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매쟁이에게 속아서 어머니가 전처가 죽은후 나이많은 아버지의 후처로 결혼. 포항 근처 구령포에서 자람. 그러나 아버지의 계속적
인 손찌검으로 30번이나 실신했던 어머니가 참다못해 버스타고 도망가 버리고 난뒤 초등학교 4년 중퇴하고 거지가 되어 이집저집에
서 밥을 빌어먹는 중에 한 주일에 밥을 달라고 구걸하였으나 그 아주머니는 급하다고 밥을 주지않고 교회로 간다. 한번 구걸하면 쉽
게 포기하지 않는 그녀는 아주머니 뒤를 쫓아가 그 아주머니가 간 교회예배에 참석한다. 그래서 예배 참석하고 식사를 얻어먹는다. 그
런데 그 예배는 어른예배였다. 어린이 예배에 참석하라고 해 어린이예배 참석하였더니 아이들이 거지라 놀려 교회에 다시
는 안오려고 마음먹고 떠나가고 있을 때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부르며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뒤에서 쫓아와 순애를 꼭 껴안주시
며 <아이들은 애를 싫어하더라도 예수님은 너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하셨다. 이에 크게 감동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 시작하
였다. 그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이 싫어하지 않게 순애의 머리를 깨끗하게 감겨주고 때를 벗겨주시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셨다. 혼
자사시던 아버지가 건강을 심하게 다치고 또 의처증을 고치게 되어 겸손해져서 어머니와 함께 다시금 아버지와 같이 사는데, 아버지
는 본처가 돌아가 본처 자식들을 위해 순애가 가서 밥해주라고 한다. 본처아들들 집에서 스물 넷이나 많은 이복 오빠에게서 13
살 나이에 강간을 당하여 그를 자살을 시도하게 하였다. 우선 바닷물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그후 엄마에 대
한 그리움애 따라 청송에서 극적으로 엄마를 다시 만났으나 엄마는 3일 후 남의 집에 식모로 가고 살기위해 스스로 3년 간 식모살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울에 얼음깨고 빨래하며 교회도 못 가며 16살 까지 식모살이한다.. 3년 후 엄마가 와서 돌아가자고 하
여 움막집을 지어 같이 살게된다. 산에서 마른 소나무잎 솔골을 모아 방에 불을 때고 산나물을 모아 시장에 팔며 산다.
이 때 아
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큰처의 아들을 밥해주라고 해서 명령해서 어쩔수 없이 갔더나 잘 방이 없어서 뱀이 통속에 우글우글거리는 창고
에서 떨며 자 잠을 설치며 지냈다. 그런데 어둔 술취한 그 어둔 그림자가 그의 옷을 짝 찢고 그를 겁탈하였다. 그리고 꿈을 잃
고 청송으로 돌아와 성경을 다 찢고 하나님은 없다고 선고하고 자살하고자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 계시다면 나를 살려보세
요> 하고 외치며 밧줄을 목에 걸고 죽으려는 순간 땅으로 뚝떨어졌다. 빈지게를 진 나뭇군 할아버지가 <어디서 나이개 새
파란게 못된짓을 한다고> 고래고래지르시며 그를 혼내켰다. 그래서 원수 갚고 죽으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겁탈한 사람에게 복수하
는 것을 자신의 최대의 목적으러 삼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도시스럽게 생기신 분이 찬송을 크
게 부르며 오자마자 <하나님은 자매님을 사랑한다 귓신아 떠나가라>고 큰소리 치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속으
로 <예수는 가짜에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사람이 불쌍해 보였고, 이분은 나를 불쌍히 여기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는 증거를 대라고 하자 이분은 자기 증거를 말씀하셨다. 그분은 학교 선생님으로 자기 아내가 분만실에서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이 되
자 분만실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이전 부흥회때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한 서원을 안 지킨 것을 기억하였다. 그래서 회개하는 기
도를 드리자 성령받고 방언이 터져 분만실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아기가 <응아>하고 태어나고 아내도 살아난 체험을 하신 분
이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던 그분은 이 사건을 통해 신앙이 살아나고 신학교 가고자 결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 하나님
이 사흘 연속해서 다 쓸어져 가는 초가집을 보여 주어서 자기 학교 학생들의 인도로 이 집으로 찾아와 귀신들린 아이 박순애를 만
난 것이었다. 박순애씨는 이분을 통해 회개하고 6개월 간절히 기도하고 새사람이 된다.
