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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우주론
1) 영향 받은 사상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있음'과 '있는 것'에서, '있음'은 '이데아'로 '있는 것'은 '현상계'로 대응시킨다. 해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만물은 변화한다는 만물유전론의 영향을 받았다.
앰페도클레스의 4원소론도 우주론에 도입한다.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요소와 수학존중(기하학적 원리), 소크라테스의 윤리론을 이어받아 이원론적인 과학을 건설했다.
2) 플라톤 우주론: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코라(우주의 자궁) 그리고 만물들
그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그의 윤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했고, 따라서 그의 과학은 윤리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우주가 도덕적이라는 것을 보여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는 창조신화를 다룬 본격적인 우주창생론이다.
핵심 키워드로 이해하기: 이데아, 형상, 현상, 분유, 에로스, 상기, 코라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유(이성)로만 알 수 있는 세계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란 사물들의 참된 실재인 형상이 존재하는 곳이며, 현실 세계는 그 존재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 세계는 이데아의 자기실현 의지가 나타낸 현상 또는 이데아가 분유되어 만들어진 물질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재에 대한 지식을 소유해야 하며, 그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라고 봤다.
이처럼 세계인 현상으로부터 이데아로 가는 것을 상기라고 하며 이 상기하려는 노력 일체를 에로스라고 부른다. 이 세계가 이데아로부터 분유되었다고 말하는 플라톤 철학의 한계는 위악추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 철학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바로 코라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초에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os)가 있어 우주를 만들었다. 단,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제1원리인 이데아가 있고 제2원리인 코라가 있었다.
코라는 공간이다. 비어 있지만 무엇이 될 수 있는 아페이온이라는 물질로 꽉 차있다.아페이온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코라
코라는 위악추(僞惡醜)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이 말기에 내세운 개념이다.
1) 코라, 플라톤 후기 저작 <티마이오스(대화)>
코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티마이오스>는 이데아가 어떻게 자기를 분유해서 이 세계로 현상하는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내용이 복잡하기에 위악추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만 이해해도 괜찮다. 설명을 이어가자면, 먼저 이데아가 자신을 분유하는 두 가지 원인으로 제1원인 자체성(이데아)과 제2원인 코라가 있다. 제1원인으로서 이데아는 사유의 영역으로 형태와 그 형태를 유지하려는 운동성이 있으며, 제2원인으로서 코라는 감각 세계의 영역으로 형태가 없으며 그 형태를 형성하지 못하는 운동만 있다.
이처럼 형태가 생길 듯 생기지 않는 운동을 타자성 운동, 또는 '방황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이데아가 자신을 분유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데미우르고스(우주이성, 로고스,지성)는 제1원인인 자체성을 통해 형태와 운동을 만들어내고, 제2원인(코라)에게 가서 형태를 '규제'하고, 운동을 '설득'함으로써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질료인 화, 풍,수, 토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질료들을 통해 비로소 형태를 갖는 세계가 등장한다.
다시 말해 이데아의 자기실현은 코라를 통해 비로소 감각 세계로 나타난다. 한편 코라 역시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자기실현의 의지가 있는데, 이는 이데아의 완전한 자기실현의 방해로 이어진다.
이러한 제1원인과 제2원인의 상호작용, 즉 '규제'와 '설득'의 과정에서 위악추가 발생한다.
플라톤은 분유된 정도에 따라 이데아에 충실한 것, 덜 충실한 것 외에 아예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구분한다.
2) 에로스, <심포지온(향연)>
플라톤은 <심포지온>을 통해 에로스 개념을 설명한다. 먼저 앞서 이데아가 분유하는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원인의 일자(자체성)에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우주이성(인간이성/자연이성)이 나오고, 그 우주이성에서 우주영혼(인간영혼/자연영혼)이 나온다. 아직 형태가 없는 우주영혼은 자신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제2원인인 코라를 거친다. 이 코라에서 나온 질료, 화, 풍, 수, 토가 우주영혼과 만나 우주(인간, 영혼)를 만든다. 이 과정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덧붙여, 여기에서도 그리스 철학의 핵심인 항존성이 등장한다. 운동이 반복되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1원인 일자 우주이성 → 우주영혼 → 우주(인간, 자연) ← 화, 풍, 수, 토 ← 제2원인 코라
가운데에 위치한 인간(자연 또는 우주)이 노력을 하면 일자(본, 운동)으로 가는데 이를 '상기'라고 하며, 이러한 노력 일체를 '에로스'라고 한다. 반면 포기하면 코라로 가는데 이름 '페니아(결핍)'이라고 한다
데미우르고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마음대로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형상들(이데아)을 본(本, paradeigma)으로 삼아 제작할 뿐이다. 질료(코라) 역시 재료로 쓰기 위해서는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 신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한쪽으로는 설계도를 따르려 애쓰면서, 다른 쪽으로는 재료들과 씨름하는 장인(匠人)의 모습이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코라를 채우고 있는 아페이온이라는 원질을 가지고 4원소를 만들었는데, 그 구성 방법이 기가 막히게 기하학적이다.
