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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636년 병자년 12월, 최정예 기병으로 구성된 청의 선봉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조선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내려온 그들은 불과 6일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인조는 시신이나 오물을 내보내던 수구문을 통해 가까스로 도성을 탈출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뒤쫓아온 청군에 의해 강화도 파천길이 막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그곳에 고립되고 만다. 병자호란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청태종 홍타이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운 총력전이었다.
최원정/아나운서: 삼백아흔여덟번 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평가되는 병자호란(1636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시원/배우: 병자호란하면 병자년에 오랑캐에게 치욕적으로 진 전쟁, 그 정도로만 알고 있거든요. 이렇게 모든 걸 쏟아부었던 총력전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한국 교육과도 관련이 있는데 저도 가르칠 때 임진왜란을 가르칠 때는 신나게 가르쳐요.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짜릿한 드라마가 보이는데 병자호란이 다음 파트잖아요. 그때는 그냥 퉁 치고 넘어가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지금도 그런데 이 당시에는 어떻겠어요.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그 나라에 우리가 두 달 만에 졌죠. 그 군주가 우리 땅에 우리 군주가 엎드려 절하는 모습 빨리 지우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아킬레스건이 아니었을까.
최원정: 임진왜란을 길고 병자호란은 짧아서 그런 것 아녜요?
최태성: 정묘호란(1627년)도 있고 병자호란도 있고 그냥 퉁 치고 넘어간다니까요.
허준/방송인: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 데 2007년도 쯤인가에 저의 동네예요. 여기 석촌동에 있는 삼전도비에 (三田渡碑/1639년-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태종(홍타이지)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적을 적은 비), 누가 빨간색으로 철거하라고 써 가지고 언론이 발칸 뒤집힌 사건이 있었어요.
KBS 뉴스/2007.2.8: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했던 치욕의 역사가 담긴 문화재 삼전도비를 누가 심하게 훼손했습니다. 앞면에는 철, 뒷면에는 거, 철거하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밤사이 삼전도비에 낙서가 적힌 것을 동네 주민이 발견하고 구청에 알렸습니다.
허준: 이런 분들이 많겠죠. 청나라 너희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거 없애야 돼
최태성: 많은 분들이 요즘은 저걸 왜 저기 세워놔야 돼 하는 질문을 하세요.
최원정: 근데 교수님, 우리가 병자호란을 역사저널 그날에서 여러 번 다루었어요. 근데 임진왜란만큼 시청률이 잘 안 나와요. 혹시 교수님, 청나라 역사를 전공하셨으니까 병자호란하면 느낌이 다르신가요?
이시원: 기쁘신가요?
박민수/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저도 한국 사람인데 당연히 아쉽죠. 그런데 더 아쉬운 건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병자호란 그 자체의 실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게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에는 상대방이 있잖아요. 병자호란은 조선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청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특히 홍타이지, 청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이 자신의 정체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거든요. 그래서 홍타이지는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홍타이지에게 병자호란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오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입니다.
최태성: 새로운 시도예요.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병자호란을 봤는데 이번에는 청의 입장에서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겠다는 얘기잖아요.
이시원: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진짜 지혜가 생기는 거잖아요.
최원정: 많이 다를까요? 똑 같은 반복이 아닐까요?
박민수: 지금까지 이런 병자호란은 없었다.
최원정: 믿어 보겠습니다. 오늘 또 前국립외교원장 김준형 교수님 자리해 주셨는데요. 병자호란이 외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죠?
김준형/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교수: 어마어마하게 중요하죠. 첫째는 우리가 외교적 실수를 했거나 뭔가 잘못했을 때 이게 병자호란 이후의 외교 참사다 할 정도로 늘 오욕의 역사로 들고 있고요 또 하나는 이게 명청교체기잖아요. 그래서 친미반중 지금 와서 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된다 라고 항상 등장하는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 안 당하면 좋은데 이 게 마치 우리 잘못으로 모든 걸 자초했다고 그러면 사실은 침략자가 있는 것이고 전쟁을 일으킨 자의 과실이 사라지잖아요. 일본 얘기를 할 때도 우리 반성하는 거 좋은데 35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 된 게 마치 우리 책임으로 돌리 것은 사실 본질을 벗어난 것이죠.
최원정: 우리가 자초한 전쟁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패배한 역사지만 배울 건 배우자 라는 취지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 일단 병자호란 초기 상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1636년 12월 8일에 시작된 병자호란은 53일 그러니까 두 달도 채 지나기 전인 이듬해 1월 30일에 끝났습니다. 그 결과는 조선의 참패였죠. 아무리 청나라 군사가 강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까. 지금도 의아하고 궁금하긴 합니다. 고려시대 비록 패하긴 했어도 그 어마어마한 몽골제국을 맞아서 30년 동인이나 버티며 대몽항쟁을 이어갔었죠. 또 임진왜란도 7년간의 전쟁 끝에 우리가 일본을 물리쳤잖아요. 그런데 이분(박금수)은 왜 여기서 이런 복장으로~
박금수/무기 및 전쟁 전문가: 제가 뭐 이런 옷을 입은 이유는 이따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병자호란의 말도 안 되는 결과는 개전 초기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세운 전략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직도전략입니다.
이시원: 직도가 뭐예요?
이광용: 바른 길?
이시원: 곧은 길?
이광용: 直道=제일 빠른 길이라는 거죠? 빠른 길로 간다는 것 아녜요?
박금수: 直 곧을 직 擣 찌를 도 가장 빠른 길로 찔러 들어가듯이 한양을 점령하고 그래서 인조가 강화도 파천을 못하게 도성 안에 가둬 두는 것이 홍타이지의 전략이었던 것이죠. 인조 전에 왕이었던 광해군 때 이미 멀리 말을 타고 곧장 찔러 들어 가는 이런 전략을 세워서 도성으로 바로 짓밟아 들어온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지 (광해군 일기/광해 11년 9월 29일-강물이 얼어붙어 적의 기마병이 곧장 쳐들어온다면…(중략) 내 말을 잘 명심하고 한시 바삐 논의하여 처리하라), 이런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라는 왕명이 내리기도 했구요.
이시원: 어찌 보면은 알면서도 당했어요.
허준: 한가지 다른 게 광해군이 長驅直擣(장구직도-빨리 말을 달려 곧 바로 찌르라)를 말 했다고 했는데 국가 지휘관이 인조로 바뀌었잖아요. 지휘관이 바뀌었을 때 체계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박금수: 홍타이지는 300명의 정예 기병을 선발합니다.
이광용: 잠깐만요 3천 아니고?
----------박금수: 300명의 기병을 선출하고 두 명의 장수에게 이걸 맡깁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마푸타 라고 하죠 (마푸타[마부대(馬夫大)]-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침입한 청나라 장군,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 때부터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왕래), 길을 잘 알아요. 이 300명은 청군 중에서도 가장 기동력이 뛰어나고 전투력이 강한 최정예 기병이었던 것이죠.
이광용: 기록을 살펴 보면은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게 12월 8일, 그리고 인조가 있는 한양에 당도한 게 12월 14일, 말 타고 만6일이 걸렸는데 압록강에서 한양까지의 거리가 당시 1200리입니다. 지금의 거리로 환산하면 500킬로미터죠. 500킬로미터를 갔다는 얘긴데 2차 대전시 독일의 롬멜 기갑사단의 전격전 아시죠. (롬멜기갑사단-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장군 롬멜이 이끌었던 사단), (電擊戰-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기동작전), 전격전 때 롬멜의 기갑사단이 하루에 진군한 거리가 70킬로미터 예요.
허준: 이때 당시 70킬로미터면 얼마나 빠른 정도냐면 후방에 프랑스나 영국 병사가 지나가는데 우리 편인가 하고 경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빠른 진격이 70킬로미터인데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거예요.
최원정: 이건 더 옛날 이잖아요.
최태성: 북쪽은 산이 엄청 많은데
박금수: 파발마 아시죠, 달리기를 비교해 보면 여러분들 압록강 건너 청군을 보고 내달린 파발마를 보시면 청나라의 군사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파발마가 출발을 합니다. 도착한 게 12일이에요. 아까 청군 선봉이 온 게 14일 이잖아요.
이시원: 이틀 차이네요.
최태성: 파발마 뒤를 계속 맹렬히 추격한 거네.
허준: 아무 것도 없이 계속 달리는 게 파발마잖아요. 근데 무장을 한 병사들이 이틀 밖에 차이가 안 나는 건 파발마 딱 받고 야 큰일 났다. 쳐들어온다. 회의를 한 번 해볼까. 어떤 걸 준비해야 되겠니, 도착했습니다. 뭐라구? 이런 상태잖아요. 이 정도 속도면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수도까지 바로 들어가서 대통령 궁을 포위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이광용: 당시는 충격이 더 컸겠죠. 이 선봉대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조선 왕실에서는 14일 오전에 접합니다. 14일 당일 오전에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인사들을 강화도로 피신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인물은 누구예요?
