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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령구조곡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은 강원도와 평안도의 경계를 이루고 북한강 과 임진강의 수계를 가르며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백암산-장바위산-남미봉(1011)-장자산(802)-벽력암산(663)-삼천봉(815)-적근산(1071)-대성산(1175)-복계산(1054)-복주산(1152)-광덕산(1046)-백운산(903)-국망봉-(1167)강씨봉(830)-청계산(849)-원통산(567)-운악산(935)-수원산(711)-국사봉(547)-죽엽산(601)고장산(203)-불곡산(407)호명산(423)-한강봉-앵무봉-박달산(369)-월롱산(229)-보현산(108)오두산(119)
으로 맥이 이어진다. 또한 지맥을 뻗어 화악지맥은 화악산을 이루고, 명지지맥은 명지산을, 천마지맥은 천마산을 수락지맥은 수락산과 불암산을 도봉지맥은 도봉산과 북한산, 남산을 이루며 이 지맥들은 곡릉천, 중랑천, 왕숙천, 조종천, 가평천, 화천천 등의 한강 지류를 낳고 있다.
산자분수령이라...골골이 맺힌 사연들과 민초들의 애환이 그 얼마나 많았을까마는 크게 더듬어 한북정맥을 국경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한 임금이 신라의 진흥대왕이다.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이다. 그는 새로 얻은 땅 한강유역을 신주라하고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을 도독으로 파견하여 다스렸다. 마침 이 무렵의 국제정세를 살핀 글이 있어 올린다. 대사들의 한북정맥 이어가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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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뺏긴 한강유역
신라와 연대를 맺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해오던 백제는 다시 한강유역 수복에 성공했으나 신라에 허를 찔려 이를 신라에 내주고 말았다. 이의 탈환에 나선 성왕의 전사로 백제와 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고구려 또한 신라에 빼앗긴 한강 상류 지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대륙에는 강력한 통일 제국인 수와 당이 들어섰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재위 413~492)은 황하를 두고 북위와 송으로 나뉜 중국과 교묘한 외교를 통해 서쪽 변방을 안정시킨 다음 북수남진정책을 쓰며 수도를 다시 평양으로 옮긴 다음 백제를 멸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는 신라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이번에는 백제와 손잡고 살아남으려 하였다. 백제 또한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백제가 먼저 신라에 우호사절을 보냈다.
8년(434) 봄 2월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질 좋은 금[良金]과 명주(明珠)로써 답례하였다.
八年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조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도왔다.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三十九年 冬十月 高句麗侵百濟 王遣兵救之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조
이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이미 동맹관계가 성립되었음을 말해준다. 흔히 고구려의 국력이 삼국 중 월등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망할 때 백제는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였고 고구려는 5부, 176성, 69만여호였다. 이로 보아 오히려 백제의 인구가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각형의 가장 긴 변 하나의 길이가 나머지 두 변의 길이의 합보다 클 수 없듯이 두 나라가 연합하면 능히 가장 강한 한 나라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 당시의 형세였다.
서기 475년 9월에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킨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하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신라가 군사를 내어 백제를 도우려 하였으나 개로왕은 이미 전사하였고 한성은 함락된 뒤였다.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이로써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한강 유역이 백제의 중심지에서 고구려의 위협을 받는 변방이 되었을 뿐 여전히 백제가 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기사는 <삼국사기>에 자주 나온다. 그 내용을 보자.
2년(476)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들을 이주시켰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조
5년(483) 봄에 왕이 사냥을 나가 한산성(漢山城)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만에 돌아왔다.
五年 春 王以獵出 至漢山城 撫問軍民<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으로 쳐들어 왔다.