직각이등변삼각형 4개가 모이면 정4각형이 된다. 정사각형 6개로 둘러싸인 것이 정6면체이다. 이 정6면체로 된 것이 흙이다.
따라서 흙은 직각이등변삼각형 24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각이 각각 60도와 30도인 직각삼각형 6개는 정삼각형을 만든다. 정삼각형 4개로 둘러싸인 정사면체로 된 것이 불이다.
공기는 정팔면체(정삼각형 8개), 물은 정20면체(정삼각형20개)로 되어있다. 직각삼각형의 수로 따지면 불, 공기, 물은 각각 24, 48, 120개로 구성된 셈이다. 여기서 중대한 결과가 나온다. 흙은 유독 직각이등변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으나, 불, 공기, 물은 구성성분이 같은 직각삼각형이다. 더구나 그 수를 보면 공기는 불 2개, 물은 공기2개와 불 1개로 되어 있다.
플라톤의 우주론
플라톤의 우주론이 등장하는 「티마이오스』(플라톤의 저서, 대화편중 하나)는 키케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중세 서유럽에 알려진 유일한 대화편이다. 중세와 신 플라톤주의가 유행한 초창기, 다른 대화편보다 『티마이 오스』의 영향이 더욱 컸던 점이 호기심을 자아내는 까닭은 다른 저술보다 단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주장이 훨씬 많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티마이오스』는 철학적 으로 중요하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 영향을 크게 미쳤기 때문에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초기 대화편엔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 부분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이어 받는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수가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라는 견해를 어느 정도까지 포함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학설들이 주로 채용된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 협 동쪽 끝에 솟아 있는 바위 두 개를 가리킨다.) 사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리비아와 소아시아를 합친 규모보다 더 큰 섬이라 전해지는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다음에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 천문학자인 티마이오스가 인간 창조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한다.
세계의 창조
지성과 이성으로 불변하는 존재를 파악하고 의견으로 변화하는 존재를 파악한다. 감각 가능한 세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신이 창조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신은 선하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의 원형에 따라 세계를 만들었다. 또 신은 질투심이 없으므로 만물이 가능한 한 자신과 닮기를 원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가 쉬지 않고 규칙도 질서도 없이 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무질서한 세계를 질서 있 는 세계로 만들었다네.”(『티마이오스』에서) 따라서 플라톤의 신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신과 달리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이전에 존재했던 물질을 재배열했을따름이다. 신은 영혼 속에 지성을, 육체 속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신은 세계 전체를 영혼과 지성을 갖춘 살아 있는 생물로 만들었다. 세계는 하나일 뿐인데, 세계가 하나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까닭은 신이 파악한 영원한 원본과 가능한 한 일치하게 설계하여 창조한, 모사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는 눈에 보이는 한 생물로서 다른 모든 생물들을 전부 자신 안에 품고 있다. 세계가 구형인 까닭은 유사성이 비유사성보다 더 공평하고 구체(球體)만은 어디에서 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회전하는 까닭은 원운동이 가장 완벽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원운동이 세계가 하게 되는 유일한 운동이기 때문에 손과 발은 필요 없다.
4원소인 불, 공기, 물, 흙(동양의 오행은 木火土金水이다.)은 제각기 겉보기에 따라 수로 나타내며, 연비례 관계를 맺어 예컨대 불과 공기의 비는 공기와 물의 비와 같고 물과 흙의 비와 같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때 4원소 모두를 사용했으므로 세계는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이를 먹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비례관계에 따라 조화를 이룬 세계는 우애 정신으로 결속되므로 신이 아니고서는 조화로운 비례를 깨지 못한다.
시간의 기원
신은 먼저 영혼을 만들고 나서 육체를 만들었다. 영혼은 나뉘지 않으면서 변하지 않는 부분과 나뉘면서 변하는 부분 이 혼합된 존재이며, 제3의 본질로서 중간에서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시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행성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이자 조물주는 그 자신이 움직이고 살아 있게 만든 피조물과 창조된 연원한 신들의 영상을 보자 기뻐했으며,
기쁨에 넘쳐 모사한 피조물을 원본과 훨씬 더 닮게 만들려고 결심했다. 조물주는 원본이 영원하듯 우주를 가능한 한 영원한 존재로 만들려 했다. 그런데 이상적인 존재의 본성은 영원성을 지녔으나, 영원한 속성을 완전하게 피조물에게 부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물주는 움직이는 영원한 영상(映像, Image)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하늘을 질서정연하게 정돈할 대수적인 비례에 따라 움직이는 영원한 영상을 만들었으니 영원성 자체는 그대로 불변한다.