이때부터 인생이 완전
히 바뀌어짐. 그리고 교회에 나가 6개월 간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에게 내렸던 인생의 저주가 다 풀린 것이다, 찬송하
며 나물하여, 새끼꼬며 (식모살며 배웠던 것) 힘있게 살았다, 동네 머슴들의 모범이었고, 꼴을 베고, 소를 몰고, 가마니도 많
이 짜고 하나님이 그 인생을 축복해주셨다.
이 당시 한국에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다. 박순애는 기도 다
시 시작한지 6개월 되었을 때 원래 중학교 이상 나와야 4H회원자격이 있는데 똑똑하다고 그를 4H 회원으로 받아준다. 그 후 청
송군 4H 대표로 대구 시민회관에 가라고 해서 순종하여 가서 지시대로 겸손히 순종하며 강사가 강의하는 것을 열심히 메모했더니 강사
로부터 모범생으로 인정받게된다. 다음 번에 대표로서 새마을 탁아소 교사 강의를 받았다. 이때는 대학 2년 과정의 <
아동 발달 심리학>을 1주일에 가르쳐 주었는데, 강사가 박순애의 교육받는 자세를 모두 앞에서 크게 칭찬하고 박순애의 노트
를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여 펴보니 박순애가 강의 내용을 한글 맞춤법을 몰라 받침 없이 빠곡히 베낀 노트를 보고 <이게 뭐
야?> 하고 헛갈리다가 속기로 이해하고 크게 칭찬한다. 강의후 동네 탁아소를 열어서 아이들에게 배운것을 가르치고 나
니 가르칠 것이 바닥나 버렸다. 그때 새벽기도 시간에 목사님이 전한 성경이야기가 기억나 성경이야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
다. 성경지식도 모자라 나사로가 뽕나무위에 올라갔다고 하였다가 삭개오가 와 <너 내려와 내자리야> 하는 식으로 넘어갔
다. 이 아아들을 기도하며 돕자 아이들은 예수님 믿고 성장해 큰 축복받고 박순애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았다. 박순애는 산
의 소나무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경북 여자 4H대표 회장 선거 정결발표 연습하여 당선된어 경북내 무료 뻐스 승차권이 나와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자 군수의 추천으로 청송교도소로부터 재소자들 정신교육 부탁받았다. 그의 나이 19살때 였다. 처음 수백명 재소
자들 앞에서 너무 무서워서 <아...아...> 울다가 눈을 떳을때 하나님은 살인을 계획했던 자신의 죄인인 모습을 보여주
었다. 그리고 자기만 버림받은 사람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재소자들에게 인생 처음으로 19년 간의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재소자들은 감동하여 울고 불고. 사흘 만에 청송교도소에서 모든 재소자들의 간청으로 다시 교도소에 강의하러 간다. 그 후 하루
에 15-20통의 재소자들의 편지를 받고 도장 잘 안 찍힌 우표룰 다시 붙여 답장. 그러나 일주일간 편지가 안 와서 읍내 우체국
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이제까지 편지를 전해주던 우체부가 박선애 편지 전해준다고 우체국장의 책망받고 우체부일을 그만두었다 하였
다. 2001 년 <찔레꽃 그 여자>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행하자 감방에 있던 신창원이 이 책을 읽고 변화 되었
다. 그는 국민학교 4년 중퇴자로 엄마가 일찍 죽었고 불행한 운명의 사람이었다. 그러다 박순애의 강연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
다, 그 후 신창원은 검정고시 를 통해 중졸하고 계속 공부하고 박순애은 국민학교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공부때문에 전도를 위한 기도
가 결여되는 것을 보고 공부를 때려치우고 전도에 힘쓴다.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휘호 여사가 박순애의 책을 일고 사흘밤을 울
고 다른 15명 정도 사람들과 함께 청와대로 초청한다. 이휘호 여사가 참석자들과 악수하다고 비서가 박순에를 소개하자 끌어안
고 안 놓아주었다. 그래서 한달 후에 다시 독대하게 하였다. 이 대통령 부인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서울수영로
교회에서의 간증) 박순애 전도 간증 2 : <눈물의 축복> (이 제목을 처 동영상을 보세요)
하나
님은 마가 12장 30절을 통해 <너는 주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었다. 그래서 주님을 사
