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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 누구나 떠날 때는 예수님처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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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누구나 떠날 때는 예수님처럼 /
박윤식 [big-llight] 240924 No.176225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돌보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뜰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버려라.”’
이렇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여정에 필요한 떠남의 영성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굳이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마귀를 쫓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이 자신들에게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런 기적들을 행할 때 사람들은, 제자들을 떠받들고 대우했을 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한 집에서만 떠날 때까지 머물라셨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앙심이나 애착 따위는 품지 말고, 그저 뒷일은 하느님께만 맡기고 훌훌 떠나라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내 보낼 때에 ‘떠날 때’라는 말이 세 번이나 하셨다. 지팡이, 식량 자루, 빵, 돈, 여벌 옷 등 이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인데, 그 하나라도 지니지 말라신다. 곧 주님께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일 게다. 길 떠나서 세상 것에 지배받으면 하늘의 법칙을 선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떠남의 첫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만 머물러라.’라고도 하신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그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훌훌 털어버려라.”라고 하신다. 어쩌면 한 집만이 아닌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 그만큼 더 많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게다. 그러나 예수님은 떠날 때까지 꼭 한 집에만 머물며 이웃에게 민폐를 절대 끼치지 않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두 번째 뜻이다.
또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분명한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세 번째로 말씀하신다. 이는 최선을 다해도 분명 되지 않는 게 있다는 뜻이리라. 세상사 다 그러려니 여겨 그 아쉬움은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집착하란다. 이렇게 떠남의 자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무능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예수님의 당부는 그분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것일 게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고,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성모님께서도 당신을 종으로 낮추셨다.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만큼이나 낮추었기에 빈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가기에 바쁜 세상이지만, 가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종’의 마음이 필요한 때다.
철칙중의 철칙이요 당연지사인 사실인, 누구나 죽을 때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 이렇듯 삶의 끝자락은 비우면서 홀가분하게 떠나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리라. 사실 우리는 날마다 떠난다. 과거와 떠나고 자신의 현재와도 떠난다. 떠나는 것만 잘만 해되어도 늘 기쁨이 함께 한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떠남의 세 가지를 헤아려보자. 삶은 어쩜 떠남의 연속이니까. 늘 자신에게서 떠나는 삶을 살자. 우리를 구원코자 오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시고, 훌훌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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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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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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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9월 27일 연중 제25주 수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35519
김레오나르도 2023.09.27 05:02
- 인적이고 통합적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공관복음 공통으로 주님께서는 중간에 열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말씀으로도 가르치시고, 마귀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이제 가르침 받은 대로 그리고 본대로 가서 하라고 당신 없이 파견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차피 주님 없이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예행연습 삼아 또는 선교 체험 삼아 파견하시는 것인데
오늘 파견에서 주님의 선교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입니다.
악령 퇴치와 질병 치유를 나눠서 볼 수도 있지만
같이 보는 것이 주님의 통합적인 치유와 선교 방식을 이해하는 데 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선교 방식은 전인적이고 통합적입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만 하고
질병 치유에는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한때 저는 성령 쇄신 운동하는 분들이 그 기도회에서
치유행위를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보다 치유에 더 마음이 가 있고
그것을 자랑까지 한다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문제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통합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고 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치유의 능력이 없기에 제 주변의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만 해드리고 있는데
치유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게도 주셨음에 틀림이
없는 그 능력을 제 믿음이 부족하여 받지 못한 것 같아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 이렇게 얘기하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질병 치유도 통합적이고 전인적입니다.
육신의 병만 치유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령 퇴치는 병으로 치면 마귀 병의 치유입니다.