이렇게 움직이지만 불변하는 영상을 시간이라 부른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는 낮도 없고 밤도 없었다. 우리는 그 영원한 본질에 대해 존재했다거나 존재 할 것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존재한다고만 말해야 맞다. 이것은 ‘움직이는 영원한 영상'에 대해서는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맞다.(영원한 본질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과 하늘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조물주가 태양을 만들어서 낮과 밤이 연속되게 하여 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낮과 밤, 달과 해를 보면서 수에 대한 지식을 창안했으며, 우리에게 시간 개념이 생겨났고, 여기서 철학이 유래했다. 철학은 우리 시력의 덕택으로 얻은 크나큰 혜택이다.
생물에는 신, 새, 물고기, 육상 동물 이렇게 네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신들은 주로 불로 이루어지며 고정된 별들은 신성한 존재로서 영원한 생물이다. 조물주는 신들을 멸하지 않는다. 조물주는 죽지 않는 신성한 부분을 만들고 나서 다른 모든 생물들의 죽는 부분을 만드는 일은 신들에게 맡겼다.
윤회설
티마이오스의 말에 따르면 조물주는 별마다 영혼을 하나 씩 만들어주었다. 영혼들은 감각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 고 분노할 줄 안다. 만약 영혼들이 감각 같은 성향들을 극복한다면 올바르게 살게 되지만, 극복하지 못한다면 올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잘 살면 죽은 다음에 자신의 별에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나 악하게 살면 다음 생애에 여자로 태어날 것이다. 만약 남녀가 악행을 거듭하면 다음 생애에 짐승이 되어 마침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날까지 윤회를 거듭한다.
제3공간의 이론
흙, 공기, 불, 물은 제일 원리가 아니며 기본 문자도 아니고 기본 요소도 아니다. 4원소는 심지어 음절이나 최소합성물도 아니다. 예컨대 불은 이것이 아니라 이런 것, 말하자면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실체의 상태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성이 파악한본질은 이름일 뿐인가? 답은 정신 mind이 참된 의견trueopinion과 동일한가 아닌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만약 정신이 참된 의견과 동일하다면, 지식은 본질에 대한 지식임이 분명하므로 본질은 단지 이름일 뿐이다. 그런데 정신과 참된 의견이 확실하게 차이를 나타내는 까닭은 전자가 신의 명령으로 주입되는 반면에 후자는 설득으로 주입되기 때문이다. 또 전자는 참된 근거를 동반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이 참된 의견을 공유하지만, 정신은 신들의 속성이며 극소수 인간만이 지니는 속성이다.
이러한 논의는 본질계와 무상하게 변하는 감각 사물계 사 이의 중간에 자리 잡은 공간이 있다는 조금 기이한 공간이론으로 이어진다.
언제나 동일하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파멸하지도 않는 존재가 있는데, 외부에서 자신 안으로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어떤 존재로 되지도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어떤 감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기 때문에 지성의 관조를 통해서만 파악된다. 또 이러한 존재와 같은 이름을 지닌 그것과 닮은 또 다른 본성이 있는데, 감각으로 지각되고 창조되었고 언제나 움직이고 한 장소에 있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의견이나 감각으로 파악된다. 다음으로 공간이라는 제3의 본성이 있는데, 영원하며 파멸하지 않고 창조된 모든 사물의 거처가 되며, 감각의 도움이 없이 일종의가짜 이성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전혀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꿈에서처럼 바라보면서 몬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한 장소에 나타나며 틀림없이 공간을 차지하지만, 하늘에도 땅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나는(러셀) 위에서 인용한 아주 어려운 구절을 완벽하게 이해한 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질계의 구성 요소는 삼각형이다.
티마이오스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계를 구성하는 진짜 요소는 흙, 공기, 불, 물이 아니라 두 가지 직각삼각형인데, 하나는 정삼각형의 절반인 직각삼각형이고 다른 하나는 이등변삼각형의 절반인 직각삼각형이다. 원래 만물은 혼돈 속에 있고, 우주를 형성하도록 배열하면서 신은 삼각형의 형상들을 이용해 질료를 빚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두 삼각형들로 다섯 가지 정다면체 가운데 네 가지정다면체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며, 4원소 각각을 구성하는 각 원소는 정다면체이다. 흙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육면체이고, 불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사면체이며, 공기를 구성하는 원소는 정팔면체이고, 물을 구성하는 원소는 정이십면체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정다면체의 5가지뿐이다.
정사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는 각 면이 삼각형이다.