랑. 청송애서 살며 나무하고 나물을 뜯어 살며 새벽에 20리를 뛰어 읍내의 20여명 모이는 교회의 새벽기도에 갔다. 교인들가운데
는 가장 출세한 분들이 선생님들이었지만 이분들은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더니 하나님이 실제로 드리라
는 감동을 셨다, 그러나 드릴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감동주어서 나물과 도라지등을 목사님께 몰래 드리고 들판의 꽃과 일해준 집
의 꽃을 교회에 꽃꼿이로 드렸다. 부흥회때 포스터를 몽땅 가지고 가 읍내 곳곳에 붙였다. 그리고 부흥회 강사님과 교회담
임목사님을 교회에서 20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는 자기집으로 저녁초대하였다. 담임목사님은 강사 식사 초대를 일언에 거절하였지만 박
순애는 길목에서 서있다가 강사에게 눈물로 식사초대하자 강사가 식사하러 오겠다고 약속한다. 엄마는 큰일났다고 다른 집에서 고등
어 한마라와 달결 두개를 꿔가지고 오셔서 음식준비하셨다. 거기에다 산나물들을 차려 놓고 기다렸는데도 강사님이 안나타셨다. 날은 어
두워지고. 엄마로부터 한참 혼나고 있는데 토라진 담임 목사님의 기침소리와 숨을 가쁘게 쉬고있는 강사님이 도착. 강사님은 선애가 식
사초대한 것을 늦게 기억해 늦게 도착한 것임. 천장이 낮고 문이 낮아 눈물이 짱나도록 문턱에 머리를 박고서야 방에 들어오신 목사님
과 강사님. 강사님은 감동하여 넘치는 간절히 축복 하심. 그리고 급하게 교회로 돌아감. 교인들은 2시간 동안 찬송하며 강사를 기다
리다 지쳐있는 때 강사님이 도착하여 말씀 전. 마지막날에 강사는 인생의 가장 귀한 옥합을 바치라고 함. 그래서 아무돈이 없는 그
는 봉투에 <내 몸을 바칩니다>라고 써서 이름없이 바침. 그러나 강사님은 그를 모든 사람앞에 불러세우고 넘치는 축복기도
를 해주심. 한나와 같이 눈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 히스기야도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열왕
기상 ). 교회는 교회건물 사용료를 못줘 쫓겨나갈 처지에 처해 목사님이 한달 금식기도 선포하였다. 그리고 목사님이 새벽마
다 울며 기도. 새벽에 5명, 목사님 사모님, 목사는 한달 특별 금식기도를 선포.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 12명이 새벽기도에 나오
지만 학교선생님들은 새벽기도 잘 안나옴, 박선애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교회 증축에 모두보다 <최고 많이 최고 많이> 하
며 목사님 1 미터 바로 뒤에서 큰 목소리로 기도하였다. 목사님은 처음엔 시끄러워 다른 사람들이 새벽기도 못 나오게 한다고 막았으
나 계속 기도하자 목사님이 박순애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저딸의 기도를 꼭 들어주소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저들에
게 보여주소서> 기도함. 이것을 통해 <내가 일하면 내가 일할 뿐이지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란 진리
를 깨달음. 다른 신자들이 목사님에게 <박순애의 기도를 믿으세요?>하고 묻고 목사님이 믿지 않아 이 일이 안 일어나
면 자기들도 건축헌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목사님은 생명을 내놓고 박순애와 함께 기도한다. 헌금 바칠 마지막 날을 이틀 남
겨두고 아직 아무것도 없이 눈물로 새벽기도하고 나오는데, 희뿌연 하늘에 햇빛이 쫙 비추고 그 위로 인자하신 주님의 얼굴이 보이
고 통골하며 기도하는데 몸이 뜨거워지고 방언과 성령의 임제로 몸이 뒹굴어 지고 축지법쓰는 것같이해서 집으로 옴. 눈물의 기도는 하
나님이 다 들어주심.그런데 한 60세쯤 되는 신사분이 찾아와 그날 신문에 사진과 함께 난 박순애의 글을 가르치며 <이것이 맞
지요?> 하고 물었다. 박순애씨는 두달 전에 청송 교도소에서 내복을 입고 싶은 죄수들에게 내복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내
복 살 돈이 없는 그에게 하나님이 글을 쓰라는 감동을 주셔서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글이 그동안 신문
에 안 실려서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글이 두달 후인 이 날 조간신문에 실렸던 것이다. 장로님은 이 신문기사를 보고 박순애
를 찾아오셔서 교도소 6000 명을 일인당 얼마씩 도우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박순에는 이분에게 교회 건축이야기를 하고 자기가 제일