十二年 冬十一月 百濟遣達率優永 率兵五千 來侵水谷城<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조
7년(507)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漢城)을 공격하고자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 이를 물리쳤다.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녕왕조
위 기사들 가운데 한성(漢城)은 물론 오늘의 서울이다.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침략하여 함락시킨 백제의 도읍지도 ‘한성(漢城)’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마치 한강유역 일대를 점유하고 있는 것 같은 기사가 자주 나오는데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위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나오는 수곡성(水谷城)을 단재 신채호는 오늘의 평안남도 신계(新溪)로 보고 있으나 이병도는 ‘위치미상’이라고 하고 있다.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해야 하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결혼동맹으로 발전하였다. 동성왕 15년(493) 봄 3월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신라 왕은 이찬(伊)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이듬해에 신라가 살수(薩水:충북 괴산)벌판에서 고구려군을 맞아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경북 문경)을 지키자 고구려가 이를 포위하였다. 이 때 백제는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어 주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녕왕은 왕 3년(503)에 말갈이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으며, 왕 7년(507) 겨울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漢城)을 공격하고자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진군하여 주둔하자 군사를 보내 싸워 이를 물리쳤다. 또한 왕 23년(523) 봄에 왕이 한성(漢城)으로 행차하여 한강 북쪽[漢北] 주․군(州郡)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이처럼 동성왕과 무녕왕은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남진을 잘 막아내었으며 고구려의 문자명왕은 백제의 영토를 함부로 넘보지 못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시기의 백제를 최전성기로 보았다.
“부고(府庫)가 더욱 충실하고 서로 지나(支那)와 서남으로 인도(印度), 대식(大食) 등의 나라와 통상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대왕 향국(享國) 24년은 백제의 황금시대라 칭할러라” <조선상고사>
<구당서>에서는 이 무렵 백제의 강역을 “서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西渡海至越州 北渡海至高麗 南渡海至倭”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점령
무녕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재위523~554)은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의 안장왕은 군사를 내어 패수(浿水:예성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백제의 성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로부터 7년 후 고구려의 안장왕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쳐들어왔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가 혈성을 내주고 패배한 것이다. 혈성은 오늘 강화도의 혈구진(穴口鎭)으로 한강 하구를 지키는 요새지였다. 이로써 한강 하류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안장왕 대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된 이야기를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고구려의 안장왕(재위 519~531)이 문자명왕의 태자로 있을 때였다. 한 번은 상인 차림을 하고 개백(皆伯:지금의 고양시)에 가서 백제의 형편을 염탐하다가 백제 감시원에 들켜 그곳 한씨의 집에 숨어들었다. 한씨의 딸 주(珠)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태자는 주와 정을 통하고 부부의 약속을 맺은 다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는 ‘훗날 다시 군사를 몰고 와 이곳을 차지한 다음 그대를 맞아 가리라’ 약속하고 돌아갔다. 문자명왕의 뒤를 이은 안장왕은 수차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곳 태수는 주가 아릅답다는 소문을 듣고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주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갇히는 몸이 되었다. 안장왕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안타까와 했으나 구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안장왕은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해오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의 상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안장왕에게는 안학(安鶴)이라는 절세 미인인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는 장군 을밀(乙密)과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왕은 을밀의 가문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을밀은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한주를 기필코 구해오겠으며 약속을 지키면 안학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마침내 을밀은 수군 5천과 함께 백제를 향해 떠나고 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육로를 따라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일대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조선상고사에 실린 내용>
이 이야기는 <춘향전>의 근원설화로 보기에도 충분하다.
나제동맹의 결렬과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
비옥한 한강 하류지역을 고구려에 내준 백제는 성왕 16년(538)에 문주왕 대부터 63년 동안 도읍지였던 협소한 웅진에서 웅진에서 넓은 평야를 낀 사비(부여)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국운을 쇄신하고 새로운 국가경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국호도 부여(扶餘)로부터 내려온 법통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미에서 ‘남부여(南扶餘)’로 고치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연대하여 고구려와 혈전을 벌였다. 성왕 18년(540)에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한편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는 동안 차츰 국력을 키워 진흥왕(재위 540~576) 대에 이르러서는 백제나 고구려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진흥왕은 비록 어린 나이(15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이사부, 거칠부 등의 보필을 받아 가야와 우산국를 복속시켰으며 화랑 제도를 창설하는 등 훗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하였다.