정십이면체는 오각형이라 삼각형 두 개로 구성될 리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플라톤은 4원소와 관련해서 정십이면체를 활용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정십이면체에 대해 “신이 우주의 본을 뜰 때 다섯 번째 조합을 사용했다”고 말할 따름이다. 이 말은 모호한데, 우주가 정십이면체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름 곳에선 구형이라고 말한다. 오각형은 언제나 마력을 지닌 형상으로 유명하며, 겉보기에 이러한 견해는 오각형을 '건강'으로 부르는데 종교 단체의 회원을 알아보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 기인한다.
인간의 영혼 창조
티마이오스는 인간이 지닌 두 가지 영혼을 설명하는데, 하나는 죽지 않는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영혼이다. 죽지 않는 영혼은 조물주가 창조했고, 죽는 영혼은 신들이 창조했다. 죽는 영혼은 억제하기 힘든 가혹한 애착들,첫째 악행을 쉽게 저지르게 하는 쾌락, 다음으로 선행을 가로 막는 고통, 또 성급함과 두려움이라는 어리석은 조언자와 좀처럼 달래기 어려운 분노, 쉽게 길을 잃고 마는 희망의 지배를 받는데, 신들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이러한 애착들을 비이성적인 감각이나 모든 것을 감수 하는 사랑과 섞어서 인간을 만들었다. 죽지 않는 영혼은 머릿 속에 있고, 죽근 영혼은 가슴속에 있다.
러셀의 결론
『티마이오스』에서 어떤 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면을 공상의 유희로 간주해야 할지 알기는 어렵다.
나는 혼돈의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에 대한 설명은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4원소 사이의 비례나 4원소를 비롯한 정다면체들과 정다면체의 구성요소인 삼각형의 관계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은 분명히 믿으며, 창조된 세계가 영원한 원형의 모사라는 견해도 믿었다. 세계 속에 필연과 목적이 혼합되어 있다는 믿음은 철학이 생겨나기 오래 전 부터 그리스인들이 모두 실제로 공유한 일반화된 믿음이다. 플라톤은 일반화된 믿음을 수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을 괴롭힌 악의 문제를 회피했다. 나는 플라톤이 세계 생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윤회에 관한 세부 내용이나 신들에 부여한 역할을 비롯한 다른 필요 없는 내용은 그럴싸해 보이도록 구체성을 부여하려 덧붙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 대화편 전체는 고대와 중세 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영향은 공상적인 면이 나타나지 않는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의 결론
플라톤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상황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시의 정치와 경제,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플라톤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처럼 우주가 약 138억 년전에 빅뱅으로 시작되어 계속 팽창을 하고 있으며, 약 46억 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여러 과정을 통해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그 생명체는 돌연변이와 진화를 통해 인류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 시점의 사고로 플라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하늘과 땅을 누가 만들었을까? 생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플라톤이 정리를 해 놓으니 후세에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성인이 신양성서와 플라톤의 사상을 완벽하게 융합하여 중세 기독교 사상의 근간이 된 교부철학을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서>
[고전 톡톡 다시 읽기](52)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입력: 2011.01.24
신조차 따라야 하는 우주의 원리 vs 인간 삶의 근거되는 종교의 우주
▲ 플라톤
버트런드 러셀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해, 중세 기독교에 끼친 지대한 영향 외에는 그다지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러셀이 보기에 ‘티마이오스’는 과학이나 철학이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웠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의 하이젠베르크는 신학 학교 지붕 위 따뜻한 햇살 속에서 ‘티마이오스’를 읽으며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양자 역학으로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하이젠베르크지만, 만일 ‘티마이오스’가 없었다면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불확정성의 원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종교와 과학 사이에 놓이는 책, 아니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종교와 과학을 중첩되도록 만드는 책!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이곳에 존재한다.
●과학으로서 ‘티마이오스’
‘티마이오스’는 우주의 발생과 구성 원리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우주 구성의 근본 물질은 불, 흙, 물, 공기. 이 4원소는 당시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를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4원소의 내적 구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하학적 형식으로 그것들을 정의한다. 이에 따라 4원소는 기하학적 입자로서 설명되고, 우주의 생성은 순수한 형식의 세계로 펼쳐진다. 플라톤은 또한 우주의 생성 원리에 관해서도 기존의 자연철학자들과 결별한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사랑’과 ‘투쟁’ 따위의 모호한 표현으로 우주의 발생을 말하던 방식과 달리, 수(數)의 비례 관계를 자신의 근거로 삼는다. 수와 기하학적 질서 위에 구축된 우주! ‘티마이오스’는 오늘날 과학이 우주를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책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읽힐 여지가 있는 것은 우주 발생의 순간에 등장하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신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 원리를 담은 형상(形相)과 우주의 재료가 되는 질료가 신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성되는 모든 것은 …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형성됩니다. 어떤 것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이건 간에,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본으로 삼아, 형태와 성능을 갖추게 할 경우에만, 그리고 이렇게 완성되는 경우에만 그 만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티마이오스』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은 기본적으로 ‘제작’이라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제작자가 의자를 만든다고 해보자. 그에게는 의자의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작에는 항상 세 가지 계기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그 세 가지는 ‘제작자’ 본인, ‘설계도’, 그리고 ‘재료’다.