많이 헌금하고자 하는데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이분은 갑자기 돌아서 하나님께 기도응답해주었다고 감사기도드리고 나
서 하나님이 자기 기도 응답하였다고 말함. 이분은 원래 가난했던 분으로 열심히 일해 중소기업을 일으켰으나 복받고 나서 신앙을 잃
자 빚더미에 쌓여 파산하게 됨. 이때 자기 자식의 말을 따라 남은 마지막 재산인 한 집을 팔아 교회 건축위해 바침. 그리고 3
년 동안 눈물로 1000번제로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내려 주셔서 재산을 이제는 자기위해 쓰지않고 하나님을 위해 바
치는 생활을 하기 시작함. 그리고 신문에서 교도소 옷을 살돈을 도와달라는 박순애씨의 글을 일고 찾아옴. 그러나 교회 건축의 이야
기 듣고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감사. 그리고 수표가 아닌 현금으로 달라는 박순애 말대로 은헹에서 만원짜리가 가득한 돈보따리를 가지
고 왔슴. 그래서 돈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드림. 그 분은 참으로 거품빠진 것 같이 참 겸손하심. 교회 가까이 와선 박선애 혼
자 돈가지고 가도록하고 자기 길을 가버리심. 목사님은 <하나님 내가 박순에가 제일많이 드리것을 못믿었던 것 잘못했습니
다>라고 하나님께 회개기도하심. 엄마는 3년 식목 살아 번 돈으로 송아지를 사 키웠슴. 커서 소 몰기가 어려워지자 동네사람들이 소에게 코뚜래를 하여 순종 잘하게 함. 소는새끼까지 낳음. 그러나 엄마는 소 팔고 반지 팔아 기도한 후 교회에 헌금으로 몽땅 드림. 이 후 박
순애시는 하나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옴 (26 살에?). 서울엔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었다. 믿는 포장마차 아주머니 말대
로 기도원에서 밥 얻어먹기 위해 2달 생활하며 눈물로 기도. 그후 하나님의 은혜로 안나가는 방을 후불로 방세 치루기로 하고 일
당 만원 일을 시작. 박순애 전도사 간증 3 : <기적같은 축복> (이 제목을 처 동영상을 보세요) 청
송에서의 하나님이 서울로 올라와 기도원에서 2달동안 기도. 기도하는 동안 빨아?은 옷이 마름. 하나님은 박순애 주려고 안 나가
는 방을 후불로 얻도롤 하심. 그리고 한 시간애 갈수 있는 교회가 있어서 감사하며 나감.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되는 것이 꿈이었
다. 이는 이전에 자기를 꼭 껴안어 주었던 분이 교회 교사였었고, 또 교사가 명예스러운 명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벽기도시간
에 목사님 바로 뒤에서 <교사, 교사...>하며 기도하였더니 목사님이 참지 못하고 주일학교 책임자에게 말했더니 자리
가 없다고 거절. 다시 열나게 기도하자 목사가 책임자에게 교사자리 하나 만들라고 명령. 그러자 목사님이 5? 학생 이름이 적힌 쪽
지를 주며 이 학생들을 맡으라고 함. 그래서 주일학교에 갔더니 한 학생이 나와 있었다. 성탄때 떡 얻어먹고 이제까지 통 안 나오
던 아이였다. 나머지는 명단의 아이들은 통 안 나오는 아이들이었음. 순애는 없는돈으로 그 아이에게 짜장면을 사주고 아이들을 교회
에 데려오도록 했더니 짜장면 얻어 먹으려고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 그러저 아이들 수가 20명이 금방 넘어감. 목사님의 칭찬에 박순
애는 다른 교사들의 따돌림과 험담의 대상이 되었다. 이 아이중에 한글도 모르는 아이기 있어서 이 아이에게 성경을 베껴 쓰도록 도왔
다. 이것은 자신이 성경을 베끼며 한글을 배운 경험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다. 성경베끼기가 어렵다고 읽기책을 배우는
데 한 학기에 배울 책을 한달에 두번식 떼며 받아쓰기하도록 하자 받아쓰기 100점을 맞음. 교만해 질려고해 하나님께 영광. 부모님
은 박순애가 서울대 나온 사람이라고 소문냄. 그리고 부모들은 학생들을 더 이상 학원에 안보내고 박순에에게 데리고 와서 돈봉투
를 줌.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이애들은 2학년이고 너는 3학년을 마쳤지 않은가 하
고 하셔서 자신감 갖고 선생일을 함. 아이들은 정말 공부에 먹통이었음. 박순애는 기도하기를 부모들이 돈 돌려 달라고 하지않도록 간
절히 기도하자 목사님은 헛갈리기 시작함. 그런대 50등 꼴찌에서 38등으로 올랐다고 부모가 크게 감사했다. 왜냐하면 과외때 가르
쳐준 완전학습에서 학교 시험 문제가 나왔기 때문. 공장다니는 그 부모는 크게 감사하며 문제아인 4학년생 특수반 아이를 데리고 왔
