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시황까지 진나라 역사
(1) 중국의 서쪽 산악지역에 뿌리를 둔 볼품 없는 나라에서 시작하였다.
진의 양공이 주나라에 공을 세워 식읍을 받아서 진양공이 되었다.(~공의 칭호는
일반적으로 제후의 지위에 오르면 붙여준다.)
(2) BC 7세기 경 — 목공이 백리해를 등용하여 둥쪽으로 진출한다.
(3) 효공 때( ) -- 상앙을 등용하여 변법(법치주의)을 사용한다.
(중국사에서 변법이란 개혁정치를 뜻한다.)
진이 강국의 지위로 오른다.
(4) -- 소진 — 합종정책(6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
장의 - 秦에 가서 연횡책, 원교근공책을 편다.
*소진과 장의는 귀곡자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소진이 먼저 출세했다. 아직 빌빌거리던 장의는 소진을 찾아갔다. 소진은 모르는 척하자, 완전히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 뿔이 나서 다시 진나라로 찾아갔으나, 권력중심부에 줄을 대지 못하고, 빌빌거릴 때, 돈 많은 상인이 다가와서 뒷돈을 대주고, 왕에게 등용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자리를 잡자 상인이 떠나려고 하여 붙잡았더니 자기는 소진이 시킨대로 했다면서, 푸대접한 것도 일부러 그랬다고 하였다. 장의는 역시 그가 나보다 뛰어나구나 하면서, 소진이 있는 한 합종책을 깨려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수 십 년은 늦어졌다고 한다.(유투브식 뉴스이겠지만)
2) 진시황의 직계 조상 이야기
(1) 징조부 --- 소양왕(영직)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범저를 등용하여 최고이 강국이 되었다.
(2) 할아버지 --- 안국공
소양왕의 작은 아들로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당시는 왕의 아들이 적대국에 인질로 가 있는 것이 관례였다.)
대 상인인 여불위가 안국공에게 접근하여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여불위가 막대한 투자를 하여 장남이 아닌 안국공을 태자로 정하는데 성공한다.
(3) 아버지 --- 장양왕, 안국공의 아들로 이인이고, 진시황의 아버지이다.
이인이 적대국인 조나라로 인질로 가서 푸대접을 받고, 쓸쓸하게 보낸다.
여불위가 접근하여, 온갖 서비스를 모두 제공한다.(장사꾼이 정치에 투자가 가장
큰 투자라는 관례를 만들었다.)
이인이 자기의 애첩 조희를 좋아하는 눈치가 보이자 선물한다. 이때 조희는
여불위의 씨를 가졌다고 하니 — 아마도 한나라에서 진시황을 깎아내리려는
가짜 뉴스일 가능성이 많다.(사기를 쓴 사마천이 한의 관료이고, 유가이다.)
이인에게 배팅한 여불위의 투자가 성공하여 이인을 태자로 만들고, 장양왕을 만들고,
장양왕의 아들을 진시황을 만든다.
(4) - 조희 이야기
조희는 여불의의 첩이었으나, 여불위가 이인에게 선물로 준 여인이다. 이인이 왕위에 오르자(장양왕) 왕후가 되었고, 장양왕이 죽은 후에는 왕태후에 오른 여인이다.
첩 출신답게 음란함이 몸에 베어서 과부가 되고 나서도 남자를 밝힌다. 처음에는 여불위를 찾았으나 명석한 여불위는 노애라는 남자를 소개해준다. 노애는 환관으로 위장하여 왕태후 방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아이까지 낳는다. 여자를 꼬시기에 멋진 몸을 가졌지만 머리가 모자란 그는 온갖 권력을 행사한다. 이 말이 진시황의 귀에 들어갔다. 진시황은 노애와 조희가 낳은 노애의 아이들과, 노애의 일족까지 리무진이 아니고 덜덜거리는 버스를 태워서 모두 황천으로 단체 여행을 보내버렸다. 조희는 어미라고 살려주었다.
여불위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은퇴하여 낙양으로 내려가서 살려고 하였다. 이때 진시황으로부터 속달 편지가 한 통 왔다.
“당신은 이 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다고 어쩌구저쩌구---” 눈치 빠른 여불위는 혼자서 배낭을 메고 황천 여행을 선택했다. 혼자만 죽었다. 뒷 이야기는 조희와 연관시키지만 역사학자들의 평은 ‘여불위의 권력이 군권을 휘두를만큼 막강해서, 진시황이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여불위는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자기에게 몰려오는 권력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앞에서 걸기적거리는 것은 모두 치워버렸다. 이제부터는 ------
(여불위는 ‘여씨춘추’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