요즘 제게는 질병과 관련하여 확신이 있고 이것을 몇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질병에는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이 있는데
이 영혼의 병이 가장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병이고,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이 병부터 치유해야 한다고.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병 치유에만 관심이 있고,
요즘은 그래도 마음의 병이나 정신의 병까지 관심을 두는 분들이 있는데
자신과 관련해서든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든 영적인 상태까지 관심을 둬야 하는데,
악령 퇴치의 권한과 힘을 오늘 주님께서 주신 것은 이런 뜻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악령 퇴치를 할 수 없더라도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영혼 상태까지 살피며
그를 위해 전인적이고 통합적으로 사랑하고 기도해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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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 수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151314
김레오나르도 2018.09.26 03:33
- '그곳'과 '그것'을 주님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얘기는 공관복음을 통틀어 세 번 나오고
열두 제자와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두 번은 중반에 나오는데
마지막 한 번은 부활 후 승천하시며 파견하시는 부분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이 받으신 사명을
제자들이 이어가도록 맡기신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주님 없이 자기들이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제자들이 파견을 받는 것은 나중에 온전히 혼자서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체험을 하는 성격이 크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걸 묵상하면서 옛날 제가 한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을 생각게 되었습니다.
무전 순례와 구걸을 하면서 저는 늘 부끄러워하였는데 그것은 구걸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것을 체험이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면서도 프란치스칸의 순례자와 나그네의 영성과 삶을 강의하거나
강론할 때는 마치 제가 잘 살고 있는 양 얘기하곤 했지요.
그래서 이런 강의를 하고 나면 살지 못하고 체험한 것보다
살지도 않으면서 산 것처럼 떠들어댄 제가 더 부끄러웠지요.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매년 하는데
살지 못하는 것을 1년에 한 번 행진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순례자와 나그네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고
위안을 삼으려 한다는 자책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지 못하고 체험 정도로밖에 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집을 완전히 떠나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떠돌이생활과
복음 선포의 삶을 살 수 없다면 지금 살고 있는 것 안에서 파견의 사명을
살아가자고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주님 말씀 중에서 <보내셨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곳’과 ‘그것’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곳’에 ‘그것’을 하라고 보내셨다는 사명의식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제가 제일 크게 생각이 바뀐 것이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제가 제 1차적으로 파견된 곳이 바로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가리봉 공동체이고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이며, 그래서
저는 저희 공동체를 복음화하고 형제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첫 번째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쉽지 않지만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연장합니다.
밖에 나가서 곧 건설현장에 가서 그 사람들을 복음화하기 전에
집에서 복음화하기 위해 노력을 하자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건설현장에서의 저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거나 제게 뭘 해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오히려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저 자신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서입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그렇게 안 되고 오히려 형제들에게 바랍니다.
형제들이 이런 형제들이기를 바라고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않고 형제들이 원하는 제가 되고 원하는 걸 하는 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겠는데, 아무튼 우리는
내가 제일 많이 사는 곳에 내게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파견된 것이니
파견되어 해외에 나가거나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사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파견된 곳임을 명심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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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가 너무 닮았는데,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ㅁ’이 ‘ㅇ’으로 바뀌면 된다. ‘ㅁ’이 ‘ㅇ’이 되려면, 즉 모난 네모가 둥근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부딪혀 깎여 나가고 닳아서 둥글둥글 해져야 한다.”