플라톤은 제작의 이미지를 우주발생론으로까지 확대한다. 지금은 낯설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유명했던 플라톤의 원인론이 바로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계기를 원인으로서 전제하고 발생했다. 첫째 계기는 제작자를 의미하는 ‘데미우르고스’이고, 둘째 계기는 ‘언제나 같은 생태로 있는 것’으로서 본이 되는 ‘형상’이다. 마지막 셋째 계기는 원료를 의미하는 ‘질료’다.
아쉽게도 방금 읽는 구절에서는 첫째와 둘째 계기는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셋째 계기는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중세 서양 지성인들이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에 ‘데미우르고스’ 즉, ‘제작자’의 계기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데미우르고스라는 개념이, 아직 기독교를 낯설게 여겼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창조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플라톤의 우주발생론과 기독교의 관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반면,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형상과 질료 자체는 창조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되다.
진중권 철학 오디세이 중
세계의 영혼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아테네 학당'에서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는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는 고대 철학에서 이 두 인물이 점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은 땅을 향한다. 플라톤의 손에는 '티마이오스(timeo)'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etica)'이 들려 있다.
플라톤이 천상의 초월적 세계를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감각적 현실을 중시했다는 뜻이리라. 이게 얼마나 올바른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플라톤의 저작이 신비한 분위기에 감싸인 이야기의 모습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마치 오늘날의 논문을 읽는 것 같다.
손에 든 그 책에서 플라톤은 세계를 '언제나 존재하나 생성하지 않는 것'과 '언제나 생성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의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1) 여기서 '존재하나 생성하지 않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일자', '생성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관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자가 완전한 모범들로 이루어진 이데아 세계라면, 후자는 그 이상적 모범들을 본뜬 불완전한 모상(eikon)들의 세계다. 또 전자가 이성으로 보는 영원한 진리(aletheia)의 세계라면, 후자는 감각으로 보는 덧없는 모상들의 세계로 거기에는 오직 억견(doxa)만이 있다.
이렇게 존재와 생성을 각각 예지계와 현상계에 할당함으로써 그는 서로 대립하는 두 사상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
플라톤은 우리의 우주 역시 천상의 모범의 불완전한 모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유일하다. 즉,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복수 우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단 하나의 우주는 살아 있다. 그의 우주론은 운동(kinesis)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죽은 물질의 운동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는 인과관계가 뒤바뀐 주장이다. 생명이 있어야 운동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뭔가에 의해 움직여지거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모든 움직임의 바탕에는 최초의 원동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영혼(psyche)일 수밖에 없다.
우주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 세계혼의 관념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애니미즘(animism) 흔적이 엿보인다. (플라톤만이 아니라 실은 이오니아 철학자 대부분이 '아르케'를 스스로 움직이는 것, 즉 살아 있는 것으로 가정했다.) 우주에 혼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의인적(擬人的)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의인적 세계관에서는 물리적 교란이 곧 도덕적 악으로 해석된다. 운동의 '무질서'는 영혼의 '혼탁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좋은 혼과 나쁜 혼이 있고, 그 안에는 규칙적 운동이 있는가 하면 무질서한 운동도 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우주는 선한 혼에 지배된다. 그 덕분에 부분적으로 찾아오는 교란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움직임은 전체적으로 '조화(cosmos)'를 이룬다.
또한 혼을 가지고 있기에 우주는 지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다. 행성의 운동, 계절의 순환, 밤낮의 교체 등 자연의 모든 현상이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 자체가 광기가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이성적인 상태는 동시에 '좋은 것', 즉 도덕적 선이기도 하다.
인간 역시 우주처럼 혼을 가지고 있다. 거시우주(macro-cosmos)와 이 미시우주(micro-cosmos) 사이에는 평행이 존재한다. 즉, 우주의 혼에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이 있듯이 인간의 혼에도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이 있다.
인간이 제 영혼을 우주 혼처럼 이성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로 유지하고 관리할 때, 인간은 우주와 합일하여 그 안을 운행하는 행성들처럼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플라톤은 우주가 시간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이데아 세계가 영원불변의 무시간성을 띠는 것과는 정반대다. 플라톤은 시간성을 띠는 우리의 우주가 "영원성의 움직이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그의 관념은 우리의 것과 사뭇 달랐다.
