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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56
12월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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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회 기초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을 흐리게 만든다더니, 사이비가 확실한 자칭 목사 한명이 한국 개신교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전체의 얼굴에 열심히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거짓 목자들과 예언자들, 삯꾼들이 등장해 세상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곤경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감언이설과 미사여구입니다. 참 예언자들과 뚜렷히 구분되는 것은 그 가르침이 너무 황당하다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를 탐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공포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과 성공만을 추구하지 양떼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인 덕행인 겸손과 자기 낮춤과는 거리가 멉니다.
행동 하나하나를 따지고보니, 지금 마치 자신이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태극기와 마이크를 잡고, 아슬아슬, 얼토당토않은 위험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 자칭 목사는 백퍼센트 삯꾼이요, 거짓 목자가 확실합니다. 며칠 전에는 성령까지 모독하는 죄까지 지었더군요. 성령의 음성을 들었는데, 대한민국이 곧 망한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그 숱한 외침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끝까지 남은 우리나라입니다. 일개 정신나간 사이비 목사의 헛소리 한 마디에 망할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목자와 삯꾼 사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제자와 배반자 사이는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우리의 근본, 우리의 기초를 지속적으로 스승 예수님께 두지 않을 때, 우리는 순식간에 삯꾼으로 전락합니다. 잠시라도 겸손의 덕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금새 거짓 예언자로 추락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딱! 붙어있지 않을때, 우리는 금방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한 사도의 삶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 옆에 딱 붙어 있었습니다. 어딜가나 그분 옆에 서 있었고, 그분이 앉는 곳 바로 옆에 앉았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보여준 요한 사도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스승님을 극진히 사랑했고 흠모했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복음 13장 23절)
보십시오. 요한 사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스승님께서 떠나실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더 찰싹 예수님 가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스승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하는 그런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스승으로 모셨던 세례자 요한의 추천으로 베드로,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 제자단의 최초 멤버에 가입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요한 사도는 주님의 거처를 찾아간 시각까지 잊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복음 1장 39절)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요한 사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도 그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총애(寵愛)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셨을 때나, 타볼산 위에서 변모하실 때에도 주축 멤버인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수난의 때가 이르러 스승님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셔서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자 야고보 사도는 도주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처에 머물렀지만 세 번씩이나 결정적으로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만은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골고타 언덕 십자가 밑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 사도에게 있어 평생에 걸친 화두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틈만 나면 사랑을 외쳤습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입만 열면 “서로 사랑하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교회 기초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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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2)독차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사도 요한은 12사도 가운데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에 이어 야고보와 함께 일찌감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핵심 사도단의 일원이 됩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각별한 제자, 핵심 브레인, 최측근으로 활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주 이 세 제자만 따로 불러 논의를 하셨고,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특별제자교육도 실시하곤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던 초기, 아직 세상물이 덜 빠졌던 시기, 이 세 핵심 제자들은 때로 인간적인 마음에 상대방을 경쟁관계로 설정함으로 인해 서로의 관계가 권력다툼 양상으로 치닫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로 싸우다 예수님께 들켜 호되게 야단맞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약점은 상당했었습니다. 성격이 담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급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성격이 과격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뿐만 아니라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요한에게 중책을 맡겨 달라"고 당부하는 것을 봐서 요한 가족이 은근히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한몫 잡아보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장점 한 가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요한은 점점 예수님께 빠져 들어 갔고, 조금씩 그분의 정체를 파악해나가면서 완전히 그분께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독차지하려다가 다는 제자들로부터 눈총도 숱하게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다고나 할까요. 복음서에 제시된 요한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저술한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표현한 반면,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냥 단순하게 베드로, 야고보와 같이 이름만 거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해서든 더 예수님 가까이 머물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한평생 노력했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자주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듣곤 했지만 베드로 이상으로 목숨 바쳐 예수님을 사랑했던 요한이었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의 유언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사도가 요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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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인데 사랑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 있다>
어디를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숨겨진 큰 콤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남편이 눈썹 없는 자신을 싫어하지나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했습니다. 따뜻하기만 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 거지요.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불어와 리어카의 검댕이 연탄재가 여자의 얼굴의 땀과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얼굴을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행동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요한은 믿어야 구원될 수 있는데 믿으려면 반드시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서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보고 믿었다.”