맛보는 것, 냄새 맡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비유 설교가 이런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강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자체가 설교 강단이었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많은 것들을 동원해서 설교를 하셨다.
감각호소를 잘 하면 이미 서론에서 청중을 사로잡는다. 서론은 청중이 떨면서도 기뻐하게 하는 수갑이 된다. 훌륭한 연사들은 다 감각호소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가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식으로 감각호소를 했다.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어려움을 보지만,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말틴 루터 킹은 1963년 링컨 기념관에서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I have a dream!) ”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닐 암스트롱은 1969년 7월 20일 달 표면에 발을 디디면서 “그것은 인간에게는 하나의 작은 스텝이고, 인류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도약입니다.”고 했다.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1968년 6월 8일 성 패트릭 성당에서 작고한 형님의 연설문 일부를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왜?’라고 말하지만 나는 없는 사물들을 보면서 ‘왜 안되는가?’(Why not?)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V. 청중(Audience)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설교자와 메시지 면에서 살펴보았거니와 이제 청중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청중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다. 청중이 귀가 멀다면 교회는 죽어 있다. “귀 먼 교회는 죽은 교회”(A deaf church is a dead church)인 것이다. 청중이 귀가 멀지 않도록 해야 설교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청중의 귀가 멀지 않고 설교를 경청하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
중세설교의 전형이 지식설교(scholastic sermon)이었다. 지식설교는 생활의 변화보다는 진리의 파악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중세의 지식설교에 현대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31권으로 된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1996)과 23권으로 된 Pulpit Commentary (Peabody: Hendrickson, 1985) 등에도 Braodus와 같은 대지가 그대로 나온다.). 브로더스(Braodus)가 1870년에 초판으로 출간된 설교학의 고전 <설교의 준비와 전달>(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에 지식설교의 전형적인 구조가 예시되어 있다. 이사야 6장 1-8절 본문을 두고 브로더스는 이렇게 대지를 제시했다:(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59.). 1) 청년의 하나님 비전, 2) 청년의 죄악 비전, 3) 청년의 사죄 비전, 4) 청년의 봉사 비전.
시드니 그레이다너스(Sidney Greidanus)는 이런 지적을 했다. “진정한 적실성이 없다면 설교는 없다. 지금 여기에서 적용해 주는, 교회적 적실성이 설교 준비의 최종 목표이다.”(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157.). 그레이다너스의 이런 지적에 근거해 볼 때 위의 구속사적 설교자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위에 언급한 설교는 적실성을 살리지 못한 설교였다. 적실성을 살릴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적실성을 살릴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중세적 지식설교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수정된 지식설교의 모형을 따랐다. 청교도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설교를 보면 그 대지가 항상 이렇게 제시된다: 1) 본문, 2) 교리, 3) 용도, 4) 적용.
청교도 설교자는 제일 먼저 본문을 해설하고 다음에 본문에서 추출된 신학적인 교리를 설명한다. 청교도 설교자는 이어서 그 교리의 용도를 3인칭 주어로 제의한 다음 최종적으로 2인칭 주어로 삶의 적용을 제시한다. 청교도 설교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교리를 가슴으로, 진리를 생활로 옮기는 적용을 하는 것이다(William Perkins, The Art of Prophesying (1592 초판;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6), 79.)
요즈음 유행하는 제자훈련의 Q.T.(D형)와 제자훈련의 모델에 따른 설교도 청교도 설교의 수정 모형으로 볼 수 있다. 먼저 본문 관찰을 한 다음 본문에 대한 연구와 묵상을 한 후 본문에 대한 느낌을 제시한 후 최종적으로 적용과 결단을 밝힌다. ‘본문 관찰’은 청교도 설교의 ‘본문’에 해당되고 본문의 ‘연구와 묵상’은 청교도 설교의 ‘교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대한 ‘느낌’이 청교도 설교의 ‘용도’에 걸맞지는 않지만, ‘적용과 결단’은 청교도 설교의 ‘적용’에 해당된다.
한국교회 설교자는 보통 3대지 설교를 하면서 각 대지마다 본문 해설을 한 후 적용을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 바랍니다’ 하는 식으로 설교를 마감한다. 이런 식의 적용을 할 경우 각 대지에서 한 적용은 못 박는 것으로 하면 한 번 탁 치는 것으로 지나가는 것이 되기 쉽다. 한 번 쳐서 들어가는 못은 거의 없다. 3대 설교를 하는 동안 각 대지에서 한 번씩 도합 3번 못을 박지만 못은 결국 안 박히고 튀고 만다. 설교자가 결론에서 ‘... 바랍니다’고 하면서 못이 박힌 줄로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착각인 경우가 많다. 설교가 끝나고 난 후 청중은 무엇을 들었는지 무엇을 생활에 옮겨야 할지 모른 채 예배당을 떠난다.