플라톤은 천체의 규칙적인 움직임 자체를 시간으로 간주했다. 아직 움직임에서 측정 가능한 수치를 떼어내어 추상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는 시곗바늘에서 추상적 시간을 읽어낸다. 만약 플라톤이 바늘 없이 시간을 숫자로만 표시하는 디지털시계를 보았다면, 아마도 거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천체들의 물리적 움직임에서 측정 가능한 추상적 숫자로서 시간이 떨어져 나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일이다.
데미우르고스
플라톤의 존재론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종합이라면, 감각적 세계를 다룬 그의 자연철학은 데모크리토스 · 피타고라스 · 엠페도클레스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를 따라 그는 우주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극히 미소한 단위의 배열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 극소 단위로 두 종류의 삼각형(45°-45°-90°, 30°-60°-90°)을 제시한다. 우주의 재료가 이 기하학적 도형들의 배열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삼각형 중 앞의 것(45°-45°-90°) 두 개를 맞붙이면 정사각형이 되고, 뒤의 것(30°-60°-90°) 두 개를 맞붙이면 정삼각형이 된다. 다시 이 두 도형이 여럿 모이면 정사면체 · 정육면체 · 정팔면체 · 정이십면체 등 다양한 종류의 입방체들이 만들어진다.
두 종류의 직각삼각형
정사각형이 여럿 모이면 정육면체가 되고, 정삼각형이 여럿 모이면 정사면체, 정팔면체 혹은 정이십면체가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정다면체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재료다.
플라톤은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4원소도 실은 이렇게 기하학적 도형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기하학적 추상에서 물리적 실재로 나아가는 것은 물론 피타고라스의 영향이다.
한편, 흙은 안정적인 정육면체, 불은 날카로운 정사면체, 공기는 쪼개지기 쉬운 정팔면체, 물은 물방울을 닮은 정이십면체로 표상한 것으로 보아 플라톤은 도형의 기하학적 특성에서 원소의 물리적 성질이 나온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4원소
이제 우주의 재료가 확보되었다. 하지만 물 · 불 · 공기 · 흙은 그저 재료일 뿐, 그것들의 혼합에서 저절로 사물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의 놀라운 재화가 재료의 범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가 없기에, 플라톤은 이 질료들의 범벅에 '형'을 부여하는 어떤 지성적 존재를 상정한다. 그것이 바로 조물주 데미우르고스(dēmiourgos)다.
플라톤의 조물주는 기독교의 창조주와 다르다. 야훼는 그야말로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했으나, 데미우르고스는 그저 이미 존재하는 재료에 형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대립되는 두 조물주의 이미지다. 성서의 조물주가 '말씀'으로 세상을 짓는 정신노동자라면, 플라톤의 조물주는 직접 손으로 물건을 제작하는 장인에 가깝다.
데미우르고스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이 우주를 어떤 이상적 모범(paradeigma)에 따라 만들었다. 우주 제작에 쓰이는 이 '모범'을 그는 수학적 · 기하학적 실체로, 즉 수(arithmo)와 형(eidos)으로 표상한다.2) 가령 천구의 궤도와 주기를 생각해보라.
이 우주가 어떤 이상적 모범의 불완전한 모방(mimeta)에 불과한 것은 그 모범이 불순한 물질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불완전해도 이 우주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다. 우주의 장인이 그것을 자신의 선한 본성에 따라 되도록 최상의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3)
플라톤의 구형 우주
장인은 "지성(nous)을 영혼(psyche) 안에, 영혼은 신체(soma) 안에 있게 하여 이 우주를 구성"4)했다. 그는 우주를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도형인 구형(球形)으로 만들었다. 이때 그는 먼저 우주의 가장 훌륭한 부분으로 천상의 신들, 즉 천체들을 만들었다.
아폴론(태양) · 헤르메스(수성) · 아프로디테(금성) · 아레스(화성) · 제우스(목성) · 크로노스(토성) 등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화에 등장하는 그 밖의 여러 신들(daimones)은 이 천체들의 자손이다.
신들은 피조물이기에 불사의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멸적인 것도 아니다. 장인이 이들을 해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약속대로 해와 달과 별은 죽지 않고 오늘날까지 하늘을 운행하고 있다.
(위) 천체로서 신들 (아래) 신으로서 천체들
우주를 창조한 후 데미우르고스는 먼저 '불사의 것', '신적인 것'을 씨처럼 뿌린다. 그 후 천상의 신들에게 우주를 짓는 데에 쓰다 남은 영혼을 골고루 나누어주며 그것으로 하늘과 지상과 물속의 생명을 만들라고 명했다.