사람이 서로 부딪혀야 사랑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또 공감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꾸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관계를 이어갈 때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당에서는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이런 고민을 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면서 하소연 하십니다. 신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다면 잠시 미사만이라도 나오라고 말씀드리는데, 얼마 못 가 성당에서 뵙기가 힘들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부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과 함께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 주님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필요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 특별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니까(니키 쉬펠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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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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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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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주일학교에서 ‘필드트립(Field Trip)’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4시에 모여서 필드트립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차량봉사를 해 줄 형제님들도 함께 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필드트립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필드트립의 장소는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이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메츠와 양키즈 구장에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 전에 ‘돔’구장을 신축했습니다. 야구장은 덥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는 9회 말에 점수를 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1점차로 이겼습니다. 이런 필드트립이 좀 더 발전하면 필드필그림이(Field Pilgrim) 될 수 도 있습니다. 야구장, 농구장에 가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가서 학생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 ‘필드트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필드트립 장소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 언덕에서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필드트립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필드트립’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5년 전에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에파타와 탈리타쿰’을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기 바랬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서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근심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필드트립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2월 13일,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필드트립의 장소는 다르지만 제가 해야 할 소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소명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제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부유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유하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필드트립’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멋진 필드트립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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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는 어릴 때 탁구 선수를 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운동들도 배웠습니다. 운동을 배우다 보면 꼭 듣는 말이 있습니다. ‘힘 빼라 ’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힘을 빼면 어떻게 움직이지? 운동을 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힘 빼라’라는 말의 뜻은 쓸데없는 힘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공이 오는 방향을 치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움직임도 좋아지고 부드러워지며 동작도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을 편하고 부드럽게 사는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쓸데없는 힘을 빼는 것입니다. 욕심이라는 힘을 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미숙함을 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많은 욕망을 안고 살아왔다는 것도.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연습시키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는 방법을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 몸 어느 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손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 모든 동작이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삶이 불편하신가요? 늘 온몸이 힘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힘드시나요? 힘을 빼보세요. 지금 쥐고 있는 손을 펴보세요.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그것을 놔보세요.
그렇다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는 편하고 가벼워질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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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게임
오랜만에 당구를 쳤습니다.
옛날에는 곧잘 쳤는데, 오랜만에 당구를 치니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당구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겠지만 제가 하는 당구는 단순한 경기입니다.
당구 큐로 내 공을 쳐서 다른 공 두 개를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 공을 잘 치는 것이 먼저입니다만 처음 맞는 공의 각도를 조절해서 두 번째 공에 내 공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점을 획득합니다.
특히 두 개의 공이 멀수록 더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 마음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잘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잘 맞아야 시너지로 다른 효과를 낼 수 있음도 당구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당구처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 이것이 인간관계이고 삶이지 않을까요? 내 마음도 잘 치고, 상대 마음과도 잘 맞을 수 있도록…. 마음과 마음 때문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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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복음선포와 회개, 믿음과 치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 오이다.”(시편119,105)
빛이자 길이요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어 표류하고 방황하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바 빛이자 길이요 추구할 바 희망이자 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 평생 화두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시 우리에게도 영원한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가 자주 되뇌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 파견받은 열두 제자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목적은 단 하나 열두 제자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병자들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목표가 뚜렷하니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유의 삶이 아니라 전적 포기의 존재의 삶,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역시 안주의 삶이 아니라 도상(途上)의 삶, 순례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믿는 이는 모두가 ‘길가는 사람’, 도인(道人)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흘러야, 떠나야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삶도 행복도 자유도 선택입니다. 말그대로의 무소유는 아닐지라도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집착의 초연한 이탈의 가난한 삶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셨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자리 잡고 있는 내 삶의 제자리가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려는 우리에게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공감이 가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회개와 더불어 믿음과 치유의 삶을,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 감사와 겸손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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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우리 님 그러하시듯
끊어진 것을 잇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잇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흩어진 것을 모으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모읍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씻어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굽은 것을 바루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바룹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메마른 것을 적시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적십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엉킨 것을 푸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풉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모난 것을 다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다듬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쓰러진 것을 일으키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일으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무른 것을 돋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돋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부족한 것을 채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채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멈춘 것을 움직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움직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죽은 것을 살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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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몸에 관한 일을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자기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을 만큼 속세의 온갖 염려와 세상 일이 요구하는 노역에서 자유로워지기 바라셨습니다.
