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시간’ 지금은 덤이다. / 정희연
1997.11.21일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나라가 부도 난 것이다. 건설회사에 다녔던 나는 이유 없는 사직을 보았다. 6개월이 멀다 하고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1차에서 4차까지 회사에서 인원 감축 몇 명의 지시가 떨어지면 실무진에서는 이유 없는 순서가 정해졌다. 나는 5차 구조조정이 시작될 무렵 2001.1.31.일 사직 했다. 세상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에 전문건설회사를 만들어 사업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지나고 보니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나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장모는 광양에서 태어났고 부산여고를 졸업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장인어른은 장모에게 전문건설업의 운영권을 넘겼다. 전문성이 요구하는 문서가 필요할 경우 주말이면 처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모의 업무를 도우면서 절차에 따라 적정한 규모와 인력이 있으면 누구나 건설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꿈이 생겼다. 돈을 벌고 싶었다.
1천만원으로 면허를 만들고 2천만원으로 1년을 운영하고 2천만원은 가용으로 사용하다면 건설업을 운영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내와 장모는 어렵지 않게 허락해 주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가장 어렵다는 동종업계의 보증 또한 장모가 대신해 주어서 어려운 건설시장의 문을 쉽게 열어주었다.
2001.2월 친구 사무실을 빌려 전문건설업을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프린터, 컴퓨터,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퇴사 전 사전 물밑 작업으로 현장 한 두 개 만들어 시작할 수 있도록 했겠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회사와 동료들을 기만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사직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준비 외에는 하지 않았다. 맨땅에서부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시작이었다.
정보가 어두워 전문직으로 일하는 사람만이 그 분야에 대하여 알고 이해하던 때에는 수백 종의 실행금액을 산출해 내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토공, 교량, 도로, 하천, 항만, 상수도, 하수도, 댐 등 과거의 경험으로 각각 적정 하도급율을 만들어 주변 협력업체와 타진하여 성사되는 일이 많았다.
정면돌파 나의 첫 영업이 시작되었다. 공고문에 나오는 공사개요를 보고 내게 맞는 현장을 찾았다. 입찰 결과가 나오면 다음 날 아침 9시 10분 전 사장실을 노크했다. 이력서, 회사 소개서, 명함을 들고 전라남도에 위치하면 어디든 달려갔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좋았다. “일하고 싶다는 의지 만큼은 알아주리라” 하는 소신으로 밀어붙였다. 뜬금없는 방문에 당황하는 분도 있었고, 차 한 잔을 주며 응원해 주는 분도 있었다. 초면인 상태에서 바로 응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추가로 준비한 것이 견적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같은 날 여러 곳에서 동시 개찰이 있어도 하루가 지난 곳은 가지 않았다. 열정이 퇴색되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루 한 건이 전부였지만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실적이 없어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때에 휴대폰 전화음이 울렸다. 지인으로부터 견적서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사내용과 견적하는 방법 등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가슴 떨리는 몇 일의 시간을 보내고 첫 계약이 성사 되었다. 세상을 모두 얻은 듯한 큰 기쁨이었다. 시작 한지 6개월째 되던 시기였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다시한번 크게 느꼈다. 옷가지와 이불을 챙겨 고흥으로 향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동안 공사와 공무를 담당 했던 경험으로 설계서만 보면 현장 파악이 가능했고 발주처와의 업무처리 관계도 알고 있어서 경험이 부족한 원청사 직원들을 도와가며 일했다. 직원들도 회사 임원도 나를 좋게 보았다. 현장이 끝나기 전 그동안 다녔던 업체에서 견적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직원을 뽑아 현장에 상주시키고 나는 광주로 올라왔다. 날개를 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거래처와 현장을 휩쓸고 다녔다. 