다. 그리고 6만원을 과외비로 줌. 그래서 못 배워다고 말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특수반 4학년 교재를 보니 더하기 빼기등이었
고 그아이는 전교의 꼴찌였고 학교의 문제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30분 감사기도를 드렸다. 아이는 어리둥절해 <선생님, 뭐
가 감사해요?>하고 물었다. 목사님은 순애의 기도가 바뀐어 학생들만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이상해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이
들 그만 가르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박순애를 가르치기 위해 애들을 보냈다고 답해주심. 박순애는 이 아이들에게 성경의 진
리를 가르치기 시작함. <너를 낳은 사람, 그를 낳은 사람, 또 그를 낳은 사람은 누구냐?>고 계속 묻고 잘못하면 지
옥가니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침. 그러자 이 아이가 태도가 달라지고 성적이 종아져 학교 선생님이 과외 선생님이 진짜 선생님이라
고 칭찬함. 그러자 이 학생 어머니는 박순애 선생 소문을 내서 과외를 받고자 하고자 하는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장 다니는 것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과외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 하나님이 열어주자 하늘의 축복의 문이 열림 2시 1.2 학년, 4시 3.4학년, 6
시 5,6년 과외를 해 한달 200 만원씩 벌어 시골 어머님께 전화해 서울에 올라와 같이 살자고 연락함. 그러나 엄마는 동네 사람
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딸이 몸을 팔아 돈 번다고 의심가운데 서울에 올라옴. 엄마에게 공부가르치는 아이들을 보여주자 엄마
왈: <국민학교도 못나온 우리애가 뭇었하나?> 다행히도 아이들은그 말을 못 이해함. 그런데 불법과외 단속에 걸려들어 문
을 닫음.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평강이 찾아옴. 그리고 40일 작정하고 교회에서 기도하
기 시작. 문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함. 23일 만에 기도의 응답으로 전에 강의하러 갔을 때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
을 만나니, 그 사람이 선생이라고 부르며 따라옴. 이 사람은 박선애의 강의를 듣고 하나님을 믿고 신장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였
다. 그는 바로 옆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타고온 오토바이에 박순애를 태워 그 공장 주인에게 데리고 갔고 ,이공장 주인은 이사
람 말에 떠밀려서 학원 하는데 돈을 대주었음. 그래서 상상할 수없는 많은 돈을 얻어 건물을 사고 시설 규정에 맞게 갖추고 허가 맞
으러 갔음. 학원 선생은 대학 졸업에 교원 자격이 필요했지만 원장은 학력이 필여없었다. 등록증엔 학벌이 나오지 않음. 40일 기도
가 끊나는 날 학원개원 감사예배를 드렸다. 합법적으로 문 여는날 60명이 몰려들었고 또 계속 몰려들었다. 수업참관해 봤더니 선생
은 답안없이도 아주 잘 가르침. 그래서 강사를 칭찬하자 강사는 원장앞에서 가르치기가 떨린다고 하였다. 강사등은 원장이 서울 일류대
학 나오고 잘 가르친다로 소문이 났다고 함. 박순애는 아이들을 차로 학원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음. 조그만 차로 애들을 2중 3중으
로 태워 운반. 집응 지나친 아이 내려 줄려고 얼음판 길에서 급정거하자 차가 길옆이 낭떠러지인 길에서 360도 돌아 제자리
에 딱 멈춤.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재미있게한 걸로 돌려 대어 가기 집에서 사고로 이야기 하지않도록 이야기함. 그리고 교회에 가
서 하나님께 감사기도함. 그리고 기사와 버스를 도입하여 운행. 십잉조를 모든 비용을 빼고 나서 십일조를 바쳤었는데 회개하고 수입
을 갖고 우선 십일조를 먼저 깨끗한 클린엣스애 넣어 한달을 모은 돈 200 만원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고자 하였으나 첫째 주
는 십일조 드릴까 말까 망설이다 못드리고 그 다음주는 결단하고 주님께 바침. 그러자 하나님은 축복을 넘치게 주셔서, 컴퓨터, 미술
