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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지배기동안 러시아의 중심지는 남부의 키에프에서 동북부로 이동하게 된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147년에 유리 돌고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낸다. 이후 몽골의 침략 기간 동안 약탈당했다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 다니일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1317년에 모스크바의 군주는 금장 한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칸으로부터 러시아의 대칸으로 인정받는다. 트베리와 같은 경쟁도시들과의 투쟁,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다툼 속에 모스크바는 점차 러시아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도시로 인정받게 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은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당시 금장 한국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은 트베리의 미하일과 싸워 이겼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1380년에는 자신들이 임명한 대공인 미하일의 복수를 위해 출격한 몽골군을 돈 강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1382년에 토크타미시 칸에게 패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당한다.
이후에도 금장한국의 통치는 계속되었으나 돈 강의 전투 이후에는 러시아 독자적인 발달에 크게 간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반 3세때는 이미 유명무실화된 금장한국의 지배를 폐기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에 이르러 모스크바 공국은 '연합체'적인 모습을 벗고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칼가강전투는 정말로 키예프공국과 이후 러시아의 민족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비록 칼가강전투에서 러시아는 패배하지만 이전까지의 키예프공국내의
공국과 키예프공국은 산발적인 국지전이 발생하거나 노브고로드 공국을
주축으로한 구루스계의 공국들과 키예프공국을 주축으로한 신루스계열의 공국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침입하고 공국내의 도시들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상황을
깨버리고 몽골이라는 거대한 적앞에서 키예프공국ㅁ의 영향권에 포함되며 또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주축으로한 공국들은 러시아라는 기치앞에서 수많은 공국의 자발적인 병력 지원과 칼가강 주위의 공국들의 막대한 보급등으로 키예프공국내의 대부분의 공국들이 이 칼가강 전투에 힘을 실었고 이때 러시아라는 이름아래에서 그들은 뭉쳤다 . 그러나 그들에게는 러시아라는 기치만이 앞섰을뿐 그들에게는 유리 프세볼로도비치라는 지휘관이 아닌 각 공국의 공후나 공후를 대신한 장군들이 지휘관이였다 , 또한 이들에게는 여러 타민족의 병력까지 모여있었다 . 그런 그들을 상대하는 몽골군에겐 그저 그들은 많은 수의 잔챙이에 불과하다고 할수있었다 , 몽골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방으로 나뉜 연합군을 보았으며 그들은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약한 타민족의 병력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은 몽골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키예프공국군은 몽골군을 직면하게되었고 러시아군은 결국 패배를 걷게된다 . 칼가강전투 패배이후 칼가강 유역의 공국들은 차례로 무너지며
모스크바,코르므나도,블라디미르,수즈달리 등의 공국에 직접적으로
몽골군이 유입됨으로써
이들 공국은 자연스럽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후 몽고는 다시
로스토프,야로슬라불리,트베리,유리예프,드미트로프와
같은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수공기능을 마비시키고 유리 프세볼로도비치를 1238년 3월 초에 살해함으로써
완전히 기세를 꺾었지만 유리 프세볼로도비치 한명때문에 시작된 원정인지라 본래 공격목표인 노브고로드 공략을 포기하고 이후 바투의 원정군은 회군하였지만 퇴각로 인근의 스몰렌스크,체르니코프 공국을 파괴하였으며 이들의 저항이 완고하였기에 바투의 원정군 또한 4천명의 군사가 희생되었으며 부상자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는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겹쳐서 전염병 또한 돌았다 . 그러나 그들에게 대항한 도시들 또한 철저히 폐허가 되었다 . 이후 1239년 다시 잔여 키예프 러시아공국들에 대한 영향권을 위하여 원정을 시도하여 볼가강 연안의 모르도바,무롬 지역을폐허로 만들고 드네프르강 유역의 체르니고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후 드미트리 장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잠시 주춤하지만 다시 한번 역공함으로써 키예프의 대부분에 달하는 영토와 러시아에 걸쳐져있던
대부분의 공국을 점령하였다 .
