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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문에서 보이는 청령(淸寧)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청령사년무술(淸寧四年戊戌)」은 고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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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주사(龍珠寺) 범종
화성 용주사(龍珠寺) 범종
고려시대 / 높이 1.44m, 입지름 87cm, 國寶 120 / 경기도 화성군 龍珠寺
고려시대 銅鐘으로는 드물게 보는 大鐘이며 한국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鐘肩. 乳廓. 鐘口에는 꽃무늬가 곁들인 唐草文이 상하의 聯珠文帶 사이에 陽鑄되어 매우 화려하나
新羅銅鐘에 비해 박력이 적다. 乳는 돌기된 형식을 따랐고 그 표면에도 장식무늬가 있다.
용이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鐘身에는 飛天과 三尊像은 유곽 사이 鐘身 중앙에 1軀씩 네 곳에 배치되었다.
撞座는 연꽃을 중심으로 고사리 같이 된 唐草文을 돌린 원형이고
飛天은 天衣를 위로 날리며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며,
三尊像 역시 天衣를 날리며 蓮花座 위에 앉아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습이다.
鐘身에는 두 곳에 銘文이 있어
이 鐘이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鑄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銘文은 後刻銘이고 종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의 鑄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貞祐 4年 丙子(1216) / 전체높이 93.5cm, 종높이 70.5cm, 입지름 61.0cm, 보물 제1280호 / 주종장 순광 / 경북 포항 오어사 당좌 위에는 범자를 내부에 새긴 패가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여 주목된다. 상대 윗부분에 연꽃잎 모양으로 입상대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종이다. 입상대는 연잎 끝부분을 도톰하게 처리하고 내부에 다시 연꽃 모양을 겹으로 표현하였다. 양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를 좌우로 날리고 있는 보살상이 있다. 보살상의 머리 뒤로는 S자로 휘어지면서 올라가는 구름 꼬리가 길게 이어져 있어 고려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300근의 종을 만들어 오어사에 달았으며 대장大匠은 순광順光임이 밝혀져 있어 감독과 주종장, 종의 무게와 안치장소, 연대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지금은 오어사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좌 사이에는 꽃방석 자리에 무릎을 곱게 꿇고 합장한 채
명문에 정우貞祐 4년(1216) 동화사桐華寺 순성淳誠 대사를 총감독으로 하여
<고려 후기의 종>
고려후기의 종은 1150년부터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의 것으로 '내소사(來蘇寺) 범종'을 비롯하여
국내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대략 64점에 이르고 있다.
▶ 내소사(來蘇寺) 범종 ▶ 안수사(安水寺) 정사명(丁巳銘) 동종
▶ 정풍(正豊) 2년명(二年銘) 동종 ▶ 죽장사(竹丈寺) 기축명(己丑銘) 동종
▶ 송대 철제 범종
내소사(來蘇寺) 범종
내소사(來蘇寺) 범종
고려 시대 / 크기 높이 103cm, 입지름 67cm /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77호로 지정되었다. 종신에는 위·아래에 견대와 구연대를 돌리고
그 안에 아름다운 당초문을 새겼으며, 견대 위에는 여의두문과 흡사한 입화형 장식이 있어
고려종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견대 아래 4곳에는 유곽이 있으며 연주문으로 구획하여
이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안에 젖꼭지 모양의 9돌기가 있다.
정상에는 주형이 달린 용통을 두고,
특히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가 사실적으로 처리되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의 밑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에 구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이 새겨져 있다. 본존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협시상은 서 있다.
모두 둥근 두광을 갖추었으며, 운미가 길게 위로 솟아 있다.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가 있어 더욱 장엄하게 보인다
당좌와 당좌 사이에는 3종류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1222년(고려 고종 9)에 만들어져 원래 청림사에 있던 것을
1853년(조선 철종 4)에 내소사로 옮긴 것이다.
정풍(正豊) 2년명(二年銘) 동종
정풍(正豊) 2년명(二年銘) 동종
고려시대 / 높이 22.5cm, 입지름 16.8cm / 서울 개인소장
이 鐘은 鐘肩의 立花장식이 뚜렷하고 鐘口가 넓어진 고려양식을 보여 주는 小鐘인데
장식무늬가 특이하여 주목된다.
上帶 밑 네 곳에 큼직한 乳廓이 있는데 雷文帶를 돌린 속에 돌기된 9乳가 있다.
유곽 밑에는 子房과 꽃잎에 모두 珠文을 장식한 8葉 연꽃으로 撞座를 삼았고
乳廓 사이 鐘身 거의 중앙부에 頭光과 身光을 갖추고 蓮花座 위에 앉은 如來像 1軀씩이 있다.