이런 식의 3대지-3적용 설교에 비해서 제자훈련식 설교는 적용을 뒷부분을 몰아서 못이 박힐 때까지 못을 박음으로 결국 못이 박히게 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설교를 듣고 나가는 청중은 무엇 하나를 잡고 실천해야 하겠다는 각오로 예배당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청교도 설교든, 제자훈련식 설교든, 3대지-3적용 설교든 본문 해설과 적용이 구분되어 있다는 문제점을 다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설교의 처음부터 해설과 적용이 씨줄과 날줄처럼 짜이지 못했다는 문제점이다. 예수님의 비유 설교와 바울의 설교를 보면 이런 문제점이 두드러진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설교할 때에 비유의 이미지 부분과 내용 부분이 처음부터 융합되어 있다. 예수님을 비유를 듣는 청중은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를 이미지와 내용을 통해서 같이 들은 것이다. 바울 서신을 바울의 설교로 전환해서 생각해 본다면 바울은 서신의 앞부분에서 교리를 전하고 뒷부분에서 생활을 전했다. 그렇지만 바울이 교리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청중에 대한 적실성을 잃지 않고 생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교리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해설과 적용의 양 구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설 부분에도 적용이 짜여져 있고 적용 부분에도 해설이 짜여져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 자체가 적용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는 설교 전체도 적실성을 드러내야 한다. 설교의 서론부터 본론과 결론 전체가 성경과 생활이 융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이 아담스(Jay Adams)는 설교의 이런 혁신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Jay Adams, Truth Applied (Grand Rapids: Zondervan, 1990), 85.)
설교자의 진정한 설교 이론과 실제가 가장 선명하게 분별될 수 있는 것은 메시지의 포맷이다. 그가 어떻게 설교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그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많이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가 설교에 대해서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설교 재료를 조직화 하는가 하는 데에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설교가 적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설교자들은 설교 포인트들을 적용을 위해 조직화 한다.
아담스는 설교 전체가 적용이라고 보고, 설교 포맷이 본질상 적용 포맷이라고 본 것이다(Jay Adams, Preaching with Purpose, 54.) 설교의 포맷을 단순히 설교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설교의 적용을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설교와 청중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다. 설교의 대지 구분이 본문의 대지 구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설교의 대지 구분을 적용적 대지 구분으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반문을 던질 수 있다.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 설교(눅 4장)가 이사야 61장의 대지 구분을 따르는 설교였는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장)가 요엘 2장의 대지 구분을 따라가는 설교였는가? 바울의 안디옥 회당 설교(행 14장)는 성경 어느 본문의 어떤 대지 구분을 따라가는 설교였는가? 본문의 대지 구분을 따라가는 것이 성경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설교자들은 성경 속에 나오는 설교자들도 특정한 성경 본문의 대지 구분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청중에게 적실한 내용이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도 그랬고, 바울의 안디옥 회당 설교도 그랬다.
설교자가 본문의 대지 구분을 따라가야 한다는 설교자의 주장에 대해서 아담스는 적절한 반문을 제기한다. 잠언은 의인과 악인의 대조 속에서 2구분 메시지를 전하니까, 잠언 설교자는 항상 2대지를 사용해야 하는가? 요한복음은 빛과 어두움, 진리와 비진리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까, 요한복음 설교자는 2대지 설교를 해야 하는가? 계시록은 7구분을 자주 사용하니까, 계시록 설교자는 7대지를 만들어야 하는가? 성경 어느 본문이 “자연스럽게” 항상 3대지로 구분되기에, 설교자가 거의 대부분 3대지 설교를 하는가? 아담스는 ‘더 성경적인’(more biblical)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성경 본문의 대지 구분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오히려 ‘덜 성경적인’(less biblical) 설교를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Adams, Preaching with Purpose, 56-57.)
청중에게 적용이 잘 되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청중분석을 해야 한다. 현대의 청중은 누구나 ‘감기사장’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감’은 감성을 말하고 ‘기’는 기술을 말하면 ‘사’는 사람을 말하고 ‘장’은 장소를 말한다. 현대는 패션(fashion)과 느낌(feeling)과 재미(fancy, fun), 이렇게 3F의 ‘감성’의 시대라고 한다. 현대는 디지털(digital), 디자인(design), DNA, 이렇게 3D의 ‘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의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네트워크(human network, know-where)를 형성해서 살고 있고, 고객이 100명이면 전략 100개인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인은 ‘장소’의 이동성이 강하다. 소위 SOHO족이라고 해서 작은 사무실, 가정 사무실에서 일한다. 인터넷을 통해서 어디서나 서로 통화하고 연결할 수 있는 Ubiquitous(유비쿼터스)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즈음은 ‘사무실’을 ‘四無室’이라고 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설교자는 이런 시대의 청중을 잘 파악하고 이런 청중에게 적용할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Graham Johnson은 요즈음의 후현대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 객관적 진리 거부, 2) 권위에 대한 회의, 3)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시대, 4) 도덕적인 오염, 5) 초월의 추구, 6) 미디어에 미친 세상, 7) 알면서도 능글맞게 웃는 시대, 8) 공동체 추구, 9) 물질적인 세계. Preaching to a Postmodern World (Grand Rapids: Baker, 2001), 23-59 ).