그러나 이후 바투는 포로로 잡은 드미트리 장군의 넘치는 애국심에 죽음만은 면하게 해주었다 , 키예프 공국이 무너진 이후
키예프공국과 기타공국은 폴란드,헝가리,체코로 까지 가는 루트로 이용되었으며 병력보급소로 활용되었다.
키예프러시아 멸망이후 백러시아 / 대러시아 / 소러시아로 분해된다 .
1237년, 키예프 공국 등 멸망, 서북아시아와 러시아 지역 장악
1241년, 헝가리 점령, 폴란드 공격
1242년, 독일, 폴란드 기사 연합군 몽고군에 패배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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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의 모순-러시아(2)재탄생과 번영
歷史의 모순-러시아(3)제국주의시대
歷史의 모순-러시아(4)혁명!그리고전쟁
歷史의 모순-러시아(5)냉전의 그늘아래서
歷史의 모순-러시아(6)공산권붕괴와 푸틴의 경제회복
첫댓글 한줄 요약 바이킹=>군벌국가=>전제군주정(그리스정교)-비잔틴과 동맹=>분열=>멸망
다음화에서는 킵자크 칸국도 다룰예정입니다.(6/30) (3)제국주의 시대에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와의 전쟁을 집중 다룰예정이구요 크림전쟁 까지입니다.(7/1)
(4)혁명!그리고전쟁 편은 제가 러시아11월 혁명.스탈린.독소전쟁 책을 마스터 한후에 올리도록하겠습니다.(7/5)
생소한 이름들과 지역들이 나와서 ㅠㅠ 조금 부가설명 해주셨으면 더 쉬웠을탠대 ㅜㅜㅜㅜㅜㅜ
키예프공국은 말그대로 키예프에서 시작한 바이킹 왕국입니다. 서쪽엔이미 신성로마제국. 프랑크제국이 자리잡고있어 그들과 충돌은 자멸을 일으킬게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전진햇지요 상트페테브르크.모스크바 는 이시기 작은 촌동네 엿습니다.
모스크바는 당시 세워지지도 않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8세기까지도 깡촌이죠.
러시아 초기사 하려다가 포기했는데.. (1편만 쓰고 끗)
러시아 건국에 대해서는 은밀한 자존심 싸움이 있죠. 러시아 건국의 정설은 (네스토르의 원초연대기에서도 나오 듯) 바랴크(바이킹)가 주세력이 되어 노브고로드와 키예프를 세웠다는 주장이었는데, 러시아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바랴크의 역할을 철저히 깔아뭉게고 슬라브 민중의 경제적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을 뿐이라고 하죠. 현 러시아 사학계의 공식 입장도 아직 이거로 알고 있슴메.. 반면 20세기 중반까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웠던 게르만족 계통의 국가들은 "러시아 니들은 옛날부터 우리가 나라 세워줬음 ㄲㄲ 니들은 어차피 우리한테 지배 받을 운명"이라고 말했죠.
뭐 노르만과 관련된 유적지가 당시 일멘호를 중심으로 한 북부 러시아에서 많이 나오고, 그만큼 그들의 영향력도 강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러시아 건국의 주체세력에서 슬라브 민중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바랴크들은 슬라브 신화에 매우 빠르게 동화 되었고, 현지 세력인 보야르들이 바랴크 귀족 아들을 산제물로 페룬에게 봉헌하려 하다가 (그 바랴크는 기독교였음) 완강한 저항에 빡쳐서 그 바랴크 집을 개발살 내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바랴크가 다 해먹었다는 주장도, 그들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는 주장도 현재는 설득력이 별로 없기는 합니다만..
어쩄든 글은 잘 봤습니다.
뭐 지배층만 노르만계였지 그것도 빨리 동화되었으니...... 위만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이반 뇌제랑 표트르대제... 헠
바이킹이 상륙한곳에 야자수가 있다?
시칠리아인가보죠 ㅌㅌㅌ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