생필품인 양식을 얻을 걱정도 하지 말기 바라셨지요. 이런 것조차 지니지 말라고 가르치는 분이시니 재물에 대한 애착과 더 가지려는 욕망을 철저하게 잘라 버리셨음은 물론입니다. 그들의 영과, 그러니까 그들의 왕관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분은 제자들을 철저히 알몸으로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이 육신에 대한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는 시편 말씀을 상기시키시듯, 먹을 것 걱정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베스터만은 영혼이 삶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으로 묘사한다. 베스터만이 영혼에 대하여 그린 그림은 앞에서 언급한 10개의 설교에서, 특히 마지막 세 편의 설교에서 엑카르트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 유사하다. 두 신학자 모두 복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찬양의 능력과 위로의 행위가 사방으로 뻗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창조 에너지의 흐름에는 거룩하지 않은 것, 성스럽지 않은 것. 적대적인 것이 없다. 오감 역시 이러한 밖으로 흘러 나옴과 안으로 흘러듦에 참여한다. 창조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복도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문다. 우리는 가장 내밀한 핵, 영혼의 하녀, 신적인 불꽃 역시 모든 피조물에게 볼을 댕기는 복의 햇불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일 속에서 만물을 사랑한다. ‘만물’ 속에는 영혼이 들어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영을 “소용돌이" “회오리”로 묘사하는 액카르트는 우리 정신의 심층이야말로 풍성한 복의 뿔*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이 세계 - 이것 역시 영혼이다 – 로부터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불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복을 받았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풍요의 뿔인 소용돌이나 회오리의 가장 내밀한 심층으로 가라앉는 여정이다. 왜냐하면 그곳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에 익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것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과 신적인 모든 것의 본래적인 특징이다.”(24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8절: 신학과 대학
중세 초기에는 성서신학을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학의 정신에서 전승하고 계속 장려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11세기 교회생활의 심화는 12∼ 13세기에 신학사상의 더 광범위한 분화로 이끌었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교황의 지도하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합생하면 할수록, 민족들의 정신적인 교류도 그만큼 더 활발해졌다. 사상의 교류는 전승된 것을 다방면으로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십자군에 의한 세계상의 확대는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학문활동의 중심은 수도원으로부터 새로 탄생하는 대학으로 옮아갔다.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베네딕토 회원인 도이츠의 루프레히트(+1135)는 아직 엣 전통 상태에 서 있었다. 그러나 투르의 배렌가르( +1088)는 벌써 고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성체론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에 이론을 제기하였다. 즉. 빵과 포도주는 상징에 불과하고, 그것들은 축성에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초자연적 힘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1079년에 로마에서 거부되었을 때, 그는 굴복하였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1215년에 미사에서의 축성이 참된 본질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결정하였고, 이를 위하여 “실체 변화” 라는 표현을 만들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1109)는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사상을 이용하여 전 신앙 유산을 오성으로 이해하여 새로 얻으려 하였다 신앙은 지성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 아니 신앙은 바로 지성을 요구한다. 예컨대 신의 존재는 성서를 통하여 계시에서 증명 될 뿐만 아니라, 오성을 통하여 피조물에서도 인식 될 수 있다.
그는 소위 존재론적인 신의 존재 증명을 도입하였다. 여기서 벌써 ’‘신앙과 이성” ‘ “계시와 자연적 인식”의 문제가 암시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도 고유한 길을 걸었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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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루카 9.3 )
1964. 9. 14일 미국 성 십자가 관구(=미국 시카고) 소속 고난회 수도자 2명이 이 땅에 도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복음’의 씨앗을 척박한 토양에 뿌렸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저희 관구는 지난 2000년 5월, 중국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1950년 초반 추방된 중국에 선교사 2명을 다시 파견함으로 중국 선교를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중국 형제들이 서안에 수도원과 아울러 여러 본당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 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임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산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권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 곧 선교사가 선교지로 파견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세상적인 재물) 지니지 않는 것, 곧 무소유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며, 또한 복음 선포자들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이며 태도입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코8,9) 복음 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난다는 것은 오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에 그리고 성령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시작하라는 의미이겠죠. 더 나아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해 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가난(=영적으로 비워있다면)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교는 쉽지 않으며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움에 목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지원보다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믿고 재물을 의지하다 보면 실망이 돌아옵니다. 헛소리가 들리며 잡음이 생깁니다. 주님께 매달려야 안정과 평화가 함께 합니다. 다만 솔로몬 임금과 같은 마음으로 선교사도 선교에 필요한 것을 매일 주님께 간청하여야 합니다. 즉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명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비록 짧지만,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살아 본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교사가 너무 물질적으로 궁핍하면 많은 분심과 걱정으로, 하지만 너무 부유하다 보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모든 일을 다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과 자만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하시며, 심지어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십니다. (9,3참조) 지팡이는 지친 여행자에겐 몸의 의지가 되는 것이며 길을 걸을 때 위험(=동물이나 뱀)을 물리쳐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심은 철저히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제자들에게는 당신이 주신 그 능력과 권한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9,1) 그 엄청난 일은 지팡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만이 그 유일한 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대신 모든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능력과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 선교사로 파견되셨던 분들이나 내일 선교지로 떠날 분 