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무덤을 보고 그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무덤에서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훔쳐갔다면 피 묻은 수건을 그렇게 잘 개켜놓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로 부활의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을 볼 수 있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요한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을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당신을 따라오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고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하고 짧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보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요한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 믿게 만드는 것을 ‘표징’이라 합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표징이란 제물 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제물을 바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 제물을 사르고, 엘리야가 제단 위에 소를 바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 제물을 사른 것처럼 누군가의 죽음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시게 만드는 것이 표징인 것입니다. 그 표징이 성령강림 때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하루에도 3천 명 이상이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에는 이렇게 성령의 불이 떨어지고 그 성령의 불을 볼 수 있어야만 믿음이 생겨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이름표에 적힌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 위에 머무시는 성령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으로 믿고 자신도 하느님께 속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무름’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아버지께 속했다.”라는 글자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있어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표징을 보면서도 믿음에 다다르지 못하는 이유는 땅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별을 볼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성경을 한 줄도 읽지 않고 1분도 묵상하지 않습니다. 개를 보며 먹을 생각만 하면 목걸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 내내 믿으려면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 사랑의 힘인 성령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 천지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한데도 그 사랑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눈뜬장님이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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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8 :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 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고, 그 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사도 요한을 오늘 기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 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 받던 제자, 사랑의 사도”로 묘사되는 분이다. 사도 요한이 늙어서 강론을 하는데 너무나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하니까, 그 제자들이 좀 싫증이 났다. 그래서 사도 요한에게 이제 사랑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말씀을 좀 하라고 하면서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갔는데 거기에 가서도 역시 사랑하라는 말만 하였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분의 서간을 보면 구체적인 사랑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얼굴에서 수건이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그 당시 제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갖고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살면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일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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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처음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요한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주님과 만남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있었을 때도 기억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예수님에 관한 그 예언자(세례자)의 말을 들을 때 요한과 다른 제자는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습니다. 그 둘은 요한을 남겨 놓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그분과 오후 내내 머물렀습니다. 그 순간들은 영원히 요한과 베드로의 삶에 새겨져 있습니다.
교회 전통은 요한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최후 만찬 때 유일하게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제자로 나타냅니다. 그는 주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하면서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홀로 남겨 놓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왔고 십자가 아래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삼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파스카 이른 아침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가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젊은 요한은 무덤에 먼저 도착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홀로 달려가지 않고, 나이 많은 베드로가 도착하면 안으로 함께 들어가려고 기다립니다. 그는 그제야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둘씩’ 가라고 하셨는지를 깨닫습니다. 베드로를 따라 무덤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주님의 몸이 안치된 곳에 수건과 아마포가 있는 것을 보고, 그분의 몸을 누가 꺼내 가지 않았던 것을 알고 믿습니다. 요한 복음서와 서간들 안에 수집된 그의 증언은 모두 스승님께서 전하신 메시지의 핵심,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설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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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
사도 요한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의 서간문들’과 ‘요한 묵시록’을 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말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또 요한 1서를 쓴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5,13)
사도 요한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복음서와 서간문들과 묵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얻은 지식이나 깨달음을 자기 주관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그저 현세적인 어떤 복이나 누리려고, 즉 영원하지 않은 이 지상에서의 복을 얻어 누리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도대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친 기도를 보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관계, 친교,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풀어서 말하면,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주님과의 일치’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라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끝이 없는 시간’이 ‘영원’인데, ‘영원한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결국 ‘영원’은 어느 누구도 실제로 경험할 수는 없는 시간이고, 믿음 안에서 묵상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영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잠깐이라도 일치를 이루었을 때 평화와 행복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 평화와 행복을 통해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 모습을 본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이 말은, “이대로 여기에서 영원히 지내면 좋겠습니다.”, 또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습니다.”라는 뜻이고,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대로 영원히 누리고 싶다는 인간적인 소망을 나타낸 말인데, 베드로 사도가 ‘영원’이라는 시간을 체험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체험한 ‘하늘나라의 행복’은 ‘영원한 생명의 행복’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그 나라의 삶은, 영원한 의로움, 영원한 평화,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라는 말은 시간적인 영원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벽함’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침해하지 못하는, 또 아주 작은 결점이나 흠이나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의로움, 완벽한 평화, 완벽한 기쁨을 누리는 삶, 그것이 곧 하느님 나라의 삶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동시에 그 삶이 이미 시작된 생활이기도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삶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그 삶이 완성되는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여기서 “영원히 남습니다.”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라는 뜻입니다. 허무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집착하면, 결국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영원하신 주님만 믿고, 주님만 사랑해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1요한 2,24-25) 이 말의 뜻은, “세례를 받을 때 배웠던 가르침들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면,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입니다. 