학원, 여기 저기에 문을 열어 문년 곳이 5 군데가 넘었다. 이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후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루셨
다. 빌딩 짓는 동안 신문지 깔고 기도함. 부모들이 피?을 들고 중고등부를 신설하라고 데모. 초등부를 졸업한 부모들이 다른 곳에서
의 중등부 과외가 맘에 차지 않아서 데모. 하나님은 억지로 생각지 못한 것을 하게사심., 그래서 일주일간 금식기도함. 하나님은 믿
는자에게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가르쳐주심. 그래서 중고등부 과외학원, 태권도 도장 등을 열어 180명이 태권도를 배움. 이것은 눈물
로 뿌린 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종합학원을 허락받아 열음. 십일조는 200, 400, 500 만원이 1000만원이 되었다. 이
것을 정성응 다해 드렸다.이 영광을 하나님께 드림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과 고난의 때를 참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의 무릅
을 꿇는것.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기도한것. 첫번째 불쌍한 마음으로 아이들 둘을 가르쳐 주자 하나님이 축복하심. 우리는 심
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과외가 멈쳤을때40일 작정 기도했을때 하나님이 축복해줌. 셋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것이다. 사
업하는 사람은 그날 그날 들어온 총매출의 총액중 먼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4부 인내하는 자의 축복 - 박순애 전도사님von 주은혜
폭력배 출신의 남편의 억어지에 의해 결혼한 그녀. 그리고 남편의 폭력으로 시달리다 못 견뎌 자살하려던 그녀. 하나님은 남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종으로 찬양지로
------------------------------------------------------------------------------------------------------ <찔레꽃 그 여자>의 저자 박순애 전도사 출처 http://blog.daum.net/sk1946/18312899
- 아래의 글은 금주 월화수요일 내가 만난 사람(박순애 전도사님)이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에 보냈던 간증 편지의 전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많은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됨을 먼저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1963년 포항 구룡포 바닷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저의 가정은 불행했고 후처인 저의 어머니는 의처증,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의 매를 맞아가며 막내인 저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수십 번 기절하며 모진 매를 맞던 어머니는 제 나이 11살 때, 결국 저를 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저는 그때부터 학교를 중퇴하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13세때, 스물 넷이나 많은 이복 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데 그 후로도 몇 차례 엄청난 고통의 순간들이 저를 견딜 수 없는 벼랑으로 몰고 가 급기야 죽음을 각오하며 그 이복오빠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일학교를 조금 다녔던 저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는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오직 죽겠다는 각오뿐인 먹 빛 같은 제 인생에 뛰어든 그분은 한 사람은 끈질긴 전도로 저를 이십리 길을 걸어서 읍내의 작은 개척교회로 이끌어 냈습니다. 열 여덟 살의 꿈이 절망 속에서 살아나며 새벽마다 주님 제단에 엎드려 다시 살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경북 청송의 산골을 흔들어 깨우는 4-H 농촌 청년의 꿈을 안고 열심히 살아갔고 2년 뒤에는 경상북도 4-H 회장으로 뽑혔습니다.