그리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선교할 우리 모두 다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과 권한만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오직 하느님 말씀의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머니를 채우고,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갖춘 새 옷 한 벌만을 입고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데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신뢰하면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9,3) <주님, 당신의 복음 선포자들이 빈손으로, 빈 가방으로 떠날지라도 당신께서 언제나 어디서든지 채워주실 것을 믿고 또 체험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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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일상적인 생활 태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특별히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의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떠날 때, 인간적인 준비와 계획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빈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니고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루카 9,1)입니다.
그 힘과 권한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합니다. 다른 어떤 준비는 없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면, 그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순간에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라는 말씀도,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 다니지 말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음식도 준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떠날 때 그를 맞아 주는 이가 있다면 그렇게 주어지는 상황을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더 좋은 집, 더 나은 대접을 찾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오늘 복음의 말씀을 꼭 글자 그대로 따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만 하더라도 필리피 신자들 말고는 다른 이들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고 자기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며 복음 선포의 일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이나 그분께 받은 파견의 자리는 없습니다.
파견은 내 계획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을 지니고 어떤 상황 속에 내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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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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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신지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그리고 여벌 옷'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라는 부정어에 앞서
'힘과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힘과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줄 수 있는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은 가지고 갈 수 없지만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더 나아가
그들의 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심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파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역설은
우리가 인간적인, 또는 물질적인 것과
하느님을 둘 다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느낄수록
더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더 잘 드러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복음이
더 잘 선포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쉬움을 느끼기에
이 방식은 하느님에게만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것을 전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좋은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에 앞서
먼저 그것을 살아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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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여름 내내 신앙학교 운영하느라 땀 흘리며 쌩고생한 형제들과 소풍을 왔습니다.
어떻게든 형제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산 너머 갯바위 포인트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물고기들도 약아 빠져 사람들 발길 닿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손맛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산더미입니다.
그걸 이고 지고, 깎아지르는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포인트에 겨우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고, 이고 지고 온 것을 다시 챙겨 산길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어디 다닐 때는 어떻게든 짐을 최소화해야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훈화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꾸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예수님의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씀인가요? 빵도 돈도 안 챙기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요?
여벌옷도 한 벌 안 챙기면, 만나는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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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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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쉽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법칙
언젠가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 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 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미는 이미 자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먹이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 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것없는 것 중의 보잘것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나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
선교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시도하는 데에서 집착이 사라지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 ‘평균 성공의 법칙’입니다.
앨런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 ‘평균 성공의 법칙’이 나옵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평균 성공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보험 영업하던 시절 그는 1:56이라는 평균 성공이율이 적용됨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보험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56명당 1명은 “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을 하루에 168번 하면 보험 계약을 하루에 3건씩 체결하게 되고, 그러면 보험 영업의 세계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게 됩니다.
앨런 피즈는 이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11세 때 집집이 다니며 고무 스펀지를 개당 20센트에 팔았습니다.
그때 평균 성공 비율은 10:7:4:2였습니다.
그는 학교가 끝나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방문판매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10곳마다 7곳이 문을 열었고,
그중 4곳이 나의 준비된 상품 소개를 들어주었으며, 그중 2곳이 고무 스펀지를 샀습니다.