최태성: 인조~
이광용: 인조와 소현세자죠. 인조와 소현세자는 나왔어요. 숭례문을 나왔는데 청나라 선봉대가 홍제동에 당도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바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거예요.
이시원: 근데 이렇게 파발까지 띄울 정도면 우리나라 군사들도 포진해 있을 것 아녜요? 그때 그때 막아서고 전투를 벌이고 충분히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요. 왜 통과하게 놔뒀나요?
박금수: 병자호란에 대비하면서 조정에서는 淸野入保라고 하는데 들판을 비우고 모든 군사력과 민간인은 성에다 집어 넣는 거예요. 그런데 정묘호란 때나 병자호란 때나 청군의 행동이 달랐어요. 정묘호란 때는 성들이 있잖아요. 진군을 하면서 성들을 다 격파를 하고 약탈을 하면서 조선군과 교전도 하고~
이시원: 한 마디로 교전을 벌이면서 간 게 아니라 패싱하고 지나가 버린 거예요.
최원정: 청군 전용도로를 깔아준 것처럼 하이 패스를 놔준 것이에요.
박금수: 이것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비밀 전략이 있었는데도 힌트는 제가 입은(오랑캐복) 복장에 있습니다. 청나라 선봉대 하면 갑옷-무기를 갖춘 군인의 복장이었을텐데 홍타이지는 선봉대한테 명령을 내립니다. 상인처럼 갈아 입어라 (만문노당-상인처럼 가장하여 밤낮 없이 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王京성을 포위하라)
이시원: 군인인지 모르겠끔
박금수: 당시에는 수백명씩 사신을 따라서 상인들이 다니는 게 자연스러웠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인 복장으로 가라 입고 밤낮을 달려서 가라고 했던 거죠. 그러면 사람들은 사신들이 어디로 가나보다 뭐 사러왔구나 정도로 무심코 지나 보냈을 것이 높죠.
김준형: 소련이 북한을 도울 때 전쟁에 참여하는 걸 숨기기 위해서 비행기도 북한 비행기로 다 색칠하고요. 북한 공군과 간단한 교신도 한국말로 했어요.
이광용: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한양에 당도한 청나라 선봉대, 비록 조선의 왕인 인조를 한양 도성안에 가두지는 못했지만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선봉대에 이어서 청나라 본진이 속속 압록강을 넘어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합니다.
최원정: 홍타이지가 진짜로 준비를 많이 한 거예요. 파천을 막겠다고 직도전략 패싱전략 상인으로 변장까지 해서 엄청 힘썼네.
박민수: 당시 조선군의 핵심 방어전략은 적이 침략하면 일단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왜냐면 청군의 팔기병은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기동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산성으로 올라가서 방어를 하는 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거죠. 그 결과 평지의 길은 뚫려 버리고 청군은 굳이 산성을 공격할 생각이 없고 그러니까 조선군은 자신의 핵심적인 방어전략을 그대로 따라한 게 오히려 독이 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시원: 어찌 보면 홍타이지는 조선의 이런 방어 전략까지도 다 알고서 이런 전략을 짠 거예요.
최원정: 인조만 보고 그만 직진 했으니 조선은 왜 플랜B가 없었을까. 모든 가능성을 대비했었어야 되는데~ 남한산성에도 당시 사람들이 꽤 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민수: 당시에 투입된 청군의 규모가 한 2만 2천명 정도였다 라고 해요. 거기에 동맹군으로 같이 참전했던 몽골군이 한 1만 2천명 도합 3만 4천명 정도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된 겁니다.
이시원: 근데 군사 전문가님, 3만 4천명이 성을 함락시키기에 충분한 숫자입니까? 저희가 느끼기에는 굉장히 적은 수 같거든요.
허준: 우리가 역사상 요런 정예병들에 대해서는 군사수로만 해서는 안 돼요. 생각해 보세요. 얼마 전에 우리가 배웠죠. 조선의 조총병 1만 부대를 청군 50명이 유린하면서 시간을 끌었잖아요. 50명이 그만큼 강하다는 거죠.
최태성: 사실 삼전도비문에는 10만 이라고 적혀 있고요. (삼전도비 비문中-皇帝夷征 十萬其師 황제가 동쪽 땅을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그리고 또 우리 기록에는 12만 8천명 이라 적혀 있는데 숫자상으로 봐서는 과장한 측면이 있어 보여요.
이시원: 그럼 우리나라는 더 부풀렸네요.
김준형: 그럴 수 밖에 없죠. 잘 생각해 보면 졌잖아요. 그것도 아주 치욕적으로 우리가 결과를 알고 있듯이 그러면 상대방이 더 쌔야 되잖아요. (패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오히려 적군의 병력과장) 그러니까 백성들한테는 후대에도 그렇고 지금 명의 눈치를 보잖아요. 우리가 義를 안 지킨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청군은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죠. 불가항력~
최원정: 내가 시험을 망친 게 아니라 시험문제가 어려웠다.
이시원: 너무 어려워서 그랬다.
박민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청군의 병력은 조선측 기록이 아니라 청측의 기록을 기반으로 해서 봐야죠. 3만 4천 명도 우습게 볼 숫자가 아니라 당시 청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의 무려 70%를 다 투입한 거라고 합니다. 그만큼 총력전에 기여를 한 거죠. 더 놀라운 건 새로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직접 진두지휘를 하고 조선을 침공한 것입니다.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른 뒤에 직접 적국 땅 깊숙히 까지 쳐들어온 건 병자호란이 유일무이합니다.
최원정: 홍타이지가 최대 병력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선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내레이션: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인 병자년 4월, (심양 고궁황제 즉위식 재현행사)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대청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황제 즉위식에서 만주와 몽골인 투항한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모두 홍타이지를 향하여 삼궤구도두의 예를 갖춘다. 하지만 조선에서 온 사신 두 사람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동안 끝까지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사신의 배례 거부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을 결심한다. 병자호란의 시발점이었다.
최원정: 황제 즉위식 날 조선 사신들이 저랬으니 굉장히 분노하기는 했겠네요. 근데 정확히 이게 어떤 자리였던 거예요?
박민수: 홍타이지가 새로운 존호 만주어로는 암바(amba) 게부(gebu) 큰 이름 尊號를 신하들로 부터 받는 자리였거든요. 특히 이때 홍타이지는 여진들의 최고 지도자 한(han), 몽골을 통치하는 칸(khan) 그리고 한족을 통치하는 황제로써 추대를 받는 자리였습니다.
최태성: 한(han) 칸(khan) 황제~
박민수: 누르하치가 세웠던 후금이 여진으로만 구성된 민족기업이었다면 홍타이지가 새로 세운 대청, 청국은 만주와 몽골과 한족까지 아우르는 다국적 기업으로 천명을 한 거죠.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女眞으로 불려왔던 이름을 홍타이지가 이제 滿洲 라고 불러라 라고 공식화하기로 했습니다.
이시원: 한 마디로 女眞族이 滿洲族이 되고 後金이 淸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인 잔칫날이네요.
최원정: 滿洲라는 단어가 홍타이지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군요.
박민수: 사실 우리 한테는 滿洲 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滿洲族이 만주 지역에 살아서 만주족이 아니구요. 홍타이지가 정복과 회유를 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을 포용하게 돼죠. 이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女眞이라는 이름을 빼고 滿洲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쳐준 거죠.
허준: 근데 제국 선포의 날인 거잖아요. 그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올라서서 내가 다스리는 여러 국가들을 불러서 예의를 다 갖추고 축제를 벌이는데 갑자기 뻣뻣한 채 서 있는 저들은 누구인가? 그럴려면 가지를 않는 게 좋지가 않았을까.
최태성: 두 사람이 참석했다고 했잖아요. 그 두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덕헌과 이확이라는 조선 사람이었거든요. 그 당시 어떤 상황이었느냐 하면 홍타이지가 제단에 올라가자 제단에다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잖아요. 그걸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삼배구도두(三拜九叩頭) 이게 딱 끝나고 나서 그 다음 단계는 홍타이지를 대상으로 해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삼배구고두의 예(禮)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세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조아리고 있는데 나덕헌과 이확 두 명만 멀뚱 멀뚱 서 있는 거잖아요. 그 모습이 그려지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시원: 그렇죠,
최원정: 시간도 길어요.
허준: 만주기록에 기록이 있어요?
박민수: 사실 나덕헌과 이확은 즉위식에 초청받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심양을 방문해야 했던 춘신사 (春信使-정묘호란 후 매년 봄마다 조선이 후금에 보내던 사신), 그리고 작년에 인조의 인헌왕후에 조문을 왔었던 거기에 대한 화답으로 보냈던 사신이었거든요. 사실 그 두명도 의아했을 거예요. 자기 미션은 그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절을 하라는 거죠.
최태성: 가봤더니 즉위식이야
허준: 보통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데 다 엎드리면 얼떨결에 같이 하잖아요.
