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네이버에 '라인 넘겨라' 일본이 미국 흉내 내고 있다 / 5/17(금) 한겨레 신문
최기영 서울대 명예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지난 2018년 관세 부과로 표면화된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기술패권 전쟁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2019년 일본은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문제 삼아 소재, 부품, 설비 수출 규제라는 엉뚱한 방안을 내놓았다. 미국이 안보를 문제 삼아 화웨이 ZTE 등 중국 기업의 통신장치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자 일본도 안보를 핑계로 한국을 백색국가(현 그룹A: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이 잘하는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주려 한 것이다. 소재, 부품, 장치는 반도체 산업에 필수불가결하지만 한국이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했을 것이다.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칩 및 과학법(CHIPS법)은 미국 정부가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인텔과 같은 미국 반도체 기업뿐 아니라 대만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만들도록 함으로써 미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시도했다. 동시에 중국에 대한 투자를 금지하는 일거양득의 조치였다. 첨단 반도체는 패권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중국이 아직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그러자 일본도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해 대만의 TSMC뿐 아니라 삼성전자의 투자도 유치했다. 이 역시 일본이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위해 미국이 취한 방법을 따라 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들어 미국은 자국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SNS 앱 틱톡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 기업 바이트댄스(틱톡의 모회사)의 미국 사업권에 대한 강제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자 일본 역시 일본에서 80% 이상이 이용하는 메신저 앱 '라인'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국 기업인 네이버가 가진 주식 매각을 압박했다. 네이버는 일본에서 라인을 운영하는 라인 야후의 지주회사 A홀딩스 지분 50%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왜 이처럼 연거푸 한국의 첨단산업 발전을 방해하는 것일까. 미국은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전사를 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큐디데스의 이름을 딴 투키디데스의 함정(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을 동반한다는 이론)이 언급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사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것을 그대로 한일관계에 적용한다면 일본은 자국을 추격하고 있는 한국을 견제하려다 투큐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일본은 왜 미국의 흉내를 내는가. 우연히 움직임이 같아져 마치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이 했으니 마음 놓고 따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할 한국이 미국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일본을 비난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미국과 적대관계인 중국과는 달리 한국 정부는 우방국을 표방하며 일본에 사상 최대의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도 일본은 일관되게 한국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직도 일본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한국의 이익은 챙기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으로서는 참으로 화가 나는 일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을 흉내낼 뿐이었지만 한국이 저자세를 이어간다면 안심하고 미국의 모방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된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국익을 지키는, 아니 적어도 큰 손해를 보지 않는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최기영 | 서울대 명예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문의 jap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