여기서 그가 씨처럼 뿌렸다는 '불사의 것', '신적인 것'은 세계 지성(nous)을 가리키고, 그가 나누어주었다는 '영혼'은 생기(生氣)를 뜻한다. 영혼은 '숨 쉬다(psychein)'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플라톤에 따르면 거기에는 사멸하는 것과 불멸하는 것이 있다.5)
그중 불멸하는 것은 조물주가 씨처럼 뿌린 것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있으며 이성(logikos)이라 불린다. 반면, 가멸하는 영혼은 신체를 움직이는 힘으로, 가슴에 있는 놈은 열정(thumikos), 배에 있는 놈은 욕망(epithumetikos)이라고 한다.6)
이성, 열정, 욕망
천체의 신들은 조물주가 나누어준 영혼으로 인간과 동물을 만들었다. 이 지상의 생명들은 천상의 별들만큼 깨끗하지는 못해 그 순수성으로 따지면 "두 번째나 세 번째 단계"에 머물 뿐이다.
천체의 신들도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지은 방식대로 "지성을 영혼 안에, 영혼은 신체 안에 있게 하여" 인간을 지었다.
인간은 우주의 모상이기에 되도록 그 원상을 닮음으로써 그것과 같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신체 안에는 영혼이 있고, 그 안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은 조물주가 직접 뿌리신 '불사의 것', '신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을 정화하여 정신에 가까워진 영혼은 자신을 낳은 그 천체로 돌아가고, 그렇지 못한 영혼은 환생하여 윤회의 쳇바퀴 속을 돌아야 한다.
한마디로 영혼이 정신에 가까워지면 불사의 존재가 되나 육체에 가까워지면 가멸적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육체는 영혼에 교란을 일으킨다.
이를 극복하고 평정을 회복하여 천체의 궤도처럼 질서와 조화에 도달한 영혼은 육체의 옷을 벗고 천상의 신들처럼 '불사의 것', '신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 못한 영혼은 다시 육체에 갇혀 덧없는 생성의 세계 속으로 환생한다.
이때 성욕을 억제 못한 영혼들은 여자로 태어나고(이 뻔뻔한 성차별주의가 당시에는 상식으로 통했다), 시각을 믿는 자들은 새로, 철학을 모르는 자들은 네발짐승으로, 그들보다 아둔한 영혼들은 기는 동물로 태어난다. 가장 어리석은 자들은 물고기로 태어나는데, 플라톤은 이들이 숨 쉴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7)
코라, 우주의 자궁
플라톤은 서구 철학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거기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의 '이데아론'이리라. 하지만 이 중요한 학설이 몇 가지 논리적 난점을 야기하는데, 그중에는 체계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인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별을 생각해보자. 두 세계는 서로 분리되면서도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플라톤은 그것을 '분유(methexis)'와 '임재(parousia)'의 관계로 설명한다. 감각적 모상들은 이데아의 속성을 나누어 갖고, 이 이상적 모범은 감각적 모상들 속으로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유든 임재든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하는 두 세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분유(참여)와 임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라톤은 두 세계 사이에 제3항(triton genos)를 상정한다. 바로 우주의 자궁 '코라(chora)'다. 플라톤은 이를 일종의 '장소'로 표상한다8).
코라는 이데아계의 모범이 감각 세계의 물리적 대상으로 태어나게 해주는 어떤 바탕 같은 것으로 영어 문장 'there is x.' 속의 'there', 혹은 불어 문장 'il y a x.' 속의 'y'와 비슷한 것이다.
플라톤은 존재(ousia) · 생성(genesis) · 장소(chora)의 관계를 가족에 비유한다. 이데아가 아버지라면 자연(physis)은 자식, 코라는 어머니라는 것이다.9)
하지만 그로써 모든 것이 설명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 그는 '코라'가 뭔지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 자신도 그게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라고 고백한다.
코라
그는 왜 코라의 존재를 요청해야 했을까? 이유가 있다. 뭔가를 제작할 때 관념적 설계에서 바로 제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머릿속에 있는 단검의 관념적 구상을 물리적 대상으로 찍어내려면 주형(鑄型)이 있어야 한다. 거푸집이 머릿속 관념의 형태를 음각으로 받아내고, 그 파인 홈 속으로 주물을 받아야 비로소 청동 검을 찍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거푸집(ekmageion)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코라'다.10) 코라는 예지계의 모범과 현상계의 모상 사이에서 둘을 매개한다. 문제는 코라의 모호한 위상이다.
현실의 거푸집은 그 자체가 물리적 대상이나, 코라는 물리적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념적 대상도 아니다. 이 때문에 코라 자체가 이원론 위에 선 플라톤주의에는 잠재적 위협이 된다.
이데아 자체의 문제
위태로운 것은 이데아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플라톤 자신도 이데아의 개념에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중기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서 그는 스스로 이데아 개념에 제기되는 세 가지 비판에 대해 언급한다.11)
세 가지 비판이 그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반대자들이 제시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자일 경우 그 비판은 당시 그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젊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것일지도 모른다.12)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파르메니데스'에 소개된 반론 중 두 번째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며 거기에 '제3의 인간 논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따라서 그 세 반론 중 적어도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 반론은 '분유' 개념의 불명확성을 겨냥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사물이 하나의 이데아를 분유한다고 하자. 그때 개개의 사물은 그 이데아를 '전체'로서 갖거나, 아니면 그 '일부'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경우든 이데아의 단일성은 파괴된다.
