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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둘째이모- 둘 째 이모부 > 언니/오빠/남동생
셋째 (우리엄마)- 아빠 > 나
막내이모 - 막내 이모부 >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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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네는 둘째 이모네와 우리가족 그리고 막내 이모네 이렇게 세 가족으로 이루어져 까치마을과 하얀마을에 20년을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까치마을과 하얀마을은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되는 5분 거리의 이웃동네다. 우리 가족은 서로 각자의 신앙심이 어떻든 함께 같은 교회를 20년 넘게 다녔고, 예배가 끝나면 둘째 이모네의 거실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보곤 했다. 군대에 있는 사촌 동생에게 부대카페에 가입하여 편지를 쓰라는 둥, 막내 이모의 딸 s에게 삼수는 잘 하고 있냐는 둥 하는 걱정과 잔소리를 넘나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가족의 끈끈함은 함께 역경을 헤쳐가면서 더해졌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유방암 투병을 했는데 그 때 입원을 하면서 나는 둘째 이모의 집에 맡겨졌다. 털털한 이모는 어떤 위로의 말 대신 내 밥숟가락에 가시를 바른 조기살을 올려주며 “가시내, 정이 닮아 입이 짧아서 안되겠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옆에선 이모부가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라.”라고 하면서도 혹시나 남의집 밥상 앞에서 풀이 죽어있는 걸까 걱정하며 나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상아는 학교에서 인기 짱이라며?”라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했다. 밥 숟가락 한 입 가득 쑤셔 넣으며 “뭐래, 이모부.”하고 인상을 팍 쓰며 그에게 한 최초의 반말. 그는 껄껄 웃으면서 나를 혼내지 않고 ‘상아는 씩씩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을 거’라고 했다. 내가 씩씩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친척오빠와 옷걸이를 무기삼아 ‘구미호전 놀이’를 하며 온집안을 헤집어놓고, 친척동생이 까분다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 동생에게 ‘뻐큐’라는 욕을 알려주면서도 검지손가락으로 잘못 입력한 녀석의 학습을 정정해주지 않은 기억은 난다.
2020년 새해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채 안되서 자주 껄껄 웃던 둘째 이모부가 죽었다. 사인은 심근경색, 갑작스러운 객사였다.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본 이모부의 마지막 모습은 고통스러운듯 가슴을 감싸쥐고 다른 손으로 허공을 움켜잡으며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소지품을 건네받은 이모는 다시금 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부대에서 나온 친척동생은 아빠의 손을 잡으면서 울부짖었다.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친척오빠도 이모부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았다. 정신을 차리고 이모를 부축하며 그곳을 빠져나오니 이모부의 유품이 들어있던 검은색 비닐봉지가 어느샌가 내 품에 들어와 있었다. 이모가 떠준 초록색 목도리와 그 속에 남아있는 이모부의 진한 향수 냄새. 부정할 수 없이 그의 것이었다.
대만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친척언니도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갑작스럽게 귀국했다. 타지에서 그런 일을 들은 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무슨 정신으로 비행기를 타고 그 시간들을 견뎠을까. 언니는 짐정리도 채 마치지 못하고 장례식장에 들어와 상복을 입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지 이모부의 영정사진을 멍하니 보던 언니는 모두가 한사코 말렸지만 이모부의 주검을 보러 영안실로 내려갔고 곧이어 눈물을 쏟으며 이모와 함께 올라왔다. 오빠는 이모부의 핸드폰 연락처를 통해 지인들에게 이모부의 부고 소식을 알렸다. 사람들이 화환을 보내왔다. 그의 생전 화려했던 커리어답게 화환은 층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러면 뭐하나, 그는 이것들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보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례식은 정신없이 치뤄졌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손님이 너무 많았고 너무 바빴고 인사를 하기 위해 장례식장 구석에 딸린 방에서 쪽잠을 잤고.. 그래도 나는 이모보다, 언니오빠보다 동생보다 힘들지는 않으니까. 열심히 육계장을 퍼나르고 한상 가득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갑작스러운 죽음. 나는 이 상황이 어쩐지 익숙했다. 막내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이모부의 임종과 장례식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암 말기였다. 병원에서도 더이상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모부가 통원치료를 했을 때 부터 이모부에게 수학과외를 받았는데 점점 수척해지고 핼쑥해지는 그의 얼굴과 몸을 보며 죽음이 사람을 어떻게 집어삼키는지 똑똑히 보았다. 이모부는 뼈 밖에 남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맸다. 막내 이모 혼자 말기암 환자의 병수발을 들기에 친척동생은 고작 초등학생 1학년이었고 많은 돌봄이 필요했다. 둘째 이모와 이모부는 막내 이모에게 차라리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막내 이모는 둘째 이모의 도움을 받으며 친척동생을 학교에 등교시키고 자신의 남편도 돌보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엄마아빠도 틈날 때마다 들러 이모와 이모부에게 나들이를 시켜주고 뼈밖에 남지않은 그의 다리와 팔을 주물렀다.
막내 이모부가 숨을 거두던 날, 나는 파주영어마을에 있었다. 영어마을에서는 학생들의 핸드폰을 걷고 외부로부터의 연락을 차단했는데 그 이유는 기억이 잘 안난다. 아마 이곳은 더이상 한국이 아니고 ‘영어마을’이므로 영어를 사용하라는 어이없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죽음을 처음 경험하는 내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봐 내게 알리지 않았다. 내가 영어마을에 오고 삼사일 지나 공중전화로 전화하여 엄마에게 잘있냐는 인사를 건내자 엄마는 소리없이 눈물을 훔치며 이모부가 돌아가셨노라고 이야기를 전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 외국어처럼 단번에 입력이 되지 않았고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려 전화를 끊고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서야 이해가 되었다.