-청송교도소 투쟁기- 다시 살아난 저의 인생은 죽음에서 건져 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4-H 회장이 되어 농촌을 익히고 배워가며 새벽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83년 봄, 제 나이 스무 살이 되던 어느 날, 가까운 곳에 문을 열었던 청송 교도소 청송 보호 감호소에서 4-H 회장인 저를 재소자 정신 교육 강사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 첫 강의 때였습니다. 그들의 모습 속에 숨겨진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도 한 때 나를 짓밟았던 그 인간(나의 이복오빠)을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치를 떨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수많은 재소자들의 모습은 바로 저의 모습임을 알았습니다. 선 채로, 돌이 되어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주님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나를 살려주신 주님께 이제부터 나의 일생을 이 버려진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나의 일생을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리고 그날로부터 20년을 달려 지금까지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송 보호 감호소는 81년 말에 생겼는데 당시 6천 여명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제5공화국의 등장으로 사회보호법이라는 잘못된 악법의 희생자들이었고 징역을 살고 난 후에야 '보호감호'라는 이름아래 무조건 7년 내지 10년을 덤으로 살아야 하는 억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저는 새벽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용기로 갇힌 자 6천명을 등에 업고 당시 (85년~89년)사회보호법 폐지를 외치며 그 청송에서 중앙지 신문에 계속 글을 투고 하는데 대대적인 투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죽음을 각오한 나의 투쟁은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무서운 정치적 통치아래 살수가 없었던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재소자들은 단식투쟁을 안에서 벌이고 저는 밖에서 매스컴으로 알리며 정부를 상대로 싸웠는데 89. 7. 14 대법원 판결이 났습니다. "사회 보호법 위헌" 이라고 말입니다.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축복- 89년 12월, 맨몸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진 저의 인생은 어느 기도원으로 찾아가 공짜로 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두 달 동안 하루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두 달 후 월셋방을 얻어 기도원에서 나왔고 가구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2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아이가 두 명 있었습니다. 밤마다 2명의 주일학교 애들을 불러 저의 월셋방에서 무료로 한글 공부를 가르치는데 사실 저도 그 당시 성경 쓰기를 하며 한글을 터득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가르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두 명의 아이는 한글을 다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두 명 아이의 엄마는 나를 찾아와 아예 애들 과외를 부탁했는데 초등학교 중퇴인 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용기를 내어 설마 2학년쯤이야 못 가르치랴 하면서 시작했는데 애들은 매달 학교 성적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초등 전 과정을 저 혼자 공부하며 낮에는 아이들 과외 선생이 되었는데 시작한지 1년 반 만에 과외 인원은 30명이 넘어섰습니다. 그때 공장을 그만두고 전문 과외 선생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어느 날 불법과외에 적발되고 과외는 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져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도 학원을 하고 싶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열쇠였습니다. 92년 7월1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학원 원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매년 학원을 하나씩 문을 여는데 외국어, 입시, 보습학원까지 7개 종합학원의 700명이 되는 원생과 버스차량 3대, 30명이 넘는 교사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증거 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나의 가정, 하나님의 응답- 저는 어릴 때의 성폭력으로 인해 남자를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이란 것을 생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 일곱의 어느 날, 한 남자의 끈질긴 관심과 구애가 시작되는데 그 남자는 제가 기도하던 목사 사모의 꿈을 완전히 깨버리는 조직폭력의 앞잡이요 대구 동성로를 누비며 온갖 못된 짓을 다 한 개망나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에서 내 놓은 깡패 우두머리인 그 남자는 알고 보니 이혼 남이었고 아들(8. 10살) 둘 까지 달린 채 본인은 기소 중지자인 몸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 왔는데 자신과 결혼해 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며 농약병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3일 동안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는데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알'의 말씀을 주셨는데 결국, 저는 그 남자와 두 아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보고 울며 차라리 당신이 죽겠다며 식음을 전폐하며 누우셨습니다. 