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원미동
/김순자
원미동! 이름만 들어도 가슴 울렁거린다. 너와 함께 했던 젊은 날들이 다시보고 싶은 영화 장면들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3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오니 도둑이 들어 이불장과 서랍장이 다 뒤집혀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석왕사’ 뒷동네 이층집 셋방살이를 하면서 예 닐곱 먹은 큰 딸을 데리고 서울로 출퇴근을 하며 맞벌이 하던 때였다.
그날 저녁 너무 무서워서 어린 딸과 나는 남편이 올 때가지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도둑으로서는 가져갈 게 없었으니 되레 허탕 아닌가. 가난한 시절 이였기에 들고 갈 금이나 돈도 없었으니 되레 그냥 간 도둑이 안 되었구나 하는 순수한 마음까지 가진 앳된 나이였다. 어느새 두 딸이 결혼했고 딸들이 집에 오면 그 옛날이야기로 밤을 새우곤 한다.
나에게 원미동은 다양한 가족사가 담겨있는 제2의 고향! 이제 인생 2막의 길에 들어서서 새로운 스토리를 펼쳐가려고 하는데 삼십여 년 넘게 나의 보호자가 되어준 남편은 혼자서 멀리 소풍을 떠났다. 남편은 5차 항암 후 후유증으로 응급실을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급기 야엔 회복하지 못하고 산소마스크와 항암패티로 호스피스 치료를 받더니 서서히 근심걱정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소풍을 가기 며칠 전이었다. 병동애서 움직일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빨리 태국 여행 준비해서 인천공항으로 가야한다며 헛소리를 했다. 그간 해외여행 한번 함께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 걸까? 아님 떠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인지.
두 딸을 출가시키고 오롯이 둘만이 함께한 지 이제 6년째다. 우린 늘 따로 국밥처럼 동상이몽의 세상을 살아왔다. 함께 외출을 할 땐 “지름길이냐 대로냐”하며 툴툴거렸던 나, 암환자로 체온이 낮았던 사람에게 갱년기로 열이 많이 나니 현관문과 창문열기로 눈치 보면 답답해하던 일, 손재주가 많은 탓으로 완성품보다 재료를 사다가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신발장, 목욕탕, 무엇이든 구상하고 만지면 뚝딱 만들어 내는 그의 금 손이 다시 떠오른다.
지금 내 삶은 그와 만나서 작별하기까지의 이전의 역사를 뒤로하고 이젠 새로운 원미동 살기 2차에 진입했다. 요즘 매일같이 열심히 드라이버로 나사 뽑기를 하면서 새삼 그의 손길이 그립다. 그간 돌쇠처럼 세상에서 나만을 아껴주던 주인이 가버렸으니 나는 다시 홀로서기 연습중이다. 원미동에 안식처를 장만하고 살아온 세월이 이제 서서히 사라지려고 한다. 재건축 승인이 되어 더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내 삶의 절반 이상이 스며든 이 집은 몇 년 안에 새 옷으로 갈아입을 예정이다. 그러니 그간 이곳에서의 내 역사는 내안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빠를 잃은 딸들은 부천역만 내려도 원미동의 옛 시절이 떠올라서 더욱 그립다고 올 때마다 울먹거린다. 내 삶의 터전, 내 인생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베여있는 원미동! 나 또한 말만 들어도 가슴 울렁거린다, 그와 함께 거닐던 부천역과 춘의역 등 사방팔방으로 이어진 도로 답답할 때 팔 벌리며 나를 맞이해준 원미산, 원미공원, 종합운동장 등등 그 가운데 자리한 원미시장의 생기 넘치는 삶의 현장이 있어 살아가는데 활력소를 주었던 곳이었다.
눈 감고도 찾아 갈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너 원미동! 남편과의 시작과 마지막을 맞게 해준 영원히 잊지 못할 곳이다. 오늘도 소풍을 떠난 그를 향해 말한다.
“여보! 오늘도 당신은 천상에서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겠죠. 그래요, 원미동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지요.
첫댓글 원미 2동 글쓰기 교실의 수다쟁이 다락방은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