이 말을 단순하게, “믿는 대로 실천하고, 배운 대로 살아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은 참 단순하고 쉬운 생활인데, 우리가 자꾸만 딴 생각을 하고, 딴 마음을 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복잡하고 어려운 생활로 변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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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우현 요아킴 신부님]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원래 어부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두 형제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며, 베드로와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장면인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마르5,37)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마태 17,1)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태 26,37)등에 등장합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13,23)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도 그러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후와 부활 승천하신 뒤에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잡혀가신 후에, 요한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하였으나 바로 되돌아와 용감하게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대사제 집 안뜰까지 들어갔습니다.(요한 18,15-16참조) 그리고 십자가 죽음의 순간 오직 요한만이 예수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요한 19,26-27 참조)
요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병사들 가운데 서서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예수님의 유언을 받은 유일한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요한을 바라보시며,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어,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요한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19,26-27)
열두 사도 중 오직 요한 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고 군인 하나가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과 그 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가 예수의 주검을 모셔다가 장사 지내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지켜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였습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오늘 기념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생애는 예수님과 온전히 함께 한 삶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로 선택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에도 함께한 인물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러한 요한의 모습처럼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만을 위하여 생활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위주로 신앙생활을 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겪는 위기와 고통의 순간일수록 더욱 주님 안에서 함께 그 해답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주님께서 우리 삶의 동반자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요한이 간직하였던 예수님을 향한 오롯한 믿음의 마음을 간직하시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요한이 보여준 모습처럼 우리의 삶속에서도 매 순간 예수님 가까이 머물려는 노력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요한 인생 순간순간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믿고 중요한 삶의 순간 예수님께 의탁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삶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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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정용 베드로 신부님]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입니다.>
사제가 된 지 어느덧 13년이 됐습니다. 사제서품식 때 입었던 제의도 지나온 세월만큼 낡고 빛이 바랬습니다. 문득 세월의 무게를 느낄 때면 제의처럼 그렇게 저도 조금씩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세월의 때가 묻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꼭 삶이 무르익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순례자의 모습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순례자는 몸이 가벼워야 하는 법입니다. 순례자에게 명예의 무게는 곧 치우기 어려운 장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명예의 무게가 쌓이면 순례자는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명예의 손짓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나그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순례자는 무엇보다 자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순례길을 가다 보면 많은 풍요로운 것들을 얻게 됩니다. 경험이 많아지고, 길도 더 훤히 꿰뚫어보게 되고 갖가지 어려움에 대처하는 법도 더 능숙해집니다. 그렇더라도 오로지 자신만을 신뢰하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순례자는 늘 새롭게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순례 여정이 단 하루도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루가 새롭게 열립니다. 하찮게 보이는 길가의 풀이나 들꽃 한 송이라도, 형편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몸을 굽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상엔 귀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 꽤 많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고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만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와 같이 주님의 길을 따랐던 순례자였습니다. 늘 주님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요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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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사랑이기를>
요한 20,2-8 (부활하시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당신이 사랑이기를>
당신이 세상에 온 첫날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날 당신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당신은 세상 전부였지요
그날 당신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께서는 행복하셨을 겁니다
아름다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꺼져 버리는
죄 없는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넘치게 사랑받는 존재랍니다
한 겹 두 겹 삶의 연륜이 쌓여
지금 여기에 당신이 있어요
당신이 걸어온 고귀한 삶의 여정 안에는
기쁨과 희망뿐만 아니라
슬픔과 절망도 함께 녹아 있겠지요
‘역시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 라며
때로는 감탄했을 것이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을 것을!’ 이라며
때로는 가슴을 치기도 했겠지요
사랑받기만을 원할 때
세상은 당신에게 아픔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한없이 사랑할 때에는
당신은 더없이 아름답게 빛났을 겁니다
비록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하고,
당신 자신을 내던지는
쓰라린 고통이 있었다 해도 말이지요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견되었답니다
부활하신 주님 뵙고픈 마음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도 요한처럼
당신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기를
빛나는 첫자리를 아낌없이 내어놓은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처럼
당신이 벗들을 향한 겸손한 사랑이기를
사랑함으로써
오직 사랑함으로써
당신이 참으로 사랑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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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향하여...>
손을 들어서 손톱을 보십시오. 반대로 발을 들어서 발톱을 보십시오. 손톱이 빨리 깁니까? 아니면 발톱이 빨리 깁니까? “손톱은 슬플 때마다 길어지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길어진다.”라고 합니다. 요즘 “왜, 손톱이 잘 길어”라고 말하면 슬픈 일이 많은 것이고, 왜, 발톱이 잘 길어.”라고 말하면 기쁜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손톱은 자주 보고 잘 돌보지만, 발톱은 가끔 보고 잘 돌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힘든 일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늘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손보다는 발을 보고, 손톱보다는 발톱을 많이 보고 돌보시기를 바랍니다. 손보다 발이 아래에 있고, 손톱보다 발톱이 내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려가라고 또 내려가라고요. 그래서 발톱을 보고 만질 때마다 기쁨이 생기고 행복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시대에 우리 교우들끼리 암호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르십니까?”