이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정길동이라고 불렀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했다. 10년의 세월 4번의 확장이동과 전문건설업으로 시작하여 종합건설업인 ㈜효국종합건설을 추가로 설립했다. 혼자 시작 해서 열 명이 넘는 직원으로 규모가 늘어났다. 그리고 내 사람이 필요해 아내와 삼촌을 영입하였다. 꿈이 더 커졌다. 직원들과 기쁨을 함께하는 보람된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회사직원의 가족들을 불러 식순에 의한 모양새 있는 송년회도 가졌다. 충무 마리나리조트에서 요트도 타며 멋진 1박 2일의 단합대회도 다녀왔다. 3층짜리 건물도 사고 승승장구하였다. 사업체를 만들어 90%가 버티기 어렵다는 3년의 시기도 넘겼다. 그때의 나이 37살 젊었을 때였다. 누가 보더라도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멋진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2004년 나주에서 교량 공사를 하였다. 태풍 메기는 한반도 상륙을 앞두고 나주에 451mm의 비를 내렸다. 나주의 농경지 4000핵타가 침수 됐었는데 우리 현장도 피해 가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오점을 남겼다. 태풍이 비구름을 앞에 두고 올라오는 독특한 형태의 태풍이었다. 도착 2일 전 장대비가 종일 내렸다. 일과가 끝나기 전 오후 5시, 교량 공사둥 교대를 만들기위해 손실된 제방을 복구하기로 현장소장 무선통화로를 주고 받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경 굴삭기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기존 제방을 허물어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가도를 만든 후라 제방을 복구할 흙이 부족해 보였다. 늦은 저녁에 장비와 흙을 구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머리가 미리 결정해 버렸고 불안스러운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만약 수위가 높아져 하천이 범람하게 된다면 주변 제방보다 더 높게 올려야 우리 현장으로 인해 피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10시가 넘어서고 장대비는 계속되고 수위는 올라오고 남은 흙으로 제방 높이까지 흙은 올렸지만, 수압을 견디어낼 수 있는 단면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옆의 제방 위로 하천이 범람하고 조금 있어 가장 약한 우리 현장에서 둑이 터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말았다. 농경지 20 헥타를 침수시켰다. 수습하는데 2억이 넘는 손실금과 1년 6개월이 넘는 긴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오후 5시 복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결정했고, 8시30분 흙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마을주민과 발주처인 나주시에 알리고 의논하여 같이 해결책을 찾았어야 했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재지변이 아닌 인재가 되어 버렸다.
2008년 광주 ○○○○산업단지 ○공구 토공사를 맡았다. 공사비 43억 농경지를 2~3m 높여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공사다. 광주 북구 문흥동, 풍암동 아파트에서 나오는 흙을 받기로 하였는데 덤프트럭 기사들이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그보다 가까운 광주 서구 광천동 아파트에서 터파기한 흙을 가져왔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방송국 제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매달 일한 대가가 지급되므로 장비 기사에게는 모두 돈이 지불된 후 였고 발추처에서는 감액이 이루어졌다. 공사가 끝나면 받을 이윤과 공사비 삭감되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30만㎥의 흙을 나르는 덤프들을 모두 확인하여 이미 사용되어버린 금액을 개별적으로 민사소송을 진행하여 환수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큰아이 중학교 1학년 작은아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리고 양가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수습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신감, 자존감, 사람도 모두 잃었다. 끝을 내고 싶었다. 회사를 넘기려고 했지만 종결되지 않은 회사를 인수할 사람은 없었다. 한 현장이 헝클어지니 다른 현장도 힘을 잃었다. 최고의 위치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술이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보다 못한 아내는 공부방을 하겠다고 알려왔고 부족한 가정 살림을 채우기 위해 학원문을 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기운을 내 보았지만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 생각을 했고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추운 겨울 회사 문을 닫았다.