이시원: 근데 여기 나름 한(han)이자 칸(khan)이자 황제의 즉위식인데 절 안하고 그러면 큰 일 나는 거 아녜요?
최원정: 목숨 걸고 결기 있게 지조를 지킨 건가요 어떻게 봐야 돼요?
허준: 가만 있어 봐 황제가 즉위 한다구 내가 여기서 절하면 저 오랑캐를 인정하는 거잖아 이러면 나는 조선으로 돌아와도 죽어 이런 생각을 한 면도 있지 않았을까?
이시원: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 그런 상황에서
허준: 그럴 거 라면 차라리 조선의 명예를 지키고 죽는 게 낫지 않나
김준형: 결과를 알고 거꾸로 보니까 이 사람들 조금만 잘 했으면 전쟁이 안 날 수도 있었다 라는 결론으로 가는데 절을 했어도 문제가 됐을 거예요. 이 지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당시 청의 국제적 지위가 강국으로서 이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가장 문제가 있는 거에요. 나라를 지키고 안보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만이 억울한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그 당시에 즉위식이라는 국제적 의미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게 훨씬 더 큰 문제였죠.
최원정: 사실 여진이라고 그러면 옛날에 윤관 장군이 정벌하던 걔네들 우리가 봐주고 달래고 했던 걔네들 걔네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릎을 꿇어~ 조선 사신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을 거예요.
이시원: 근데 그들이 변했잖아요. 그거를 몰랐다니, 청의 입장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조선~
김준형: 사실 문명 국가의 외교라는 측면에서 그 자리에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예를 들어서 네가 내 악수를 거부 했기 때문에 내가 전쟁을 한다 이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삼아서 보복을 하겠죠.
최원정: 그런데 이 삼궤구고두는 이게 만주족의 전통 의식인가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람을 힘들게 해
박민수: 그것도 우리가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보면 이제 만나서 안녕 하는 거랑 같은 인사인 겁니다. 인사 중에서 가장 격식이 높은 것이죠. 한 번 절한 걸로 부족하니까 세 번을 절하고 세 번 절하는 것도 모자라니까 한 번 절 했을 때 세 번 꽝꽝 조아려서 三跪九叩頭가 된 겁니다.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니 저런 해괴망측한 인사법이 다 있어 하지만 만주족에게는 굉장히 오래된 전통 인사법이었습니다.
최태성: 조선 사신들이 삼궤구고두 절을 못 했던 이유는 있었어요. 아까 홍타이지가 제단에 예를 취한 다음에 축문을 읽거든요. 축문에 어떤 내용이 있었느냐면, 조선을 정복했고 몽골을 통일하였으며 원나라 옥쇄를 획득했다. (청태종실록/1636년 4월 11일), 그러니까 황제가 된 명분 중의 하나가 조선 정복이란 말이 나오고 있거든요.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저걸 들은 거예요. 응~ 무슨 소리야, 조선을 정복했다고? 분명히 정묘호란 때는 군신관계가 아니예요. 형제관계였지요. 근데 갑자기 축문을 읽으면서 조선을 정복했다. 내가 여기다 절을 한다 이거는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이고 황제라고 인정하는 순간 군신관계를 인정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거죠.
허준: 본인이 결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이시원: 근데 이럴 때는 그래도 뭔가 유연성을 발휘해야 되는 것 같애요. 우리 그거 배웠잖아요. 외교적 수사의 모호성, 그러면 살짝 넘어지는 척 했다가 일어나고 아이구~ 아이구~ 또 한 번 넘어지는 척 하구
최태성: 세 번 넘어져야 되겠네
이시원: 양쪽은 둘 다 아니다 이렇게 모호성을 갖는 방법은 어땠을까
최원정: 상황이 굉장히 중대해요, 兄弟에서 君臣으로 자칫 인정해 버릴 수 있는 너무 중차대한 순간인데 아니 허준씨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겠어요?
허준: 저 같은 경우는 일단 세 번 절을 크게 하고 그리고 조선으로 안 돌아갈래요
이시원: 아니면 딱 한 번만 하고 안 일어나기
김준형: 방법이 황당하긴 한데 저렇게 외교관은 수 없는 생각과 고찰 속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明과 淸 사이에서 절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잖아요. 형제국도 사실 동맹인데~ 저는 약간 아쉬운 게 이겁니다. 그 자리에서 안 했다고 하더래도 뒤에 끝나고 나서 조선에서 갔었어야 했다. 우리 사신들이 그걸 파악을 못했다. 비밀리에 보내서 거기에 대해서 결례를 사과 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최태성: 그게 외교죠.
최원정: 인조가 안 한 거죠.
김준형: 안 한 거죠. 그 상황은 분명히 딜레마 상황인데 외교에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죠.
이시원: 저는 또 홍타이지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굳이 조선을 정복했고 저 말을 넣어서 사단을 만들어야 해요? 제가 오늘 즉위했습니다 했으면 됐지 왜 꼭 조선을 정복했고 라는 말을 넣어야 했을까.
박민수: 모든 책임을 조선 사신에게만 보내지 맙시다. 이건 홍타이지가 잘못을 한 것이잖아요. 조선은 군신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최태성: 사전 조율이 안 된 거죠?
박민수: 일방적인 선포였던 거죠. 홍타이지나 명나라나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칭제, 황제를 칭한다 라는 말을 굳이 넣은 것은 아무래도 이게 무리수인 걸 스스로 알았던 거 같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신들에게 이런 걸 강요했던 것은 명나라는 이렇게 하지 못하지만 명나라에게 가장 충성을 보이고 있었던 조선 사신의 인정을 받으면 칭제의 명분이 서겠구나 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걸 조선 사신이 받아 들이지 못한 거죠.
최태성: 어떻게 보면 홍타이지는 외교적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박민수: 그 갑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을이 잘못 됐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거죠. 어찌 됐건 조선 사신이 그 자리에서 예를 거부 하죠. 그럼으로써 홍타이지가 생각했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게 된 겁니다. 원래는 장엄한 의식 속에서 한(han) 이자 칸(khan) 이자 황제로서 즉위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조선 사신이 예를 올리지 않으니까 그것이 거짓말 이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적나나하게 드러나게 된 거죠.
최태성: 홍타이지는 머릿 속으로 이런 상황이면 조선 사신도 엎드려 절할 것으로 생각을 한 거 예요.
김준형: 자신한 거죠.
최태성: 하지만 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선비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인데~나올 수 없는 거죠. 한 편 이해가 되네요.
김준형: 외교적 아쉬움은 있어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꾸면 안 돼죠. 지금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조약을 어긴 것은 청이거든요.
이시원: 이 분들은 어떻게 됐나?
허준: 절을 안 했으니까 허리를 안 움직였으니까 허리를 접자 이랬겠네요.
박민수: 오랑캐 교수가 나설 차례입니다. 홍타이지는 고단수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신을 죽여 버리면 조선에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거든요. 맹약을 깨는 걸 청이 먼저 깨는 게 되는 겁니다. 신하들의 처벌 주장에도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대신에 이 상황을 꾸짖는 편지를 들려서 보내죠. 홍타이지는 조용히 전쟁 준비를 하다가 즉위식이 있었던 8개월 후에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병자호란은 바로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던 거죠.
최태성: 저 즉위식 장면이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구것구나.
이시원: 홍타이지가 분노를 참고 명분을 만든 거잖아요.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최원정: 분노 조절을 할 줄 아는 위인이었어요. 한 수 앞도 내다보고
허준: 지금 4월에 쳐들어가면 한 방에 직도를 못해요. 한참 따뜻한 시절이잖아요. 겨울에 쳐들어가야지. 지금은 죽이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 무서운 사람이었네.
최원정: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 거부가 조선침공으로 까지 이어졌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최태성: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을 하잖아요. 남한산성에 한 만 명 넘는 병력이 있었구요. 밖에는 청군이 한 3만 4천명 정도가 결집한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허준: 막아야죠.
최태성: 어떻게 막느냐가 중요하죠.
최원정: 근왕병들도 많이 오고
최태성: 맞아요, 왕이 지금 갇혀 있는 상황이니까 전국에 있는 근왕병들~ 왕을 구해야 한다는 근왕병들이 몰려오기는 하죠. 청군한테 가서 싸우기는 해야 하는데 청군이 워낙 강한 거예요. 강하니까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남한산성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정보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정보가 차단되면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허준: 그러면 딱 하나 밖에 없네.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끝나는 겁니다.
최태성: 맞습니다.
박민수: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모든 작전 준비를 마친 거죠. 그런데 실제로 공성전을 할려고 하면 청군도 피해가 없을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청군의 입장에서도 굳이 공격을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시원: 거기다가 청군은 홍이포도 있잖아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쏠 수 있는 거 아녜요?
박민수: 그렇죠, 홍이포도 34문 정도를 끌고 왔다고 해요. 조선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됐던 거죠. 실제로 당시에 조선측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에 모아 놓았던 식량이 2월 20일 정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승정원일기/인조 14년 12월 20일-저장된 식량이…60일은 버틸 수 있겠고, 아껴쓰면 70일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조선 식량사정을 홍타이지는 알고 있었나요?