주어 ‘이모부’가, 술어 ‘죽었다.’.
나는 갑자기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원어민 선생님이 들어와 나에게 왜 우냐며 물었지만 나는 그 죽음을 입밖으로 꺼내면 더 실감이 날까봐 더 크게 울 뿐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는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둘째 이모부는 작은 사업체를 하고 있었고 그게 이모부가 남긴 전부였다.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상속이 얼마나 갑작스러운 일인지, 가족과 회사는 거의 패닉에 빠졌다. 아빠는 그 사업체에서 물류창고 소장으로 일했는데 그의 직책은 물론 이모부가 제안해준 것으로 분에 넘치는 직책이었다. 아빠는 물류학과를 나오지도, 유통과 관리 시스템과 실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냥 직원들이 제역할을 해내는지 지켜보는 바지’소장’이었다. 그래도 아빠가 큰그림을 보지 못할 정도로 아예 무식한 사람은 아니어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과의 수입, 수출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며 당장 이모부의 부재로 인해 영업도 어려울테니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실무를 잘 못하는 아빠에게 직원들의 불만이 제일 많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을 아빠는 몰랐다. (어쩌면 정말 ‘무식’했는지도) 정작 자신의 아이디어에 정리해고 대상이 된 사람은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악평을 받은 아빠, 본인이었다.
대표이사 자리를 맡게된 가정주부 30년차 이모는 머리가 터지게 이 사안을 정리했을 것이다. 아빠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사정을 들어도 보고 말려도 보고. 하지만 아빠가 그만두지 않으면 자기들이 그만두겠다는 여러 장의 사표들 앞에 이모는 어렵게 아빠에게 한마디 한마디 입을 뗐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얼마나 괴롭게 결정을 내렸는지와 상관없이 아빠는 딱잘라 ‘앞으로 죽어서도 보지 말자’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엄마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울며불며 악을 썼다. 나는? 나는 분노가 일었다. 그게 아빠를 해고한 이모로부터 오는 분노인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아빠로부터 오는 수치심인지 모르겠지만. 며칠 뒤 친척오빠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러니까 이모는 이모부가 다시 회사를 다녔으면 좋겠다는 거지?’ 울며불며 악을 쓰는 엄마를 예상못했다는 듯이 오빠는 상황을 다시 되돌려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마음을 알면서도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분노를 터뜨릴 사람이 필요했고 엄마의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오빠 말처럼 이 일이 그렇게 손쉽게 돌이켜질 수 있을 것 같냐, 우리도 자존심이란 게 있다, 남남이어도 이렇게 절차없이 사람을 자르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아빠에게 해명의 기회는 줬어야지, 정리의 시간을 줬어야지,하고. 우리 가족이 느끼는 굴욕감과 수치심, 배신감과 분노를 오빠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며 소리를 질렀다.
가족 내에서 아빠의 위치가,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 신뢰가 바닥난 것 모두 다 아빠 탓이기는 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아닌가. 하지만 그런 객관적인 평가가 내게도 상처가 됐다. ‘그런’ 아빠를 뒀다는 것이, 나의 아빠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둘째 이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차라리 네 아빠가 죽었으면 했다.’고 막내 이모는 울며 내게 말했다. 이모부가 얼마나 막내 이모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힘들고 믿을 수 없어서 한 말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말을 두고두고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말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됐다며 사과를 받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너무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질적이었던 아빠의 습관적인 외도와 경제적인 무능력, 그리고 게으름. 이때문에 얼마나 그들의 자매인 ,나의 엄마가 고생을 했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리라. 딸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면 뭐하나 아빠가 생활비 대출을 받는데. 4년 내내 장학금을 탔는데도 아빠 덕분에 내 이름으로 된 학자금만 천만원이 넘는다고 하면, 이모는 사과조차 하지 않으려나. 아니, 이모도 알고 있으려나. 하지만.. 그래도..그렇더라도.. (뻔한 말이지만) 우리 아빤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았다. 그들과 절연을 했다. 서로가 받은 상처가 커서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더이상 가족이 예전의 모습으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사람과 세상을 예전만큼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내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슬픔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펐다. 애도할 수 없는 상황.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기에, 남겨진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할 수 없다니. 내게 어울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미움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슬펐고 분노했고 멍했고 망연자실했다.
꿈에 자꾸 잊지못한 얼굴들이 나온다. 눈물을 흘린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베개를 적신 눈물이 뜨거워 잠에서 깬다. 그 얼굴들이 미우면서도 그들이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는 아프지 않게, 살아가고, 살아내고.
언젠가 다시 만나 얼굴을 마주하면 함께 슬퍼하지 못해 슬펐다고, 많이 보고싶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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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일을 글로 쓰고 다른 사람들과 나눠보는 경험은 처음인데요. 너무 길고 정리가 잘 안된다고 느끼실 것 같아요, 왜냐면 제가 그렇거든요.
그래도 이걸 드디어 글로 써냈다는 게, 이제는 조금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네요.
상처로 숨쉴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아도르노가 부럽기만 하네요.
제가 아는 건,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니까 숨쉴 수 밖에요.
그러다보면 상처를 통해서도 숨이 쉬어지려나요?
첫댓글 상처로 글을 써주신 상아님을 응원해요. 제목이 신씨네 가족인 만큼 이 안에 풀어낼 상처와 이야기가 많으시구나 짐작해보았습니다. 이번 글처럼 하나 하나 풀어주시면 감사하게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