45평 가득한 물건은 20평으로 옮겨졌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암담해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넣어 달라고 졸랐다. 조그만 방은 이삿짐으로 가득했고 채 정리하지 못한 짐들은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약속으로 풀지못한 상자를 남기고 떠났지만, 그 상자들은 3년의 긴 세월을 우리와 같이했다. 아들과 딸이 친구들의 눈을 피하여 총알의 속도로 등하교 하는 모습을 보았고, 통장으로 들어오는 급여는 은행에서 불어오는 삭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고, 벗어나고 싶은 20평 단칸방에서의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느리게 흘렀다.
혼자서 빠르게 일처리하는 습관을 바꾸어 가고 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시간이 조금 지연 되더라도,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생략하는 경우를 줄였다. 지금의 현장이 그러하다. 시골마을 집성촌 앞으로 도로가 난다. 건너편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보상을 많이 받은 것을 보고, 세상이 어두운 시절을 빗대며 '나라돈을 서민을 위하여 도와 달라'며 민원인의 집도 보상을 요구했다. 공사로 인하여 집에 균열이 갔다는 이유와 태풍피해가 예상되니 창고 가옥 상가를 보상해 달라는 내용, 현장에서는 태풍피해를 방지하고 민원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도로폭을 조정하였는데 임으로 조정하였다고 민원을 접수하였다. 군청, 신문사, 발주청, 경찰서, 검찰, 환경분쟁조정위운회, 국민권익위, 청와대 등 행정처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접수하였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곳 없다고 이정도면 현장은 초주검이 되어야 마탕할 일이나, 잘 살아 있다.
가족들은 10년 동안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내게 모든 창구를 열어주었다. 그 후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는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내가 가족들에게 보답해줄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때가 오지 않아 구체적인 대안을 주지는 못했지만 넌지시 이야기해주고 있다. 아내와 자녀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언제든지 이야기해 달라, 자신의 영향력을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리해 버리는 오점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 및 주변의 힘은 자신이 키우고 발전시켜온 개인의 능력과 같은 것이므로 필요할 때 엄마 아빠의 히든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것 또한 개인의 능력이니 꼭 사용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인생 최고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보았다. 일에 있어서 생략과 융통성은 전혀 다르다. 융통성이란 단어를 앞세워 생략을 종용하는 경우를 종종 해 왔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건 지혜로운 일이지만, 어려워서, 비용이 많이 들어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건너뛰는 일은 삼가한다. 나를 버리고 않고 버티어주고 가족을 지켜준 아내가 정말 고맙다. 다시는 손에 물을 묻이지 않겠다는 20년 전쯤 했던 약속을 다시 하고 있다. 제2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새벽 4시 가장 좋은 기운이 오는 시간 잠에서 깬다. 몸은 스스로 움직여 화장실로 향하고 가벼운 샤워와 함께 시작되는 '상쾌한 하루! 지금은 덤' 이다.
첫댓글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니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다는 말을 이해하개 되었어요. 글도 쓰시고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꺼내고 싶지 않은 큰 아픔 입니다. 이번 일상의 글쓰기로 가족들과 보다 깊이있는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글쓰기의 장점처럼 글로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다보니 구체적인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는듯 합니다. 꺼내지 않았으면 잊고 지냈을 그런것, 고맙습니다.
파란만장하네요.
가족의 힘으로 꿋꿋이 잘 이겨낸 선생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바닥까지 가보셨으니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네요.
응원합니다.
순서에 맞게, 흐름에 따라, 발 맞춰서를 배웠습니다. 가족힘, 함께가 소중한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업이란 만만치가 않네요.
그동안 어려운 시기를 지나오면서 선생님 마음 고생이 많았겠어요.
글 읽으면서 마치 내 일처럼 안타까웠답니다.
선생님 하시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응원합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강아지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무모하게 뛰어들었기에 세상과 마주치는 법도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셨으니 이제는 웃는 일만 남았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한 번 뜨거운 맛 이후 견디는 힘이 생겨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입니다. 가족 사랑으로 끝나는 따뜻한 글 감동입니다.
멋진 인생 살아내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건 젊은 시기에 이루어진 일들이라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 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