548년 고구려의 양원왕(545~559)은 예(濊)의 군사 6천 명으로 독산성(獨山城)(1)을 공격해 왔다. 이에 백제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동맹의 약속을 지켜 정병 3천을 내어 백제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백제 성왕 28년(550) 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오늘의 충청도 동북쪽으로 쳐들어가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한 거점인 도살성(道薩城:천안)을 탈환하자 3월에 고구려는 금현성(金峴城:충북 진천)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로서는 한강유역을 완전히 점유하려면 이 두 곳을 절대적으로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백제와 신라로서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두 나라가 군사적 요충지인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혈전을 치르는 동안 신라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취하였다. 고구려에서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신라의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인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의 차지가 된 것이다.
고구려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신라가 백두대간을 넘어 고구려의 영토로 쳐들어오는 동안 백제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 比台角 耽知 非西 奴夫波珍 西力夫波珍 比次夫大阿 未珍夫阿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이 때 고구려는 돌궐족의 공격을 받아 군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으며 백제에 의해 평양성이 공파당하였다. 백제가 다시 강성해짐에 두려움을 느낀 허실을 틈타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와 협력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장악한 신라는 이번에는 백제를 쳐서 평양에 쳐들어갔던 백제 군사를 진퇴유곡에 빠뜨리고 한강유역의 10고을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깨졌다. 이어 신라는 오늘의 여주, 이천 광주 등 한강 하류 유역까지 진출하여 553년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가 김무력이다. 그는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큰형 노종(奴宗), 둘째형 무덕(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 가야 출신으로서 이 때 공을 세워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할 때, 김무력은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신주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의 손자가 김유신이다.
성왕의 분한 죽음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자 배신감에 치를 떨던 백제는 곧 신라의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성왕은 전쟁에 패해 전사를 하고 말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고 기록하고 있다.
32년(554)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충북 옥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百濟王明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위 두 기사만으로는 당시의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일본서기>에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본기에서는 성왕을 죽인 도도(都刀)의 직위는 고간(高干)이며 직책은 삼년산군의 비장이지만 일본서기에는 말을 먹이는 천한 노예(賤奴)로 나온다.
여창[성왕의 뒤를 이어 위덕왕이 된 태자]이 신라를 정벌하기를 도모하므로 기로들이 간하기를 “아직 때가 아니므로 화가 미칠까 두렵다” 하였다. 여창이 “노인들이 겁이 많도다. 우리는 대국이거늘 어찌 두려워하랴” 하고 말하고 신라에 이르러 구타모라에 요새를 쌓으니 아버지인 명왕(성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여창이 진지에서 오랜 고통 끝에 잠을 못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함이 오래되거늘 왕이 이를 위로하기 위해 나섰다. 신라가 성왕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여 길을 끊었다. 이 대에 신라는 좌지촌의 말먹이 노예 고도에게 “너는 천한 노예이고 명왕은 이름있는 군주이다. 천한 노예가 훌륭한 군주를 살해하게 된다면 이것이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이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마침내 고도는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참할 것을 청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천노에 맡길 수 없다” 하니, 고도는 “우리 나라의 법에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맹세를 어기면 마땅히 노예의 손에 죽는다”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과인은 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거늘 이제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하였다.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조