박민수: 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애요.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서 심양으로 보낸 만주어 서신을 분석해보면 홍타이지가 최소한 조선에 2월 하순까지는 머무를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일은 내가 2월 하순에 돌아가서 결재하겠다 라는 내용이 있거든요. (내국사원 만문당안-사소한 일과 소식이 있으면 사람을 파견하여…2월 20일에 통원보(通遠堡)에 와서 있으라고 하라), 처음에 식량이 떨어질 때 까지 홍타이지는 계속 조선에 있을 생각이었던 거죠.
이시원: 홍타이지는 조선 정복에 진심이었군요.
최태성: 당시 조선 조정하고 홍타이지 청나라하고 주고 받은 문서를 보면 홍타이지측이 굉장히 느긋해요.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일-짐(朕)이 정벌하러 온 것은…그대 나라가 먼저 불화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항복을 종용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일-(청측국서) 항거하는 자는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받아들일 것…귀순하는 자는 해치지 않고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비꼬기도 하고 계속 이런 뉘앙스가 오는 거예요.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3일-(조선측 국서) 지난 일에 대한 죄는 알고 있습니다.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반면에 겨울이죠, 식량 부족하죠, 조선은 급한 거예요.
김준형: 전쟁 중에도 외교하고 협상도 해야 된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바람직해요. 지금 처럼 남북이 완전히 대화가 끊기면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그러면 이제 최후를 생각해야 되거든요. 피해를 줄여야지. 피해를 줄이고 백성을 어떻게 보호해야 되는데 내부에서 여전히 척화파와 주화파가 싸운다는 것이 국제적 정세도 모르고 내부도 흔들리는 그야말로 멘탈이 붕괴된 상황이죠.
최태성: 교수님이 늘 주장하신 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외교가 작동되어야 하잖아요.
허준: 교수님, 명나라는 뭐합니까? 명나라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 거 아닙니까?
박민수: 여기서 더 무서운 건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한 명의 지원을 끊기 위해서 이미 병자호란 5개월 전에 명을 침략한 적이 있습니다. 몽골초원을 우회해서 한 번 명을 약탈하고 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명군이 쉽사리 조선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던 거죠.
최태성: 임진왜란의 명과 병자호란의 명은 다르긴 하네.
김준형: 마디 마디를 싹둑 싹둑 다 잘라 놓은 거예요.
허준: 요거하고 갈려면 몇 달 걸리는 데 그런데 난 2월말까지만 있으면 끝나 이걸 다 계획했다는 거잖아요.
최태성: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측 기록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승정원 일기/인조 15년 1월 17일-어제 까지만 해도 느긋한 태도를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갑작스레 사신을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다), 정월 17일 기록인데 어제 까지만 해도 느긋한 태도를 저들이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사신을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 있는가 보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
허준: 지금요 날자가 딱 맞아요. 정월 15일 대보름에 인조와 더불어 대신들이 달짚 태우기를 하면서 소원을 빈데요, 홍타이지 아프게 해 주세요.
이시원: 홍타이지에 건강 이상설~ 내분이 일어났다?
박민수: 실제로 홍타이지가 완전히 180도 바뀌어서 조선에다 빨리 협상 테이블에 나오라고 압박을 하기 시작한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사신을 빨리 보내라고 한밤중에 사람을 보낼 정도였고요.
이시원: 이거는 청이 지금 불리해졌다는 얘기거든요.
박민수: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은 계속 남한산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화도를 2월 중순에 함락을 시켜서 인조를 계속 압박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한테도 2월 15일까지 배를 만들어 놓고 전쟁준비를 다 해놓아라 라고 지시를 해놓은 거죠. 그런데 강화도 공격을 한 달이나 앞 당겨서 정월 20일에 진행시킨 겁니다.
이시원: 너무 이상하다.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유리한 싸움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다급해진 건 정말 큰 일? 계산을 잘못했나?
최원정: 홍타이지가 협상을 서두르는 이유가 과연 뭘까요?
--------------(동영상)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아~ 여러분! 비행 청소년 출신, 손들어 보세요. 이 영상 다 기억하시죠? 불량 비디오~대여점 가서 비디오 테이프 빌려서 영화를 기다렸는데 틀면 이 영상부터 나와~
허준: 근데 저는 제가 얼마나 순수 했냐면 저게 모든 비디오에 나오잖아요. 근데 약간 춤추는 여성의 실루엣에 가슴이 두근 거렸던~
이시원: 실루엣을 보지 말라는 광고인 거예요?
허준: 맞어 맞어
최원정: 근데 호환 마마 호환 마마 얘기 우리 아직 까지도 하잖아요.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 어쩌구 저쩌구 공포의 관용어 처럼~
이시원: 저 진짜 이해가 안가요. 이 영상이랑 이 주제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에요?
최태성: 일단 호환은 뭔지 알아요?
이시원: 호환이 두렵지 않냐? 그건 후환인데
최태성: 호환(虎患)은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
이시원: 마마~할 때 마마 마마?
허준: 마마는 병 아니에요?
최태성: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광용: 그 마마가 오늘의 정답입니다. 마마(媽媽)가 뭐냐 바로 천연두예요. 만주인들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불렀습니다.
허준: 만주어예요?
박민수: 원래 만주어로 마마(mama)는 나이든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거든요. 만주인들은 샤머니즘을 믿었고 또 천연두를 극도로 두려워 했기 때문에 천연두에 걸리는 걸 여신의 노여움, 그래서 저주를 받았다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마마라고 이름을 부친 거죠.
이광용: 왜 만주인 청나라 사람들은 천연두를 극도로 두려워 했을까요? 한의학 박사인 김남일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교수님, 천연두(天然痘)가 정확하게 뭔가요?
김남일/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천연두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어간 질병입니다. 그게 일종의 전염병이죠.
허준: 코로나19보다 더 많이?
김남일: 그럼요, 옛날에는 두창(痘瘡)으로 불렸어요. 두창이라 하면 广 병질 엄+ 豆콩두 자가 들어갔죠. 왜냐면 이것이 발열, 두통, 구토 각종 증상이 나타나는데 피부로 발짝이 나타나면서 콩처럼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종기가 부풀어 오르겠죠. 그리고 나서 그것이 고름이 지게 됩니다. 고름이 지면 딱지가 생기고 그걸 긁으면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옛날에는 얼굴에 딱지 흉터를 곰보라고 불렀죠. 이게 공기를 통해 감염 전파되는 질병이기 때문에 전파력이 심각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죠.
이광용: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천연두 초기 당시 치사율이 30%가 되었대요.
허준: 30%나요?
이광용: 천연두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공포가 어느 정도 되었을지 대략이나마 짐작이 가시죠. 이 무시무시한 천연두가 바로 병자호란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박민수: 맞습니다. 아까 느긋했던 홍타이지가 갑자기 180도 바뀐 이유가 최근에 한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 때문일 거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병자호란과 천연두/구범진(2016)-홍타이지의 변심/천연두가 원인이라고 입증), 청태종실록에 따르면 병자호란이 끝나고 홍타이지가 전쟁 중에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는데 (청태종실록/숭덕 2년(1637) 6월 27일-마마에 걸렸다 [出㢄]는 사실을 들었고…끝내 밝히지 않은 채 그대로 군영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는) 황제가 머물던 곳과 서로 가까웠다), 이걸 보고를 안했다 라는 죄명을 부치거든요. 심지어 그 사람을 홍타이지가 머물던 가까운 곳에 잔류시켰다 라는 죄목을 묻습니다. 또 결정적인 증거로 홍타이지가 부하들과 나누었던 대화들 중에서 자기가 일찍 귀국한 이유를 두고 피두선귀(避㢄先歸), 천연두를 피해 먼저 돌아왔다 라고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청태종실록/숭덕 2년(1637) 7월 5일-조선이 평정됨으로써 피두선귀하였는데,…기율이 엉망이었다).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청군 내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한 거네요. 그 당시에 거리두기 라든지 방역이라든지 이런 개념이 없었을 때니까 일단은 도망가고 봐야죠.
최원정: 그런데 천연두가 전부터 있었잖아요. 한 번 생기면 면역력이 생긴다고 알고 있는데~ 홍타이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상황인 거죠?
김남일: 그렇습니다, 천연두를 한 번 앓고 나서 면역이 획득된 게 숙신(熟身)이라고 그럽니다(천연두 면역 O) 익숙할 熟자를 써 가지고 이미 그 병에 익숙해진 몸이다. 그런데 그런 건 전혀 앓지 않은 사람은 생신(生身)이 되는 거죠 (천연두 면역 X). 홍타이지는 아마도 생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면역력이 없는 아직 앓기 전이죠.
이광용: 생몸!