설교자가 청중을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책을 읽어서 청중을 파악하고 삶을 ‘읽어서’ 청중을 파악한다. 심방과 제자훈련과 상담을 통해서 청중을 파악한다. 청주중의 반응(feed-back)을 통해서 청중을 파악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설교자들은 유익을 보기 위해서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을 듣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답변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관찰해야 한다. 필요(표현되었건 표현되지 않았건, 인정하든 부인하든), 체험, 태도, 관심 등.”(Haddon Robinson, Making a Difference in Preaching, 131) 설교자가 어떤 방식을 통해서건 삶의 접촉을 통해서 청중을 파악해야 한다.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Willowcreek Community Church)의 경우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가 부교역자들에게 테니스를 칠 때도 불신자들과 치게 한다고 한다(빌 하이벨스는 설교의 제목도 딱 보면 듣고 싶은 것, 즉 현대의 청중에게 매력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God Has Feelings, Too." "Turning Houses into Homes." "Telling the Truth to Each Other." "Fanning the Flames of Marriage." "Endangered Characters of Qualities." "Alternatives to Christianity." Bill Hybels, "Speaking to the Secularized Mind," in Bill Hybels, Stuart Briscoe, and Haddon Robinson, Mastering Contemporary Preaching (Portland: Multnomah, 1989), 32, ) 부교역자가 교인들과 테니스를 치면 교인들이 ‘신앙인의 체면’을 보이기 때문에 청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와 치면 상대방이 교역자인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대로의 반응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아주 자연스러운 청중 분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에 민감해야 한다. 신학교 채플에서 설교하는 경우와 기독실업인회에 가서 설교하는 경우 청중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설교라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신학교 채플에서 설교할 때는 앞부분에서 본문을 설명하고 뒷부분에서 적용을 시도할 수 있지만, 기독실업인회에서 설교할 경우 그 순서를 뒤바꾸어야 효과가 있다. 기독실업인회의 청중은 신학생들과 달라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신학생들보다 훨씬 더 적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경 설명을 먼저 하면 그 동안에 흥미를 잃고 졸 가능성이 많다. 그들에게 적용을 먼저 하면 적용은 일단 삶의 얘기이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듣게 된다. 그렇게 해서 흥미가 유발된 후에는 성경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같은 교회 청중이라 할지라도 주일 대예배(편의상 부름)와 오후예배와 금요기도회와 심방예배의 경우 설교를 다른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 주일대예배의 경우 서론에서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말씀을 반드시 해야 하지만 오후예배와 금요기도회의 경우 그런 서론이 거의 필요가 없다. 대게 성경 한 권을 정해서 순서대로 진행하는 강해설교를 그 때 하게 되는데, 그 때 참석하는 교인들은 주일대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경에 대한 관심도와 주님과 교회에 대한 헌신도가 훨씬 더 높기 때문에 서론이 없어도 들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이다. 심방예배의 경우 서론, 본론, 결론의 공식적인 틀이 거의 필요가 없다. 그 가정의 형편을 물어서 청중분석을 한 후 거기서부터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성경으로 들어가서 성경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 아주 구체적으로 그 가정에 적용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설교는 PMA-ST다. 설교자가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설교자는 성령에 영향을 받은 삶과 맘과 말을 통해서 성령에 영향을 받은 메시지를 성령의 영향을 받은 청중에게 전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을 닮은 삶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성경은 생명의 책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성경을 설교해서 생활의 현장에서 생명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설교는 생명의 말씀을 생명력 있게 전한다는 차원에서 ‘생생(生生) 능력’을 전하는 것이고, 성경을 생활과 연결하여 생활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차원에서 ‘생생(生生)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의 설교자 바울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우리의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는 청중에게 전해서 “주를 본 받는 자”가 되는 삶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처럼 성령(Spirit)의 능력으로 성경(Scripture)을 전해서 생명(Life)과 생활(Life)의 능력과 변화를 유발하는 과제, 이것이 오늘의 설교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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