이 말뜻은 “교우들이 박해 때문에 숲속에 숨어서 하는 기도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바쁘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서로에게 소리쳐 줍시다.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르십니까?”
그러므로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고운님들의 예수님의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이제 성탄 팔일 축제일을 지내면서, 아무리 바빠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아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로써 은혜받고, 감사로서 즐겁고 만사형통하는 인생”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부르는 성 요한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 사도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요한 사도는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예수님이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그래서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보지도 않고 그냥 달려왔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즉, 교회의 반석이라 불리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는 특권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요한 사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자 중에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였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매일 미사를 보면, ‘주간 첫날….’이라고만 했는데, 성경에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을 찾아간 시간이 새벽이 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무덤에 달려간 시간도 새벽이었습니다. 그 새벽 시간에 예수님을 모셨던 무덤은 비어 있었고, 그 무덤 자리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새벽에 기도하는 귀중한 시간을 만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은 새벽에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새벽에 예리고 성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기도가 축복의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새벽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영적 일기를 올리는 이 새벽 시간에 고운님들을 향하여 자꾸자꾸 소리쳐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고운님들의 풀밭은 여전히 푸르십니까?”
“예수님의 고운님들의 발톱은 여전히 잘 있습니까?”
특히, 저는 기도와 미사 중에 예수님의 이름을 외쳐 부르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하십시오. 그래서 매 순간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고운님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사랑받는 거룩하고 은총을 충만히 품고 살아가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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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58)
♧♧ 시편 68편 22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수시리라. 당신 원수들의 머리를, 죄 속에 걸어가는 자의 더부룩한 정수리를."
‘걸어가는’ 이라는 말은 ‘가다’는 뜻으로 하느님을 거역하고 능동적으로 죄악을 쫓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정수리’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의지의 근원인 머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를 ‘깨친다.’라는 것은 저들의 악한 궤계(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는 물론 저들의 존재조차도 없애버림을 뜻합니다.(판관기 5장 26절. 참조)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원수들의 완전한 멸망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신명기 28장 35절. 시편 7장 17절. 참조) 이는 실로 악인에게는 무서운 경고를, 의인에게는 희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 시편 68편 23절….
"주님께서 말씀하셨네. 바산에서 데려오리라. 바다 깊은 곳에서 데려오리라."
이 구절의 적용 대상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입니다. 즉, 바산과 같은 높고 산세가 험한 산이나 이와 대조되는 ‘바다의 깊은 곳’에 숨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찾아내어 반드시 그들의 죄과에 대해 보응하실 것이라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는 결국 대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아모스서 9장 2절. 참조)
♧♧ 시편 68편 24절….
"네가 피에다 발을 씻고 네 개들의 혀도 원수들에게서 제 몫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 네가 피에다 발을 씻고...
이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패한 대적의 패배의 철저함과 비참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네 개들의 혀도 원수들에게서 제 몫을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의 살덩이가 개의 먹이가 되듯, 평소에 기세등등하던 대적들이 죽어서조차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실제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이제벨의 비극적인 최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열왕기 하권 9장 36-37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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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 세상에서 잘못 지은 건물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는 스페인의 아파트가 있습니다. 스페인 남동부의 알리칸테라는 도시에 세워진 47층짜리 최고층 아파트입니다. 원래 이 아파트는 20층 높이로 설계되었지만, 도중에 계획이 변경되어 47층 높이가 된 것이지요.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었겠습니까? 설계부터 시작해서 바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아파트 공사가 거의 완성될 무렵 설계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글쎄 21층부터 47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입니다.
설계변경을 하다가 증축된 부분의 엘리베이터를 만들지 않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아무도 이 결함을 모르고 공사를 진행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사도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두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의 말처럼 누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는지 죽어라 달려서 급히 무덤으로 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동시에 부활 역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말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다락방에 숨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떨고 있었던 것이지요.