김남일: 네, 그런 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최원정: (본인에게) 코로나 숙신, (이시원에게) 코로나 생신
이시원: 저 아직 코로나 생신이에요.
허준: 그런데 청나라는 16세기 넘어서인데 아직도 치료법이나 이런 것에 대한 연구가 안 되었던 거예요?
김남일: 15세기 정도되면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서 인두법이 중국에서 개발이 됩니다. (人豆法-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 등을 피부에 문지르거나 코로 흡입해서 면역을 획득하는 예방법), 천연두를 앓았던 사람의 옷을 입어 가지고 살짝 천연두 면역력을 가볍게,
허준 예방접종?
김남일: 예방접종의 개념이네요, 그 다음에 16~17세기가 되면 중국에서는 그게 상당히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또 허준 선생님이 1608년 무렵에 <언해두창집요> 이란 책을 만듭니다. 천연두를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그런 방법을 미리 강구해 놓으셨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병자호란을 맞이한 것이고 청나라는 어떤 상태에서 천연두를 맞이 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굉장히 심각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최태성: 혹시 이 천연두가 확산되었을 때 내가 만든 잔칫상이 다 망가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빨리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겠네요.
박민수: 청나라도 가장 두려워했던 게 바로 균, 천연두였는데요. 실제로 홍타이지의 아들인 순치제(順治帝)도 24세에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하구요. 19세기 후반에 황제인 同治帝도 20살에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합니다. 그 만큼 이 천연두가 만주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죠. 그래서 청군이 전쟁에 나설 때도 천연두 발병 위험이 있는 곳에는 천연두를 한 번 앓았었던 천연두 항체가 있었던 장수들만 보낸다는 원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태성: 숙신 장군
이광용: 오늘 천연두와 관련해서 상세한 정보를 전해주신 김남일 교수님 고맙습니다.
일동: 고맙습니다.
이광용: 천연두 때문에 시간에 쫓기기 시작한 청군은 조선 조정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서 전쟁의 종결을 서두릅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완전히 둘려 싸여서 고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협상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축년 1637년 정월 30일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왕의 옷이 아닌 하급 관리의 남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을 나서게 됩니다. 이어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삼궤구고두 의식을 치르게 돼죠.
최원정: 인조는 괴롭겠지만 어찌 보면 천연두 덕분에 전쟁을 빨리 종결 시킬 수 있었던 거잖아요.
허준: 청군에 천연두가 퍼졌다 더라 이건 정말 놔두면 홍타이지도 걸려 죽고 다 걸려 죽을 꺼야 버티면 우리 이길 수 있어, 희망이 있으면 사실은 상황이 어떻게 바뀔 수 있었을지 모르지요. 근데 이런 정보가 없으니까 다들 그냥 무서워서 떨고만 있었던 거예요.
박민수: 이 천연두 이야기는 사료에 입각해서 새로 발견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마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최태성: 그러면 교수님, 그 전에 홍타이지가 조급하게 협상을 서둘렀던 기존의 학설은 뭐가 있어요?
박민수: 그런 이야기들이 전혀 없었죠. 그리고 그냥 남한산성에서 식량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왔다 라고 이야기만 했었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국서가 오고 가는 상황에서 청군 측이 급하게 결정을 내리라고 하는 그 부분을 이제 사료를 가지고 규명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천연두 일거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거죠.
최원정: 최근이라고 하면 언제 나온 학설 이에요? 왜냐면 제가 한 9년전 (49회 참고) 우리 이런 얘기 했을 때는 아무도 얘기 안 해주었습니다. 바로 2017년 발표된 논문 병자호란과 천연두/구범진(2016)입니다.
이시원: 천연두가 청군한테는 불행하지만 우리에겐 행운 이었던 거네요.
박민수: 만주족은 이 천연두를 굉장히 무서워 했는데요. 소현세자가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게 돼죠. 그런데 홍타이지가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를 한 달 동안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서야 소현세자를 접견하게 되는 거죠.
최태성: 혹시 거리두기?
이시원: 아~ 입국자 연결 고리 기간?
박민수: 천연두도 코로나 처럼 공기로 전염이 되는 병이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태성: 코로나 겪고 나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이해가 굉장히 빨라요.
이시원: 그러구 보니까 아까 홍타이지가 천연두 때문에 한 달 씩 강화도 공격을 했다고 했잖아요. 강화도는 어떻게 되었어요?
박민수: 수레를 실을 정도로 작은 배를 수십 척 급하게 만들어서 상황이 급해 졌으니까요. 이 만든 배들을 산으로 싣고 가서 산을 넘어서 강화도를 건너가기 위한 가장 수심이 얕고 해협이 좁은 거기에 배를 띄운 겁니다. 근데 그걸 보고 있는 강화도 조선 수군 주력군은 염하수로(鹽河水路-강화 해협을 부르는 말) 에 조류가 굉장히 세요. 그리고 얼음이 얼거든요, 이 조류와 얼음 때문에 조선 수군 주력군이 이 배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에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게 되고 이 소식을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한테 통보하니까 인조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수 밖에 없었죠.
최원정: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천연두가 그렇게 무서웠으면 빨리 귀국하면 되었는데 참 이 사람 끝까지 집요하게 어떻게 해서든지 인조의 항복을 직접 받아보고 싶었던 거잖아요.
박민수: 그만큼 인조의 항복이 홍타이지에게 중요했던 거죠. 우리가 처음에 봤었던 장면있죠.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삼궤구고두를 거부했던 조선 사신들, 바로 홍타이지는 조선으로 와서 인조에게 직접 삼궤구고두를 받아낸 겁니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협상과정에서 인조의 출성을 굉장히 강조하거든요. 근데 이제 이때 인조는 여러 번 간청을 합니다.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1일-어찌 꼭 臣이 城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이겼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미 신하로써 복종하였으니, 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남한산성 안에서 절하면 안 될까요. 제가 절 하는 걸 백성들이 보면 절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홍타이지는 절대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인조가 직접 나와서 자기 앞에서 삼궤구고두를 해야 바로 홍타이지의 전쟁이 끝나는 거거든요. 실제로 그날 삼전도에서 치러졌던 의례도 9개월 전에 심양에서 열렸던 황제 즉위식을 약식으로 재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허준: 요즘은 들은 바에 의하면 중국 사람들도 머리 카락을 남길려면 머리가 없어질 것이고 머리카락을 없앨려면 머리를 남겨줄게 라고 변발을 강요 당하고~ 청한테 삼전도 굴욕을 당한 이후에 변발하거나 이러지는 않았어요. 우리나라 한테는 그렇게 극악무도하게는 안했나봐요.
박민수: 만약에 홍타이지가 정말로 인조에게 모욕을 줄려고 했었더라면 이 의례를 삼전도가 아니라 서울 도성 한 복판에서 진행했을 겁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들이 인조가 절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고 인조는 더 이상 정상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홍타이지는 인조를 어엿한 한 국왕으로 우대를 해줍니다.
김준형: 저는 오늘 병자호란을 새로운 시작으로 봐서 많은 통찰을 얻었는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외교는 평화를 얻는 가장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결국 외교력도 국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국력을 지키기 위해서 외교력이 필요한 데 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적 사고가 상대국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특히 강대국의 시각을 읽을 수 있어야 된다.
이시원: 저는 치욕을 치욕으로서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 라고 생각해요. 저는 병자호란도 이렇게 치욕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너무 많이 싸여있잖아요. 우리가 이런 걸 잘 알아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애요.
최태성: 많은 분들이 역사라고 하면 좋은 거 신나는 거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역사라고 생각하는 데 아픈 거 상처 받은 거 지우고 싶은 거 조차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 그것이 역사가 아닌가. 오늘의 이야기는 그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박민수: 그간 병자호란에 대한 논의는 조선측의 기록에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인 청측의 상황도 우리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전쟁의 책임은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해자 탓이죠. 아직도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갈 길이 아직 멉니다.
최원정: 5년전의 자료로 새롭게 병자호란을 소개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98회 신제국의 탄생, 청나라 ④ 홍타이지의 총력전, 병자호란 에서 정리).