먼저 '전체'로서 갖는다고 해보자. 하나의 이데아가 다수의 사물 속에 전체로서 임재하려면 그 수만큼 자기 복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데아는 단 하나의 원본이기에 다수의 복제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라고 할 수 없다.
이어서 사물들이 각자 이데아의 '일부'만 갖는다고 해보자. 이 경우 이데아는 1/n로, 즉 그것을 분유하는 사물들의 수만큼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야 할 터인데, 이는 명백히 불합리하다.
이데아와 개별자들
두 번째 반론은 '큼(mégethos)'의 개념을 활용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큰 사물들을 본다. 그 사물들이 큰 것은 '큼'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 '큼'을 다시 다른 큰 것들과 묶으면 둘 사이에도 '크다'는 공통성이 존재한다. 그 '큼'과 다른 큰 것은 그보다 '더 큰 큼'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리라. 그 '더 큰 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다른 큰 것들과 묶이면 자기보다 더 큰 큼의 이데아에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계속 가면 결국 무한 소급에 빠져버린다. 여기서는 '큼'을 예로 들었지만 원칙적으로 이 논증은 다른 모든 술어에도 적용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술어에 대해 하나가 아니라 무한수의 이데아를 상정해야 할 처지가 된다.
세 번째 반론은 사실 두 번째의 것과 성격이 거의 동일하다. 이 논증은 '원형(hparadeigmata)'과 '모사(mimetata)'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겨냥한다.
가령 현실의 개들은 '개'의 이데아의 모사물이다. 각각의 개는 '개'의 이데아를 닮았다. 이데아로서의 '개'와 각각의 개가 서로 닮았다면, 그것은 양자가 함께 뭔가 동일한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모사의 관계는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이데아로서 '개' + 현실의 '개들'과 '뭔가 동일한' 그 새로운 이데아 사이에도 또다시 닮음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양자가 서로 닮았다면 또다시 새로운 이데아가 소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계속 나가면 결국 무한 소급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세 가지 난점을 해결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었다. 그럼에도 이데아론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이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모양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게 생각했다. 위의 두 번째, 세 번째 논증이 스승의 이론에 치명적 반론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의 저서 몇몇 곳에서 이를 새로운 버전으로 바꾸어 소개한다.
'만약 한 사람이 사람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람과 사람의 이데아가 공히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이 참여할 제3의 사람이 필요하게 되고, 그렇게 계속 나가면 결국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제3의 인간 논증'이라 불렀다.
제3의 인간 논증
사실 '제3의 인간 논증'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 논증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일상 언어의 용법을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우리는 "x는 크다.", "y는 크다.", 혹은 "z는 크다."라고 말하지 "큼은 크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x는 사람이다.", "y는 사람이다.", "z는 사람이다."라고는 말해도, "인간성(인간임)은 인간이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명백한 오류 논증이기에 플라톤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반박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제3의 인간 논증'은 그 성격이 '역설의 역리'와 비슷하다.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대상적 차원과 메타적 차원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이 역리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데아론이 자신의 반론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 듯하다. 동일한 반론을 '형이상학'(990b17–1079a13)과 '소피스트적 논박'(178b36ff)에서 반복한 것은 그가 이 논증을 논리적으로 무결한 것으로 보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논리적 방어가 불가능한 이론은 마땅히 포기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영원한 형상의 초월적 세계를 상정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진리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동이었다.
하지만 굳이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지 않고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택한 것이 바로 그 길이었다.
발행일2018. 07. 24.
출처 철학 오디세이
진중권 대학교수, 비평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등 대중에게 미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남다른 미적 감각을 제시하는 글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미학 오디세이 1~3》,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 편, 모더니즘 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교수대 위의 까치》, 《현대미학 강의》 등이 있다.
기타 참고할만한 자료들
첫댓글 물의 이데아 / 이진엽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호수는 둥근 파문으로 고이 받아준다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리쳐도
호수는 크고 작은 바퀴들을 만들어
물의 살갗 위로 부드럽게 굴러가게 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물 위에 몸을 던질 때면
둥근 팔 안에 안겨버린다
물의 가슴에서 밤새 감기는 저 신비한 태엽들
원형은 분명 우주의 고요한 근원이다
빗방울이 호수의 눈썹을 들출 때마다
물 위에서 일렁이는 수많은 눈동자들
그 동공에 비치는 우리들의 얼굴도
온갖 열매들과 따뜻한 자궁마저도
모두가 물의 원형을 복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