다시 말해 10곳당 평균 판매액이 40센트였습니다.
그는 1시간에 평균 30곳을 돌았고, 2시간 동안
평균 12개를 팔아 평균 2달러 40센트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1962년 당시 11세의 호주 소년에게 2달러 40센트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10집당 40센트씩 번다는 것을 알고는 문을 열지 않는 3곳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관심 없다며 문을 닫는 3명과 구매를 거절하는 2명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0곳을 두드리면 40센트를 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평균의 법칙을 모르면 다음에 일어날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앨런은 방과 후에 무작위 전화 영업으로 냄비와 팬, 리넨과 담요를 팔았습니다.
이때도 당연히 평균의 법칙을 활용했는데, 활동 30여 일 만에 발견한 평균 성공 비율은
5:3:2:1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5명 중 3명이 그를 만나는 데 동의했고 3개의 약속 가운데 제품 소개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2번이었으며 2명 가운데 1명꼴로 물건을 구매해주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법칙을 쓰는 이유는 성공에 집중하여 실패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앨런은 나중에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가장 빠른 기간에 호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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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천 여 년 전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는 잘 안 맞는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이고, 영적인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도 적용되는 가르침들이고, 마음과 몸으로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가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는 극복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죄’와 ‘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극복됩니다.
‘가난’도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에 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만(몸만) 깨끗하면 깨끗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몸은 더러워도 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똑같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권한과 임무를 주시면서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더 많은 활동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활동비를 전혀 주시지 않았고, 또 ‘빈 손’으로 가라는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지시의 실천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제자들이 받은 임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복음 선포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로도 복음을 선포했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빈 손’으로 떠난 일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느님 나라의 부’를 선포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빈 손’은 세속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으로 가득 채운 손입니다.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루카 12,22-32) 연결됩니다.
만일에 활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활동비와 생활비를 많이 가지고 간다면, 그 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돈이 많다면 돈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걱정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과 걱정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 착한 사람들’이 천사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지시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를 겸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내린 이 모든 지시는, 제자들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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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1-6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많은 짐을 챙겨가는 우리들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화장품이나 휴대폰 충전기에 이르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요. 그런데 ‘혹시나’ 하는 걱정으로 무겁게 가져간 물건을 ‘역시나’ 한 번 꺼내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우리 모습을 ‘준비성’이 투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행지에 가서도 더 편하게 있고 싶고 더 많은 걸 누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어리석은 모습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고 하시는 것도 아마 그런 점을 염려하시기 때문일 겁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여행하러 가는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누리는 ‘여행’을 할 때도 기존에 소유한 것들을 싸들고 가기보다 여행의 목적을 생각하며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고 여행지에 있는 것들을 상황에 맞게 잘 이용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는 그런 점이 더 두드러지지요. 그 일을 위해서는 세상 것들에 의지하고 기대려는 마음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철저하게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만을 바라며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언가를 많이 지니고 있으려는 사람은 삶을 자기 뜻과 계획대로 하려는 욕심과 고집이 클 때가 많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삶의 여러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감당치 못할 정도로 뭔가를 잔뜩 짊어진 상태로는 인생길을 똑바로 걸을 수 조차 없지요. 그러나 소유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은 상황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춰가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보니 굳이 많이 가질 필요가 없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인생길을 여유있게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아름다운 주변 풍경도 천천히 둘러보고 여행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면서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길, 신앙의 길을 그런 자세로 걷기를 바라십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야한다는 욕심과 고집을 버리고,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 섭리에 순명하며 그분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와 보람을 찾고 기쁨을 누리며 한 번 뿐인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로 만족하려고 들면 끝도 없는 욕망에 휩쓸려 불행해지지만, 하느님으로 만족하려고 들면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소유한 것 가운데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게 있다면 그건 나에게 필요없는 ‘짐’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인 잠언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두 가지만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위선과 거짓을 멀리하는 진실함,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나에게 필요한 만큼의 재물만 바라는 마음. 우리가 행복하기엔 그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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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잠언 30,8)
잠언 저자의 기도는 우리가 새겨둘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요즈음 대기업의 가족들이
유산을 가지고 더 ‘받았네, 덜 받았네.’ 티격태격하며 재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은 곱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돈 액수의 한 부스러기라도 우리에게는 평생에 다 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 가족은 얼마나 쓰고 또 뭘 더 찾겠다고 그러는지요?