① 1636년 병자년 12월, 최정예 기병으로 구성된 청의 선봉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조선을 향해 질풍노도처럼 내려온 그들은 불과 6일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인조는 시신이나 오물을 내보내던 수구문을 통해 가까스로 도성을 탈출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뒤쫓아온 청군에 의해 강화도 파천길이 막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그곳에 고립되고 만다. 병자호란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청태종 홍타이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운 총력전이었다. 병자호란(1636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평가되는 전쟁이다. 병자호란하면 병자년에 오랑캐에게 치욕적으로 진 전쟁,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홍타이지가 모든 걸 쏟아부었던 총력전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교사들도 임진왜란을 가르칠 때는 이순신 장군이 등장하는 짜릿한 드라마가 있어서 신나게 가르치는데 그러나 병자호란은 다르다. 어떻게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그 나라한테 우리가 두 달 만에 졌고 우리의 왕이 우리의 땅에서 오랑캐의 군주에게 엎드려 절하는 모습은 빨리 지우고 싶고 얘기 하고 싶지 않은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② KBS 뉴스/2007.2.8: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했던 치욕의 역사가 담긴 문화재 삼전도비를 누가 심하게 훼손했다. 앞면에는 철, 뒷면에는 거, 철거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밤사이 삼전도비에 낙서가 적힌 것을 동네 주민이 발견하고 구청에 알렸다. 그런데 더 아쉬운 건 역사의 교훈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병자호란 그 자체의 실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게 아닌가. 모든 전쟁에는 상대방이 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의 전쟁이다. 특히 홍타이지, 청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이 자신의 정체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홍타이지에게 병자호란이 어떤 의미였는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병자호란을 봤는데 이번에는 청의 입장에서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보자.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지혜가 생긴다. 병자호란은 외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③ 丙子胡亂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첫째는 우리가 외교적 실수를 했거나 뭔가 잘못했을 때 이건 병자호란 이후 외교 참사다 할 정도로 늘 오욕의 역사로 들고 있다. 또 하나는 이게 명청교체기였다. 그래서 친미반중 지금 와서 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된다 라고 항상 등장하는 것이 丙子胡亂이다. 그런데 이런 일 안 당하면 좋은데 이 게 마치 우리 잘못으로 모든 걸 자초했다고 그러면 사실은 침략자가 있는 것이고 전쟁을 일으킨 자의 과실이 사라진다. 일본 얘기를 할 때도 우리 반성하는 거 좋은데 36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 된 게 마치 우리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자초한 전쟁이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패배한 역사지만 배울 건 배우자. 그럼 일단 병자호란 초기 상황을 살펴 보도록 하자. 1636년 12월 8일에 시작된 병자호란은 53일 그러니까 두 달도 채 지나기 전인 이듬해 1월 30일에 끝났다. 그 결과는 조선의 참패였다. 아무리 청나라 군사가 강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까. 지금도 의아하고 궁금하다. 고려시대 비록 패하긴 했어도 그 어마어마한 몽골제국을 맞아서 30년 동안이나 버티며 대몽항쟁을 이어갔었다. 또 임진왜란도 7년간의 전쟁 끝에 우리가 일본을 물리쳤다. 우선 병자호란의 말도 안 되는 결과는 개전 초기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세운 전략에 그 이유가 있다. 바로 직도 전략이다. 直道=제일 빠른 길이라는 거다. 빠른 길로 간다는 것이다. 直 곧을 직 擣 찌를 도 가장 빠른 길로 찔러 들어가듯이 한양을 점령하고 그래서 인조가 강화도 파천을 못하게 도성 안에 가둬 두는 것이 홍타이지의 전략이었다
④ 인조 전에 왕이었던 광해군은 멀리 말을 타고 곧장 찔러 들어 가는 이런 전략을 세워서 도성으로 바로 짓밟아 들어온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지, 광해군 일기/광해 11년 9월 29일-강물이 얼어붙어 적의 기마병이 곧장 쳐들어온다면…(중략) 내 말을 잘 명심하고 한시 바삐 논의하여 처리하라, 이런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라는 왕명이 내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은 알면서도 당했다. 한가지 다른 게 광해군이 長驅直擣(장구직도-빨리 말을 달려 곧 바로 찌르라)를 말 했다고 했는데 국가 지휘관이 인조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300명의 정예 기병을 선발한다. 300명의 기병을 선출하고 두 명의 장수에게 이걸 맡긴다. 그 중에 한 명이 마푸타다. 마푸타[마부대(馬夫大)]-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침입한 청나라 장군,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 때부터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왕래, 길을 잘 안다. 이 300명은 청군 중에서도 가장 기동력이 뛰어나고 전투력이 강한 최정예 기병이었다.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넌 게 12월 8일, 그리고 인조가 있는 한양에 당도한 게 12월 14일, 말 타고 만6일이 걸렸는데 압록강에서 한양까지의 거리가 당시 1200리다. 지금의 거리로 환산하면 500킬로미터, 500킬로미터를 갔다는 얘긴데 2차 대전시 독일의 롬멜 기갑사단의 전격전, 롬멜기갑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장군 롬멜이 이끌었던 사단, 電擊戰-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기동작전, 전격전 때 롬멜의 기갑사단이 하루에 진군한 거리가 70킬로미터다. 이때 당시 70킬로미터면 얼마나 빠른 정도냐면 후방에 프랑스나 영국 병사가 지나가는데 우리 편인가 하고 경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빠른 진격이 70킬로미터인데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거다. 그리고 북쪽은 산이 엄청 많다, 달리기를 비교해 보면 압록강 건너 청군을 보고 내달린 파발마가 청나라의 군사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파발마가 출발을 한다. 도착한 게 12일이고 청군 선봉이 온 게 14일 이다. 이틀 차이다. 파발마 뒤를 계속 맹렬히 추격하였다. 아무 것도 없이 계속 달리는 게 파발마인데 근데 무장을 한 병사들이 이틀 밖에 차이가 안 난다.
⑤ 당시는 충격이 더 컸다. 선봉대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조선 왕실에서는 14일 오전에 접했다. 14일 당일 오전에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인사들을 강화도로 피신 시킨다. 인조와 소현세자도 숭례문을 나왔는데 청나라 선봉대가 홍제동에 당도했다. 그 길로 바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근데 이렇게 파발까지 띄울 정도면 우리나라 군사들도 포진해 있다가 그때 그때 막아서고 전투를 벌이고 충분히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왜 통과하게 놔뒀나. 그런데 병자호란에 대비하면서 조정에서는 淸野入保라고 하는데 들판을 비우고 모든 군사력과 민간인은 성에다 집어 넣는 거다. 그런데 정묘호란 때나 병자호란 때나 청군의 행동이 달랐다. 정묘호란 때는 성들이 있었다. 진군을 하면서 성들을 다 격파를 하고 약탈을 하면서 조선군과 교전도 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은 한 마디로 교전을 벌이면서 간 게 아니라 패싱하고 지나가 버린 거였다. 청군에게 하이 패스 전용도로를 깔아준 것이었다. 또 하나의 비밀 전략이 있었다. 청나라 선봉대 하면 갑옷-무기를 갖춘 군인의 복장이었을텐데 홍타이지는 선봉대한테 명령을 내린다. 상인처럼 갈아 입어라. 만문노당-상인처럼 가장하여 밤낮 없이 달려가 조선의 왕이 사는 王京성을 포위하라. 당시에는 수백명씩 사신을 따라서 상인들이 다니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상인 복장으로 가라 입고 밤낮을 달려서 가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신들이 어디로 가나보다 뭐 사러왔구나 정도로 무심코 지나 보냈을 것이 높다. 소련이 북한을 도울 때 전쟁에 참여하는 걸 숨기기 위해서 비행기도 북한 비행기로 다 색칠하고 북한 공군과 간단한 교신도 한국말로 했었다.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한양에 당도한 청나라 선봉대, 비록 조선의 왕인 인조를 한양 도성안에 가두지는 못했지만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는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선봉대에 이어서 청나라 본진이 속속 압록강을 넘어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⑥ 홍타이지는 준비를 많이 하였다. 파천을 막겠다고 직도전략 패싱전략 상인으로 변장까지 해서 엄청 힘썼다. 당시 조선군의 핵심 방어전략은 적이 침략하면 일단 산성 안으로 들어간다. 왜냐면 청군의 팔기병은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기동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산성으로 올라가서 방어를 하는 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 결과 평지의 길은 뚫려 버리고 청군은 굳이 산성을 공격할 생각이 없고 그러니까 조선군은 자신의 핵심적인 방어전략을 그대로 따라한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어찌 보면 홍타이지는 조선의 이런 방어 전략까지도 다 알고서 이런 전략을 짠 거다. 인조만 보고 그만 직진 했으니 조선은 왜 플랜B가 없었을까. 모든 가능성을 대비했었어야 되는데 남한산성에도 당시 사람들이 꽤 산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에 투입된 청군은 한 2만 2천명 정도였다. 거기에 동맹군으로 같이 참전했던 몽골군이 한 1만 2천명 도합 3만 4천명 정도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사실 삼전도비문에는 10만 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또 우리 기록에는 12만 8천명 이라 적혀 있는데 숫자상으로 봐서는 과장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청군의 병력은 조선측 기록이 아니라 청측의 기록을 기반으로 해서 봐야한다. 3만 4천 명도 우습게 볼 숫자가 아니라 당시 청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의 무려 70%를 다 투입한 거다. 그만큼 총력전이었다. 더 놀라운 건 새로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직접 진두지휘를 하였다.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른 뒤에 직접 적국 땅 깊숙히 까지 쳐들어온 건 병자호란이 유일무이하다. 홍타이지가 최대 병력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선 이유가 도대체 뭘까.