S자형으로 굴곡진 용뉴(龍鈕)는 고려 전기 종과 달리 그 입을 천판(天板)상에서 띄워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들려진 왼손 위에는 보주를 잡았다. 뒤에 붙은 음통(音筒)은
가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상부에는 작은 보주 장식이 돌려져 있다.
上帶와 下帶는 2段의 雷文으로 장식하였는데
이 紋樣帶 안에 上帶에 12字, 下帶에 7字의 梵字가 圓圈안에 조각되었다.
종신의 한쪽 면 부조보살상 아랫부분에 ‘正豊二年 庚戌亂中 汀寺住 持比丘宗 於發心□□□□
(정풍2년 경술난중 정사주 지비구종 어발심□□□□)’이라는 내용의 오목새김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풍(正豊) 2년은 정륭(正隆) 2년으로서 고려 태조 부왕의 이름인 ‘융(隆)’을 피하여
‘풍(豊)’자를 사용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볼 때 그 2년은 1157년에 해당된다.
이미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죽장사(竹丈寺) 기축명(己丑銘) 동종
죽장사(竹丈寺) 기축명(己丑銘) 동종
고려시대 / 높이 33.1cm, 입지름 20.3cm / 서울 張衡植 所藏
전형적인 고려종의 형식을 따른 銅鐘이다. 어깨에는 삼각형의 立飾이 있고
上帶와 下帶에는 唐草文帶가 있되 아래쪽에 한 줄 連珠文帶가 있다.
上帶 밑에는 당초문대를 돌리고 花形 圓座 위에 돌기된 9乳가 있는 방형 乳廓 4區가 있다.
유곽 사이 밑으로는 圓圈 안에 蓮花로 표시한 큼직한 撞座가 4곳에 있어
鐘身의 공간이 적어졌다.
音筒 위에 小珠가 있음은 고려종의 특색이다.
鐘身에는 「己丑五月日竹丈寺」운운의 陰刻 鐘銘이 있어
고려 고종 16년(1229)경의 제작이 아닌가 추정된다.
탑산사(塔山寺) 계사(癸巳)명 동종
탑산사(塔山寺) 계사(癸巳)명 동종
고려시대 / 높이 79cm, 입지름 43cm, 寶物 88 / 전남 해남군 大興寺
한국종의 형식을 따른 종이다. 大鐘은 아니나 신라종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肩帶. 乳廓. 口緣帶의 唐草文帶의 장식무늬는 약간 섬약하고 장식성이 번다한 감이 있으나
周緣의 聯珠文帶나 조각 수법이 아직 古調를 잃지 않고 있다.
鐘肩 위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蓮瓣을 촘촘히 세워서
고려시대 銅鐘의 하나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 붙어 있는
龍이나 音筒의 조각 또한 어느 鐘보다도 우수한 솜씨를 보였고
특히 龍頭의 표현은 매우 박력이 있어 보인다.
鐘身에는 乳廓 사이 밑에 보살상이 1軀씩 조각되었는데 光背를 갖추고
蓮花위에 앉아 구름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萬曆二十年己亥十二月日」운운의 追刻銘이 있다. 이 銘文만 가지고 정확한 年代를 알 수는 없으나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銘文으로써 이 鐘이 塔山寺에 있던 鐘임을 알 수 있다.
* 사진에 대한 설명= 한국미술전집(동화출판공사.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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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산사 癸巳銘銅鐘에 대하여
전형적인 고려시대 종인데 360년 시차 2개 '명문' 함께 있어
고문서 연구 최연식 교수 "고려 명문은 후대에 새겼을 가능성"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민족 수난 전쟁으로 꼽히는 16세기 임진왜란은 지금도 이 땅 곳곳의 문화유산에
생채기를 남겨 놓았다. 전남 해남 대흥사의 탑산사 동종(높이 77.8㎝, 보물 88호) 또한 그 생채기를 안은 유물이다.
대흥사 성보관에 있는 이 종은 유두와 용 모양의 꼭대기 고리가 달린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명품 종으로
장흥 탑산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엉뚱하게도 만든 경위를 적은 명문(銘文)은 고려시대인 1233년 것과
임란 발발 직후인 1593년 들여왔다는 조선시대 것이 따로 새겨져 있다. 하나의 종에 시간 차이가 360년이나 되는
각기 다른 조성기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체 어느 쪽 명문이 맞는 것일까.
