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긴 왜 울어 -1-
엄마는 2014년 10월 18일에 눈을 감으셨는데 나는 매번 이 날짜를 잊어버린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아니면 우리가 함께 견뎌낸 어마어마한 시간에 비하면 정확한 사망일 따위는 너무 하찮게 느껴저서인지, 엄마는 나이 쉰여섯에 돌아가셨다. 당시에 나는 스물다섯이었는데, 엄마는 그전부터 내게 이 나이 때가 인생에서 얼마나 특별한 시절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엄마가 아버지를 만난 것도 그 나이 때였다.스물다섯은 두 분이 결혼식을 올린 나이였고, 엄마가 자신의 나라와 어머니 두 자매를 떠나 독립한 성인으로써 삶에 첫발을 내디딘 나이였다. 앞으로 자신을 규정하게 될 가정을 처음으로 일군 나이였다. 그리고 내게는, 내 인생의 밑 그림을 그려야 했던 나이였다. 불행하게도 엄마의 인생이 끝장나고 내 인생이 갈기갈기 찢겨버린 나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 날짜를 엉터리로 기억해서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가을이 오면 나는 늘 엄마의 기일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뒤적여 묘비 사진을 찾는다. 지난 5년 동안 내가 놓고 온 알록달록한 꽃다발에 묘비가 가려져 잘 안 보이면, 인터넷에서 당시에 제대로 쓸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엄마의 부고 기사를 검색해본다. 그렇게 나는 내가 의당 느껴야 할 감정과는 약간 다른 어떤 감정에 작정하고 빠져들 준비를 한다. 아빠는 날짜 강박증이 있다. 누군가 생일이나 기일이나 기념일, 명절 따위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몸안의 시계 같은 것이 윙윙 울려댄다.
그날이 다가오면 일주일 전부터 아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울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곧장, 이 모든 게 얼마나 부당한지,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절대 모를 거라는 페이스북 메시지 홍수에 나를 빠뜨린다. 그러고선 곧장 오토바이을 타고 엄마가 돌아가신지 1년 후부터 은퇴해 살고 있는 푸켓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따뜻한 해변과 거리에서 파는 해산물과 프라블럼problem이란 단어의 철자조차 모르는 젊은 여자들로 그 공허를 채우면서
나는 엄마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절대로 못 잊는다.엄마는 늘 먹던 대로 음식을 먹는 분이었다. 쇼핑하러 가는 날이면 꼭 마지막 테라스 카페에 들러 호밀빵 치즈버거와 두껍게 썬 감자 튀김을 시켜 나와 반씩 나눠 먹었다. 아이스티는 무가당으로 주문해서 스플렌다 반 봉지를 넣어 먹었는데, 그때마다 다른 음식에는 절대 이 감미료를 넣지 않는다고 말했다.
올리브 가든 레스토랑에서 미네스트로네[야채와 파스타를 넣은 이탈리아식 수프]를 주문할 땐 반드시 육수를 추가하고 뜨겁게 해달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그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스티밍 핫steaming hot'이 아니라 '스티미 핫steamy hot'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썼다. 특별한 날에는 포틀랜드의 제이크 해산물 식당에서 굴 여섯 개가 샴페인 미뇨네트소스와 함께 나오는 메뉴와 프렌치 어니언 수푸를 시켜 먹었다.
아마 엄마는 전 세계를 통틀어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서 진지하게 '스티미 핫'한 감자튀김을 주문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카페 서울에 가면 엄마는 늘 짬뽕이라고 부르는 매운 해물국수를 먹었고, 그때마다 채소를 듬뿍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카페 서울'은 으레 '서울 카페라'고 불렀는데,그게 엄마 모국어 어법에 더 잘 맞아서였다. 겨울이면 군밤을 자주 먹었다. 그걸 먹으면 여지없이 속이 부글거렸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마는 순한 맥주에 짭짤한 땅콩을 안주로 곁들여 먹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샤르도네 두 잔을 마셨는데, 거기서 한 잔만 더 마셔도 속탈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