⑦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인 병자년 4월,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대청제국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황제 즉위식에서 만주와 몽골인 투항한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모두 홍타이지를 향하여 삼궤구도두의 예를 갖춘다. 하지만 조선에서 온 사신 두 사람만은 즉위식이 진행되는 동안 끝까지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사신의 배례 거부에 분노한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을 결심한다. 병자호란의 시발점이었다. 황제 즉위식 날 조선 사신들이 저랬으니 굉장히 분노하였다. 근데 정확히 이게 어떤 자리였나. 홍타이지가 새로운 尊號 만주어로는 암바(amba) 게부(gebu) 큰 이름을 신하들로 부터 받는 자리였다. 특히 이때 홍타이지는 여진들의 최고 지도자 한(han), 몽골을 통치하는 칸(khan), 그리고 한족을 통치하는 황제로써 추대를 받는 자리였다. 누르하치가 세웠던 후금이 여진으로만 구성된 민족기업이었다면 홍타이지가 새로 세운 대청, 청국은 만주와 몽골과 한족까지 아우르는 다국적 기업으로 천명을 한 거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女眞으로 불려왔던 이름을 홍타이지가 이제 滿洲 라고 공식화하였다. 한 마디로 女眞族이 滿洲族이 되고 後金이 淸이 되고 다시 태어나는 잔칫날이었다. 滿洲라는 단어는 홍타이지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사실 滿洲 라는 이름은 지명이 아니다. 滿洲族이 만주 지역에 살아서 만주족이 아니다. 홍타이지가 정복과 회유를 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을 포용하여 이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女眞이라는 이름을 빼고 滿洲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쳐준 거다. 근데 제국 선포의 날에 그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내가 다스리는 여러 국가들을 불러서 예의를 다 갖추고 축제를 벌이는데 갑자기 뻣뻣한 채 서 있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은 나덕헌과 이확이라는 조선 사람이었다. 그 당시 어떤 상황이었느냐 하면 홍타이지가 제단에 올라가자 제단에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 그걸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삼배구도두(三拜九叩頭) 이게 끝나고 나서 그 다음 단계는 홍타이지를 대상으로 해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삼배구고두의 예(禮)를 하는 거다 그래서 다들 세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조아리고 있는데 나덕헌과 이확 두 명만 멀뚱 멀뚱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⑧ 사실 나덕헌과 이확은 즉위식에 초청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심양을 방문해야 했던 춘신사, 春信使는 정묘호란 후 매년 봄마다 조선이 후금에 보내던 사신, 그리고 작년에 인조의 인헌왕후에 조문을 왔었던 거기에 대한 화답으로 보냈던 사신이었다. 사실 그 두 명도 의아했을 거다. 자기 미션은 그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절을 하라는 거다. 보통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는데 다 엎드리면 얼떨결에 같이 한다. 근데 여기 나름 한(han)이자 칸(khan)이자 황제의 즉위식인데 절 안하면 큰 일 나는 거다. 가만 있어 봐 황제가 즉위 한다구 내가 여기서 절하면 저 오랑캐를 인정하는 거잖아 이러면 나는 조선으로 돌아와도 죽어 이런 생각을 한 면도 있다.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 상황이다. 그럴 거 라면 차라리 조선의 명예를 지키고 죽는 게 낫다. 결과를 알고 거꾸로 보니까 이 사람들 조금만 잘 했으면 전쟁이 안 날 수도 있었다 라는 결론으로 가는데 절을 했어도 문제가 됐다. 이 지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당시 청의 국제적 지위가 강국으로서 이걸 파악하지 못했다는데 가장 문제가 있다. 나라를 지키고 안보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만이 억울한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그 당시에 즉위식이라는 국제적 의미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게 훨씬 더 큰 문제였다. 사실 여진이라고 그러면 옛날에 윤관 장군이 정벌하던 걔네들 우리가 봐주고 달래고 했던 걔네들 걔네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릎을 꿇어 조선 사신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근데 그들이 변했다. 그거를 몰랐다, 조선의 인조는 청의 입장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삼궤구고두는 만주족의 전통 의식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보면 이제 만나서 안녕 하는 거랑 같은 인사인 거다. 인사 중에서 가장 격식이 높은 것이다. 한 번 절한 걸로 부족하니까 세 번을 절하고 세 번 절하는 것도 모자라니까 한 번 절 했을 때 세 번 꽝꽝 조아려서 三跪九叩頭가 된다.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니 저런 해괴망측한 인사법이 다 있어 하지만 만주족에게는 굉장히 오래된 전통 인사법이었다.
⑨ 조선 사신들이 삼궤구고두 절을 못 했던 이유는 있었다. 홍타이지가 제단에 예를 취한 다음에 축문을 읽었다. 축문에 조선을 정복했고 몽골을 통일하였으며 원나라 옥쇄를 획득했다. 청태종실록/1636년 4월 11일에 황제가 된 명분 중의 하나가 조선 정복이란 말이 있다.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저걸 들은 거다. 무슨 소리야, 조선을 정복했다고, 분명히 정묘호란 때는 군신관계가 아니고 형제관계였다. 근데 갑자기 축문을 읽으면서 조선을 정복했다. 내가 여기다 절을 한다 이거는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이고 황제라고 인정하는 순간 군신관계를 인정해 버리는 거다.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본인이 결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상황이 굉장히 중대했다, 兄弟에서 君臣으로 자칫 인정해 버릴 수 있는 너무 중차대한 순간이었다. 明과 淸 사이에서 절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다. 그 자리에서 안 했다고 하더래도 뒤에 끝나고 나서 조선에서 갔었어야 했다. 우리 사신들이 그걸 파악을 못했다. 비밀리에 보내서 거기에 대해서 결례를 사과 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외교다. 그런데 인조는 안 했다. 그 상황은 분명히 딜레마 상황인데 외교에서 국익을 위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또 홍타이지 입장에서 보면 굳이 조선을 정복했고 저 말을 넣어서 사단을 만들어야 했나. 내가 오늘 즉위했다 했으면 됐지 왜 꼭 조선을 정복했고 라는 말을 넣어야 했을까. 모든 책임을 조선 사신에게만 보낼 수 없다. 이건 홍타이지가 잘못을 한 것이다. 조선은 군신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다. 그건 일방적인 선포였다. 홍타이지나 명나라나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칭제, 황제를 칭한다 라는 말을 굳이 넣은 것은 아무래도 이게 무리수인 걸 스스로 알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신들에게 이런 걸 강요했던 것은 명나라에게 가장 충성을 보이고 있었던 조선 사신의 인정을 받으면 칭제의 명분이 서겠구나 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이걸 조선 사신이 받아 들이지 못하였다.
⑩ 홍타이지는 외교적 갑질을 하고 있었다. 그 갑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을이 잘못 됐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어찌 됐건 조선 사신이 그 자리에서 예를 거부 했고 그럼으로써 홍타이지가 생각했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게 된다. 원래는 장엄한 의식 속에서 한(han)이자 칸(khan) 이자 황제로서 즉위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조선 사신이 예를 올리지 않으니까 그것이 거짓말 이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적나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머릿 속으로 이런 상황이면 조선 사신도 엎드려 절할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자신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선비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이다. 한 편 이해는 된다. 여기서 외교적 아쉬움은 있어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꾸면 안 된다. 지금 분명히 조약을 어긴 쪽은 청이다. 홍타이지는 고단수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신을 죽여 버리면 조선에 구실을 만들어준다. 맹약을 깨는 걸 청이 먼저 깨는 게 되는 것이다. 신하들의 처벌 주장에도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대신에 이 상황을 꾸짖는 편지를 들려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용히 전쟁 준비를 하다가 즉위식이 있었던 8개월 후에 조선을 침공하였다. 그야말로 병자호란은 바로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즉위식 장면이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구겼다.홍타이지는 한 수 앞도 내다보고 분노를 참고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명분을 만들었다. 분노 조절을 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지금 4월에 쳐들어가면 한 방에 직도를 못한다. 한참 따뜻한 시절이다. 겨울에 쳐들어가야지, 지금은 죽이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을 했다.
⑪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 거부가 조선침공으로 이어졌다.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남한산성에 만 명 넘는 병력이 있었다. 밖에는 청군이 한 3만 4천명 정도가 결집한 상황이었다. 왕이 지금 갇혀 있는 상황이니까 전국에 있는 근왕병들이 몰려오기는 하였다. 청군한테 가서 싸우기는 해야 하는데 청군이 워낙 강했다.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남한산성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정보는 차단되었다. 정보가 차단되면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모든 작전 준비를 마쳤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공격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가 청군은 34문의 홍이포도 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쏠 수 있다. 조선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됐다. 당시에 조선측 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에 모아 놓았던 식량이 2월 20일 정도까지 버틸 수 있었다. 조선 식량사정을 홍타이지는 알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복에 진심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하고 홍타이지 청나라하고 주고 받은 문서를 보면 홍타이지측은 굉장히 느긋했다.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일-짐(朕)이 정벌하러 온 것은…그대 나라가 먼저 불화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항복을 종용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일-(청측국서) 항거하는 자는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받아들일 것…귀순하는 자는 해치지 않고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비꼬기도 하고 계속 이런 뉘앙스였다.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3일-(조선측 국서) 지난 일에 대한 죄는 알고 있습니다.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반면에 겨울이고 식량 부족에 조선은 급했다. 전쟁 중에도 외교하고 협상도 해야 된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바람직했다. 지금 처럼 남북이 완전히 대화가 끊기면 굉장히 위험하다. 그러면 이제 최후를 생각해야 된다. 피해를 줄이고 백성을 보호해야 되는데 내부에서는 여전히 척화파와 주화파가 국제 정세도 모르고 싸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멘탈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더 무서운 건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한 명의 지원을 끊기 위해서 이미 병자호란 5개월 전에 명을 침략한 적이 있었다. 몽골초원을 우회해서 한 번 명을 약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명군이 쉽사리 조선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명과 병자호란의 명은 달랐다.