분명 전란이 할퀴었을 이 종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놓고, 고문헌 연구자인 최연식 목포대 교수가 최근
색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최근 한국목간학회 정기학술발표회에서 그는 '탑산사 동종 명문의 검토'라는 글을 통해
종의 고려 명문이 원래 새긴 게 아니라 후대 다른 종 명문을 베껴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명문은 모두 계사년 간지를 갖고 있지만, 같은 종에 새겼으면서도 새긴 방법, 발원한 사람 등이 완전히 다르다.
우선 고려 때 명문은, "계사년(1233) 10월 탑산사에서 수행하는 승려 상현과 지장 등이 어비(於非)하다.
호장 임중산 등이 함께 발원해 만들었으며 들어간 중량은 80근"이라고 적혀 있다. 이와달리
임란 뒤 명문은 "만력 21년(1593)에 왜변으로 총통(대포)을 만들 때 탑산사 종을 가져다 깨뜨려 만들었다.
이 종을 이제 동철을 거두어 납부하고, 본래 절에 돌려 놓는다"고 적은 뒤 시주자 명단을 새겨 놓았다.
자세히 보면, 고려 때 명문에는 부자연스런 점이 많다. '어비'처럼 한자 본래 뜻이나 이두로도 해석되지 않아
오자로 짐작되는 글자가 있고, '어산향'(현 전남 장흥 용산면 어산리)과 '자복사'라는 고려시대 옛 지명과
절 이름을 지우고 탑산사를 새로 갖다 붙인 흔적도 보인다.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은
"고려 종은 대개 명문 새길 테두리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글자체를 만드는데, 글씨체가 조잡하고 테두리도 없어
후대에 어떤 이유로 급하게 옮겨 적었을 공산이 크다"고 했다. 게다가 명문에 기록된 철물 무게가 다른 고려종보다
훨씬 적은 것도 의구심을 갖게 한다는 게 최 교수의 견해다. 문헌에 나온 비슷한 크기의 고려 종들이 대개 철물이
150~170근 들어갔다고 기록된 데 비하면 명문의 80근 수치는 너무 적다는 이야기다. 결국 조선시대 명문에 나온 대로
전란에 징발된 종 대신 신자들이 다른 종을 구해 대흥사에 가져왔고, 본래 종의 명문을 교체한 종에 다시 새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왜 굳이 원래 종의 명문을 교체한 종의 명문까지 지워버리면서 새겨야 했던
것일까. 대흥사는 임란 때 큰 스님 사명대사가 승려 의병을 일으켰던 본산지다. 이런 역사적 내력에 비추어
탑산사 종의 수난사를 둘러싼 궁금증은 앞으로도 계속 가지를 치며 논란을 부를 듯하다.
최 교수는 "여러 학자들과 공동작업을 통해 종의 양식, 종 명문의 서체와 새김 방식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 글:노형석 기자 / 사진: 최연식 교수 제공 -
첫댓글 채선후 님의 부탁을 읽고 인터넷에서 '고려시대의 종'을 검색했더니 하늘빛 님이 작성한 좋은 자료(글)가 있기에
고려 전기와 후기의 대표적인 종의 사진(주로 용뉴와 비천상을 조사)을 정리하여 함께 올림니다.
채선후 님의 숙제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와 선생님! 넘 감사드려요. 제가 멋지게 식사 한번 대접할께요.~^^채선후 올림
추석에 상경해서 서울에 머물다가 어제(17일) 첫차로 산골로 왔습니다. 이곳 노트북에 이상이 없나 열어보았다가 채선후 님의 부탁을 보았습니다.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해 사진을 첨가하여 올렸는데, 지금 읽어보니 원본(글)에 오자가 몇군데 있어 정정했습니다. 12월 말에 상경합니다.
와! 정말요? 오늘까지 완료해야 되서 넘 걱정을 했거든요. 어떻게 선생님께서 마침 보셨네요! 넘 감사드려요.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12월에 꼭 뵈요. 저도 선생님을 위해서 그날은 꼭 비워둘께요. ~^^^ 감사합니다.
저작권 문제를 꼭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채선후님.
하늘빛 님도 글(사진이 나오기 전까지의 글)의 출처를 '문화부 What`s on Korea'라고 했더군요.
사진이 들어간 부분부터는 글에 언급한, 대표적인 종을 하나하나 조사, 중요 부분을 크로즈업하여 만든 것입니다.
저작권을 염두에 둘 정도로 남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 아닙니다.
아! 전혀 자료 인용 못했어요. 써서 제출하는 게 아니라 직접 그 자리에서 써서 내는거 였어요. (백일장).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서 냈어요. 토욜에는어쨋튼 고생 좀 했습니다. 채선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