미리 말씀해주신 부활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당시 그들의 주 관심사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으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비로소 보고 믿게 됩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아직 뵙지 못했지만, 아마포가 벗겨져 있는 것에서 그분의 부활을 미루어 짐작했고, 그때부터 그들은 거룩한 성경이 오래전에 선포했듯이 그분께서 죽음의 족쇄를 끊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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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과 함께(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베드로와 요한이 되어 서둘러 무덤으로 가십시오.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려가십시오. 설가 그대의 발걸음이 더 빠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더 간절히 바라는지 보여드리는 일에서는 승리하십시오.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교부의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많이 반성하게 합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당히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이고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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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교는 역사에 따르면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작은 수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철저한 수행과 정진으로 본인의 해탈을 이루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좋은 수행 방법입니다. 대승불교는 큰 수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해탈도 중요하지만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간다라 문명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역사라는 ‘틀’에서 보면 인도의 불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알렉산더 대왕의 공헌으로 헬레니즘과 만났습니다. 이 새로운 물결은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전해졌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시대에도 전해졌습니다.
신약성서에 2명의 요한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지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했고, 죄 사함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고, 많은 사람이 광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서 그의 설교를 들었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알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구세주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세주는 곧 오실 터인데, 자신은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명은 예수님께 사랑 받았던 사도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사도 요한은 새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갔고, 그분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비슷한듯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머물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금욕과 단식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셨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 세리, 죄인, 여인, 아픈 사람, 백인대장도 만나셨습니다. 단죄하고, 비난하지 않으시고,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자비와 연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전승은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십자가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요한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앞서서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 중요한 일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많은 일들이 다른 이들이 해도 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실수와 잘못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요한사도의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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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의 말씀’과의 친교>
-충만한 기쁨-
어제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에 이어 오늘은 주님의 애제자, 사랑의 사도 요한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중 유일하게 장수를 누렸던 사도로 파트모스 섬에서의 유배후 에베소 교회에서 사목하시다가 100년경 95세로 선종하셨다 합니다. 에베소 교회 사목현장에 대한 사도의 전설같은 실감나는 묘사를 나눕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기력이 쇠한 노사도가 에베소의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지는 어느 늦여름에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지하 예배실에서 힘없이 빙둘러 앉아 있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한마디 말을 내 뱉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ㄱㄷ,8)
그는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할 때 마다 온화한 얼굴로 ‘나의 아들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이에 식상한 에베소 교인들이 “사도님, 왜 똑같은 말씀만 계속 되풀이 하십니까?”라고 그 이유를 물으면, 노 사도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니까.”라고 말했다 합니다.’-
평범하지만 재미있고 실감나는 예화라 인용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이웃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았던 자매님이 저에게 "무엇을 좋아하느냐?" 물었습니다.
“자매님을 좋아합니다!”
이런 비슷한 덕담을 자주 합니다. 빈손으로 찾았던 분들이 미안해 할 때 마다 저는 “형제(자매)님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주저없이 말합니다. 사실 좋은 분들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기쁩니다. 주님도 그러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본질은 말씀이니 바로 하나하나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의 현존이 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좋아합니다!”
이어지는 대답입니다. 사실 좋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찾아도 찾을 수 없다가 필요한 단 하나, 주님뿐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제는 뜬금없이 죽음도 하나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주님의 품’을 상징하는 수도공동체 형제들이 있기 때문이고 새삼 공동체 형제들에 감사했습니다. 아마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 요한도 분명 다음의 제 고백에 공감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오늘 요한 1서를 봐도 얼마나 주님을 사랑한 사도 요한인지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생명이 말씀이, 영원한 생명이 지칭하는 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 아닌 누구를,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겠는지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은 단 하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런 영원한 생명,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과의 ‘사랑의 대결(?)’에서도 제가 볼 때 요한의 승리입니다. 사랑 때문에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도달했고, 사랑의 양보로 베드로 입장 후에 무덤에 들어갔고, 이어 빈무덤을 보는 순간 전광석화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안 요한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사랑한 요한이었고 빈무덤을 보는 순간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그러니 복음의 사랑의 사도 요한은 세 말마디로 요약됩니다. ‘달렸다, 보았다. 믿었다’, 사랑으로 달렸고, 사랑으로 보았고, 사랑으로 믿었던 요한 사도입니다. 이어 사랑의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의 선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친교임을 천명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과의 사랑의 친교에 이어 아버지와의 친교, 성인들과의 친교, 함께하는 형제들과의 친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의 친교가 참으로 충만한 기쁨의 원천이요, 친교의 교회 안에서 친교의 기쁨을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은 물론 형제들과의 친교를 깊게 하시어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시편9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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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요한20,2)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 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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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탄 축제 셋째 날인 오늘, 전례는 우리를 성탄의 기쁨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예수님 신비의 현장으로 종횡무진 끌고 갑니다.