⑫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측 기록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정월 17일 어제 까지만 해도 느긋한 태도를 저들이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사신을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 있는가 보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완전히 180도 바뀌어서 조선에다 빨리 협상 테이블에 나오라고 압박을 한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사신을 빨리 보내라고 한밤중에 사람을 보낸다. 이거는 청이 지금 불리해졌다는 얘기다. 홍타이지의 원래 계획은 계속 남한산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강화도를 2월 중순에 함락을 시켜서 인조를 계속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하들한테도 2월 15일까지 배를 만들어 놓고 전쟁준비를 다 해놓으라고 지시를 해놓았다. 그런데 강화도 공격을 한 달이나 앞 당겨서 정월 20일에 진행시킨다. 너무 이상하다.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유리한 싸움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급해진 건 정말 큰 일? 계산을 잘못했나? 홍타이지가 협상을 서두르는 이유가 과연 뭘까? 느긋했던 홍타이지가 갑자기 180도 바뀐 이유가 최근에 한 연구에 따르면 천연두 때문일 거란 이야기가 나왔다. 청태종실록에 따르면 병자호란이 끝나고 홍타이지가 전쟁 중에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청군 진영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는데 이걸 보고를 안했다. 심지어 그 사람을 홍타이지가 머물던 가까운 곳에 잔류시켰다 라는 죄목을 묻는다. 또 결정적인 증거로 홍타이지가 부하들과 나누었던 대화들 중에서 자기가 일찍 귀국한 이유를 두고 피두선귀(避㢄先歸), 천연두를 피해 먼저 돌아왔다 라고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청군 내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는 거리두기 라든지 방역이라든지 이런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천연두는 전부터 있었다. 한 번 생기면 면역력이 생기는데 홍타이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천연두를 한 번 앓고 나서 면역이 획득된 게 숙신(熟身)이라고 한다(천연두 면역 O) 익숙할 熟자를 써 가지고 이미 그 병에 익숙해진 몸이다. 그런데 그런 건 전혀 앓지 않은 사람은 생신(生身)이 된다 (천연두 면역 X). 홍타이지는 아마도 생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면역력이 없는 아직 앓기 전이다. 그런데 청나라는 16세기 넘어서인데 아직도 치료법이나 이런 것에 대한 연구가 안 되었다. 15세기 정도되면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서 인두법이 중국에서 개발이 된다. 人豆法-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 등을 피부에 문지르거나 코로 흡입해서 면역을 획득하는 예방법,
⑬ 16~17세기가 되면 중국에서는 인두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 허준 선생님이 1608년 무렵에 <언해두창집요> 이란 책을 만든다. 천연두를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그런 방법을 미리 강구해 놓으셨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병자호란을 맞이한 것이고 청나라는 어떤 상태에서 천연두를 맞이 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청은 심각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혹시 이 천연두가 확산되었을 때 내가 만든 잔칫상이 다 망가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빨리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겠다. 청나라가 가장 두려워했던 게 바로 균, 천연두였다. 실제로 홍타이지의 아들인 순치제(順治帝)도 24세에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하였다. 19세기 후반에 황제인 同治帝도 20살에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했다. 그 만큼 이 천연두가 만주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청군이 전쟁에 나설 때도 천연두 발병 위험이 있는 곳에는 천연두를 한 번 앓았었던 천연두 항체가 있었던 장수들만 보낸다는 원칙을 세우기도 했다. 천연두 때문에 시간에 쫓기기 시작한 청군은 조선 조정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서 전쟁의 종결을 서두른다. 조선 입장에서도 완전히 둘려 싸여서 고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협상제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1637년 정월 30일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왕의 옷이 아닌 하급 관리의 남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을 나서게 되었다. 이어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삼궤구고두 의식을 치르게 돼었다.
⑭ 인조는 괴롭겠지만 어찌 보면 천연두 덕분에 전쟁을 빨리 종결 시킬 수 있었다. 청군에 천연두가 퍼졌다 더라. 이건 정말 놔두면 홍타이지도 걸려 죽고 다 걸려 죽을 꺼야 버티면 우리 이길 수 있어, 이런 정보를 알았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근데 이런 정보가 없으니까 다들 그냥 무서워서 떨고만 있었다. 이 천연두 이야기는 사료에 입각해서 새로 발견한 내용이다.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홍타이지가 조급하게 협상을 서둘렀던 기존의 학설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냥 남한산성에서 식량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왔다 라고 이야기만 했었다. 국서가 오고 가는 상황에서 청군 측이 급하게 결정을 내리라고 하는 그 부분을 이제 사료를 가지고 규명을 했다. 그게 바로 천연두 일거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거다. 바로 2017년 발표된 논문 병자호란과 천연두/구범진(2016)이다. 천연두가 청군한테는 불행했지만 조선에겐 행운이었다. 만주족은 이 천연두를 굉장히 무서워 했다. 소현세자가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게 됐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를 한 달이 지나고서야 접견하게 되었다. 천연두도 코로나 처럼 공기 전염이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홍타이지가 천연두 때문에 한 달 일찍 강화도 공격을 했다. 상황이 급해 졌으니까. 수레를 실을 정도로 작은 배를 수십 척 급하게 만들게 했다. 이 만든 배들을 산으로 싣고 가서 산을 넘어서 강화도를 건너가기 위한 가장 수심이 얕고 해협이 좁은 거기에 배를 띄웠다. 근데 그걸 보고 있는 강화도 조선 수군 주력군은 염하수로(鹽河水路-강화 해협을 부르는 말)에 조류가 굉장히 세다. 그리고 얼음이 언다, 이 조류와 얼음 때문에 조선 수군 주력군이 이 배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에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게 되고 이 소식을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한테 통보하니까 인조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⑮ 홍타이지 입장에서는 천연두가 그렇게 무서웠으면 빨리 귀국하면 되었는데 끝까지 집요하게 인조의 항복을 직접 받아보고 싶었다. 그만큼 인조의 항복이 홍타이지에게 중요했다. 홍타이지의 즉위식에 삼궤구고두를 거부했던 조선 사신들, 바로 홍타이지는 조선으로 와서 인조에게 직접 삼궤구고두를 받아낸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협상과정에서 인조의 출성을 강조하였다. 근데 이제 이때 인조는 여러 번 간청을 한다. 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1일-어찌 꼭 臣이 城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이겼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미 신하로써 복종하였으니, 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남한산성 안에서 절하면 안 될까요. 제가 절 하는 걸 백성들이 보면 절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홍타이지는 절대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인조가 직접 나와서 자기 앞에서 삼궤구고두를 해야 바로 홍타이지의 전쟁이 끝나는 거다. 실제로 그날 삼전도에서 치러졌던 의례도 9개월 전에 심양에서 열렸던 황제 즉위식을 약식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청한테 삼전도 굴욕을 당한 이후에 변발하거나 이러지는 않았다. 홍타이지는 조선한테는 그렇게 극악무도하게는 안했다. 만약에 홍타이지가 정말로 인조에게 모욕을 줄려고 했었더라면 이 의례를 삼전도가 아니라 서울 도성 한 복판에서 진행했을 거다. 그러면 모든 백성들이 인조가 절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고 인조는 더 이상 정상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없었겠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인조를 어엿한 한 국왕으로 우대를 해줬다.
⒜ 우리는 병자호란을 새로운 시작으로 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 외교는 평화를 얻는 가장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결국 외교력도 국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국력을 지키기 위해서 외교력이 필요한 데 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적 사고가 상대국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특히 강대국의 시각을 읽을 수 있어야 된다. 치욕을 치욕으로서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 병자호란은 치욕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너무 많이 싸여있었다. 우리가 이런 걸 잘 알아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라고 하면 좋은 거 신나는 거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역사라고 생각하는 데 아픈 거 상처 받은 거 지우고 싶은 거 조차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 그것이 역사가 아닌가. 그간 병자호란에 대한 논의는 조선측의 기록에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상대편인 청측의 상황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전쟁의 책임은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해자 탓이다. 아직도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갈 길이 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