餘昌謀伐新羅 耆老諫曰 天未與 懼禍及 餘昌曰 老矣 何怯也 我事大國 有何懼也 遂入新羅國 築久陀牟羅塞 其父明王憂慮 餘昌長苦行陣 久閉眠食 父慈多闕 子孝希成 乃往迎慰勞 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 斷道擊破 是時 新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曰 苦都賤奴也 明王名主也 今使賤奴殺名主 冀傳後世 莫忘於口 已而苦都 乃獲明王 再拜曰 請斬王首 明王對曰 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 我國法 違背所盟 雖曰國王 當受奴手 明王仰天 大息涕泣 許諾曰 寡人每念 常痛入骨髓 顧計不可苟活 乃延首受斬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위 <일본서기>의 기사로 보아 성왕은 신라 정벌에 나선 태자 창과 합류하기 위해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선으로 향하다 신라군에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말먹이 노예(馬奴)에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라는 왕의 머리를 예에 따라 백제로 돌려 보내고 몸은 북청의 계단 아래 묻었다 한다.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을 잘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던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치를 떨다가 마침내 신라에 분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원수가 되어 백제가 망할 때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듬해 신라 진흥왕은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으며 한강유역을 순시하고 북한산비를 세웠다. 이 때 왕이 거쳐온 지방에서는 1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죄수들을 방면하여 민심을 사로잡기에도 주력하였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오늘의 함경도 안변)를 설치하여 영토를 함경도까지 넓히고 국원(國原:충주)을 소경(小京)으로 삼아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력이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서해안으로 진출하여 중국과 쉽게 내왕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위덕왕의 외교정책
성왕의 뒤를 이어 태자 부여창(扶餘昌)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27대 위덕왕(威德王)이다. 직접 관산성 싸움을 주도했다가 참패를 겪고 부왕마저 자신으로 인해 전사하는 등 큰 부담을 안은 위덕왕은 이에 따른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태자시절 직접 신라 정벌군을 일으킬 때 “우리는 대국이거늘 어찌 겁을 내는가” 하며 원로들을 질책했지만 다시 귀족들의 발언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성왕의 죽음 소식을 듣고 웅천성(공주)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어 관산정 패전의 설욕을 별러 두 차례 신라를 공격해 보았지만 도리어 패퇴하고 말았다.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진 백제는 백제의 영향 아래 있던 가야가 신라에 병합당하는 것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약해진 국력을 대중국 외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백제는 위덕왕대에 와서도 북제(550~577)로부터 대방 지역과 동청주 지역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다음 <삼국사기>의 기사가 이를 말해준다.
위덕왕 17년(A.D 570년) 고제(高齊) 후주(後主)가 왕을 봉하여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을 삼았다
위에 나온 대방(帶方)은 북경 남서쪽 부근이고, 동청주(東靑州)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이다. 이때 북제(北齊)가 백제에게 동청주 지역과 대방 지역 영유를 인정해 준 것은 북제가 적대국인 북주(北周)를 상대하기 위하여 백제의 무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제가 망하자 백제는 북주에 사신을 보낸 데 이어 수가 북조를 통일하자 수에 사신을 보내 다시 대방지역의 영유를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이 때 수나라가 백제에게 영유를 인정해 준 지역은 대방 지역뿐이므로, 백제는 581년 이전에 산동반도 지역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28년(581)에 왕이 사신을 수(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隋)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삼았다.
二十八年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 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수나라가 남쪽의 진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백제는 진에 연이어 사신을 보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취하였다. 한편 589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하고 통일을 하자 마침 제주도에 표류해온 수나라 전함에 위덕왕은 필요한 물건을 매우 후하게 주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이에 수의 고조는,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듣고 멀리서 표를 올렸다. 오고 가는 것이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나면 곧 상하고 파손됨[傷損]을 입게 된다. 백제왕의 마음씨가 순수하고 지극함은 짐이 이미 잘 알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록 멀다고는 하나 사정이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자주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삼국사기>
라고 했다.
한편 한강하류 지역의 점령으로 중국과 가까워진 신라 역시 중국 남북조의 여러 나라들에 빈번하게 사신을 보내 교류를 활발하게 했으며, 수나라가 통일을 한 후에도 수에 유학승을 보내고 토산물을 선물하기도 등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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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수원과 평택 사이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으로 추정(단재 신채호)
(2004년 1월 허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