"만찬 때 주님 품에 기대어 있던 요한, 천상 비밀을 계시받은 복된 사도, 생명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네."(입당송)
먼저 오늘 미사는 사도 요한에 대한 노래로 열립니다. 마지막 만찬 때 주님 가슴에 기대어 피 끓는 사랑의 소리와 열기를 고스란히 느꼈던 요한은 모든 제자들이 떠난 십자가 아래를 지킨 충성스럽고 용감한 제자입니다. 성모님을 예수님 대신 모신 선한 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이루실 신비를 엿보고 기록한 묵시록의 저자입니다.
그런데 성탄 축제 중이면서도 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이야기하네요!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요한 20,2)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가 두 제자에게 달려갑니다. 하나는 제자단의 맏형격인 베드로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불리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요한입니다. 오늘 제 눈에는 그들이 각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사랑이 보입니다.
빈 무덤 안에 완전한 비움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한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에게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요한! 오늘 복음 장면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사랑의 고리로 단단히 엮인 이들입니다. 물론 두렵고 당혹스러운 순간이긴 합니다만 모두 안에 사랑이 지배하고 있지요.
제1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요한은 "친교"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1요한 1,3)
과연 사랑의 사도답게 "친교"를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무엇보다도 성부 성자와 나누는 이 친교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려 이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
요한은 관계이신 성삼위 하느님을 감지합니다. 마주하고 함께하고 나누고 사랑하고 받고 내어 주고 섞이고 하나 되는 신비가 친교입니다. 친교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침투하고 받아들이며 너와 나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서로에게 녹아들어 일치로 나아갑니다.
사도 요한의 축일에 예수님께서 거두절미 하시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던지십니다. "나는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한단다. 너처럼..."
사랑의 사도를 기리며 우리도 쏟아지는 주님 사랑에 흠뻑 빠져봅시다. 사랑이신 성 삼위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 하나로 어우러집시다. 이날은 특별히 사랑받았다는 누군가를 목 빼어 부러워하는 날이 아니라 그 사랑에 나를 던져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주님의 친교 안에 들어가 사랑이 됩시다.
하느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나도 사랑이고 너도 사랑,
우리 모두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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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예수님은 이러한 연약한 사람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베드로의 생각은 영광의 그리스도만 생각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되어있는 그리스도였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힐책하셨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이 일을 생각 않는구나!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과연 “베드로가 생각하는 방식에 의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었는가?”
바로 이 베드로는 연약한 우리 인간들의 대표이다. 오늘 뜨겁게 신앙을 고백했다가 다시 돌아서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연약한 사람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즉 지도력이 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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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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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성탄 8부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했고 또한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하였고,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님을 따라 올라갔고,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그분의 아들이 된 제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렇게 잘 단정된 수의와 수건은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한 경비병들의 거짓 증언에 대한 반대 물증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주님이 계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베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빈 무덤’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시에 만납니다. 이토록, 우리는 더없는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신 분을 기립니다.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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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드시어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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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더 사랑스러운 사람>
"예수님의 사랑받는 다른 제자가 있었다."
어머니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시는데 ~ 아픈 정도의 차이가 있듯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개별 차이, 사랑의 척도, 그 수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나는 덜 사랑하느냐고?
왜? 저 사람을 더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을 때 ~
사랑스러운 사람이 어떤 마음일까?
사랑스러운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떠올려보면 삶의 태도가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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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 2)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우리 삶을
끌어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일상생활이
빛나고 깊어집니다.
살아가는 이시간이
바로 신비입니다.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간직한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생명의 순간들은
이와같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며
십자가의 상처까지
사랑의 놀라운 선물로
변화시킵니다.
요한 복음시가는
말씀으로 힘을 얻는
우리들이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하느님 말씀을
향해 두레박을
힘껏 던집니다.
삶의 의미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을 사랑하는
말씀의 자녀들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살아계신 말씀이
샘솟는 성탄의
기쁜 삶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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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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