저는 불쌍한 두 아이를 안고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내 목숨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고 내 몸으로 자식을 낳아 이 애들과 편애하지 않기 위해 나는 자식을 낳지 않고 이 애들만 나의 전부로 키워 주님께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변화시켜 주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새벽마다 울음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옛날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매일 술과 도박으로 밤을 새우고 예수를 믿기는커녕 어느 때부턴가 집에 오면 나를 구타하는데 칼을 들고 죽인다고 발로 짓밟고, 차고, 목을 조르며 온몸이 걸레처럼 늘어지게 패며 아이들과 어머니까지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저는 맞아서 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불쌍한 두 아들을 데리고 교회로 도망가며 밤마다, 새벽마다 녹아 내리는 눈물이 심장을 태운 어느 날, 남편이 학원 기사 부인을 데리고 집을 나간 97년 여름, 억수 같이 비가 오는 그 빗줄기 속에서 고등1, 중3이 된 두 아들을 버려 둔 채 저는 학원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미친 듯이 울며 "하나님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신 이가 주님이시지요, 내가 언제 저런 인간을 달라 했나요, 주의 종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미친 인간이 나의 피를 말리고 때려 더 이상은 살수가 없습니다. 그 통곡 속에서 아래로 뛰어 내릴 그 찰나에 울며 매달리는 두 아들... 울부짖으며 "엄~마, 엄마, 우리는 어떡해요, 엄마..." 빗줄기 속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나를 죽을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저는 그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 왜 나를 다시 살리십니까"를 외치며 그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후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와 어딘가에 이끌린 듯 새벽기도를 나갔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묵묵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던 남편이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울며 돌아와 제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며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가슴속에 메아리쳐옵니다. "내가 그를 만졌노라" 그 음성에 나는 통곡을 하며 "주여! 주여!"를 외치며 우는데 남편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의 눈물과 엄청난 통곡을 쏟아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에게도 용서를 빌며 며칠 동안 울음에 잠겨 있던 남편은 그 후 신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머리까지 빡빡 깎고... 99년부터 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며 지금까지 찬양과 기도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행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돌아와 지금은 어떤 남편보다도 오직 주님과 가정을 위해 살아가는 멋진 남편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저의 마지막 기도, 주의 종의 사모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이루어주신 멋진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이제서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저의 살아온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내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이라 울면서 기도하기를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안 된다고 수 많은 날을 울고 있는데 결국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어 부족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책을 인쇄 할 때에 2001년 신정부터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진정한 용기를 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에 간증을 하는 또 다른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지난해 2월에는 청와대에서 영부인 이희호 여사님이 저의 책을 읽으시고 3일 밤을 우셨습니다. 3월15일 저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7회의 만남을 가졌고 지난주 금요일은 3시간 독대를 하며 그분의 손을 잡고 기도와 위로의 성경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영부인께서 요즘 일과 중 "새롭게 하소서"를 기다리며 그 프로를 통해 많은 위로를 받고 계신다고 하셨고 "박순애 전도사도 "새롭게 하소서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족한 글을 두서없이 적어 보내 드림에 죄송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심은 더욱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저를 부르셨음을 믿고 오직 기도하며 나아겠습니다. '새롭게 하소서'의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박순애 전도사 올립니다... ---> 신승균 전도사(박순애 전도사 부군)의 찬양춤 동영상 2009.9.6 | tv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