잠언의 저자가 말하는 ‘허위와 거짓말’은 부자들이 재판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메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가 아닌 매일의 양식만으로도 감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겠어요?
재물에는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나봅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번 것을 다 못쓰고 죽는 것이랍니다.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욕심에 사로잡히며 그 손으로 무엇을 잡으려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아예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는 것부터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워하는 사람이 사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지요.
그를 쓸어 트릴만한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행은 욕심에 가리어 소중한 인간관계도 잃고 자신의 기쁨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빌려 쓰라고 주신 재물을
자기만의 소유로 여길 때에 불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디 철저하게 무소유로 살 수가 있겠어요?
필요한 것만 원하면 자유롭고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시골에서 휴가 중에 집에서 누리던 것들이 없어서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이것이 필요하겠다.’하고 산 것이 떠날 때에는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더욱 새롭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그리고 또 사람에게서도 자유로움을 주문하십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으로 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라고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 당부대로 따르며 어디에서나 복음 선포에 충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았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막상 어떤 재물을 보거나
또 얻을 기회가 맞 부닥치면 마음의 욕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없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도 막상 욕심이 생기면 문제가 발생하고
또 갈라지고 반목의 일이 생기는 모습을 주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도
거듭 당부하시는 것은 나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이시지요.
주님 말씀대로 따르면 나는 얼마나 자유롭게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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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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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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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5.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은혜를 기억하고 죄를 회개하는 삶
<2024.9.25>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3:1~13절)
❝은혜를 기억하고 죄를 회개하는 삶❞
❚ 하나님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 그 간구를 들으시고 도와주십니다.
✔ 하나님의 무엇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절).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유다의 요아스 왕 제 23년에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17년간 다스렸습니다(1절). 그러나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2절). 이에 하나님은 노하셨고, 그들을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습니다(3절). 여호아하스는 아람 왕의 침략을 받아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자 하나님께 간구하니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고 있음을 보셨기에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4절).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람 사람의 손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셨고, 그들의 장막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었습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에 빠져 있든지 잘못을 시인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그분에 품에 안아주신 분이십니다. 현재 우리 자신이 아픔을 겪고 있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고질적인 죄악 때문인지 정직히 돌아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지만, 징계 또한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백하므로 죄를 용서받고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9절).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즉, 풍요와 번성에 있어 여호와를 대신하는 것처럼 여겨지던 아세라 신상은 예후의 종교 개혁 때에도 제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6절). 죄로 인해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람의 침략으로 인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습니다. 곡식을 타작할 때 타작마당에서 타작기로 후려치게 되는데, 이때 타작기로 두드려 맞아 먼지같이 된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에게는 겨우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명 만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7절). 여호아하스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받으며 생애를 마감했고, 사마리아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9절). 그가 우상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에 묻혔다는 것은 예후에게 약속된 4대의 왕조의 계승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10:30; 15:12).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간구했던 것을 들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쉽게 잊고 죄악을 행하던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여호아하스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 은혜를 망각할 때, 결국 죄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잊은 채 과거의 더러운 죄 위에서 다시 뒹굴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0~13절).
유다 왕 요아스의 제 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렸습니다(10절).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걸었다(11절)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유다왕 아마샤와 싸운 업적을 소개한 후 죽으니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12~13절).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해 살지 않았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복음으로 생명을 구원하며 살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함과 명예와 권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멸망의 길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따르는 심판과 함께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용서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우리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주신 은혜를 잊어버린 채 과거의 잘못된 죄악의 삶에 다시금 뒹굴지 않도록 영적으로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3:1~1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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