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62
5월19일[성령강림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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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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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38VBPl6Ex4
[마산교구 최봉원 야고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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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잔뜩 사로잡힌 나머지 문까지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동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제가 스승이었다면 가장 필요한 순간 줄행랑을 놓은 제자들을 보자마자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에, 너희들이 대체 불벼락을 내렸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그게 할짓이냐? 그러고도 어떻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조목조목 잘못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른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샬롬!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어서 아직도 굵은 못자국이 선명한 당신의 두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아직도 당신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확증시켜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숨은 우리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런 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그 숨으로 인해 살아있기는 하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제자들은 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 숨으로 인해 제자들은 존재의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도 자신의 내면 안에 영생과 구원의 씨앗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주님을 전하는 일이라면 목숨조차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극복 못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새로 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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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jYLaJsc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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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만 없으면 성령께서 오신다 >
영화 ‘언 브로큰’은 최연소 미국 5,000미터 올림픽 대표로 뽑혔던 루이스 잠페리니의 생존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그린 영화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잠페리니는 미 공군 폭격수로 입대합니다. 그러나 1943년,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에서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합니다. 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구명보트에서 47일간 표류하며 극한의 생존 싸움을 벌인 끝에 구조됩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조한 배는 일본군의 배였습니다. 잠페리니는 850일간 여러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며 가혹한 고문과 학대를 겪습니다. 특히 새디스트로 알려진 와타나베 무츠히로라는 일본 장교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당합니다. 와타나베는 잠페리니의 정신을 꺾으려 하지만, 잠페리니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잠페리니는 살아남아 귀국하지만, 전쟁 중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악몽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립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 와타나베를 찾아가 복수하려고 결심합니다. 1949년 그의 아내 신시가 잠페리니를 빌리 그레이엄의 복음 전도 집회에 데려갑니다.
집회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인간의 죄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며,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설교에 반감을 품었고, 집회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루이스는 전쟁 중 구명보트에서 바다에 표류하며 하느님께 한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구출된다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기도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레이엄의 설교를 들으며, 하느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께 구원을 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깊은 내적 평화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 신적 체험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하게 체험하였고, 그 순간 그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 이후, 루이스는 알코올중독을 극복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와타나베 무츠히로를 용서하려고 했으나, 와타나베는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잠페리니는 그를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자신의 내적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 잠페리니는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을 하며 못 이룬 꿈도 이룹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시며 가서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나 ‘핑계’는 성령강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 없다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성사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위한 성령강림까지 포기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능력이 없는 이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십니다.
허버트 박사는 언어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 침팬지 님 침스키를 언어학자인 스테파니와 살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침팬지가 사춘기가 되자 폭력성이 드러나 더는 스테파니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침팬지 무리로 돌아간 님 침스키는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습니다. 스테파니가 불쌍히 여겨 그에게 다가갔지만, 침팬지는 분노로 스테파니를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내팽개쳤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능력을 그것을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핑계 대지 말고 용서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고정원 씨와 다른 유영철의 피해자들과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고정원 씨는 용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용서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강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조금씩 미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유영철을 양자로 삼습니다. 용서하라고 했다면 죽기까지 용서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핑계 대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사랑으로 이끄시기에, 결국 사랑은 의지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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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가장 연장이신 분이 87세 이었습니다. 가장 젊으신 분이 77세 이었습니다. 77세 회장님이 막내로서 역할을 다 해 주었습니다. 음식도 주문하고, 술도 주문해 주었습니다. 77세면 어디 가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인데, 그날은 형님들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저는 전임 회장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갔습니다. 경험과 연륜이 높으신 회장님들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경청의 자리였지만, 어찌 보면 제가 면접을 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회장님들은 제게 몇 가지 질문을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이 가지고 있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는 단기, 중기, 장기의 플랜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희망이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와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에서 멋진 사제들을 보내 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와 부주임 신부님은 서울대교구에서 최상급의 사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본당 교우들의 전체 세대수를 파악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구역미사를 함께하고, 다음에는 가정 방문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당을 지켜 오신 분들에게 새로 온 신자들이 조금을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지순례도 가고, 본당 체육대회도 하고, 전 신자 여름 캠프도 가고, 송년모임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의 주소록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본당 사제로 있을 때는 ‘신자수첩’을 만들었습니다. 신자수쳡에는 본당의 사목방침을 수록했습니다. 본당의 조직도를 넣었습니다. 기도문을 수록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넣었습니다. 전임 사목회장님들과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한 것이었습니다. 87세의 연세에도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은 20대의 청년과 같았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하늘에서 성령의 은사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서 성령 7은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60을 갓 넘은 사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지켜왔던 본당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희망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오랜 이민 생활에서 축적된 삶의 지혜와 용기를 보았습니다. 77세 막내 회장님께서 이런 모임을 자주 갖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부부동반으로 만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굳이 저녁시간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굳이 예루살렘이 아니어도 되듯이, 만남의 시간이 굳이 저녁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의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만남을 통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의 진정한 의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강림의 커다란 의미는 ‘하나 됨’이라 생각합니다. 분열과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 신분과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사도들의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는 나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관계가 분노와 미움, 욕심과 질투입니까? 아니면 평화와 기쁨, 용서와 사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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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은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불길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상징하는 사도들에게 변화의 능력을 직접 주신다. 이제는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열렸다. 즉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마련해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이 근본적으로 '새로움'을 갖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결실이기 때문에 종족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외적 풍습 등의 장벽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이끌어 들이신다. 신비스러운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인간들의 정신과 마음을 내적으로 비추어 서로 일치시키는 힘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변화와 정화의 불로 세례를 받고 그 타오르는 연기와 불꽃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만한 증거자들과 중개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이래서 교회는 항상 새로운 성령강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오늘 복음은 파스카 당일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장면과 성령에 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의 발하심과 파스카 축일과 같은 날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곧 성령강림의 근원이다. 제1독서와 같이 복음에서도 선교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즉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는 빛과 힘을 주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복음선포를 지향하고 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의 얼굴에 생명의 숨을 부어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세 2,7). 이것은 성령의 창조활동으로 선교사명에 따라 사도들만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성령의 입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령의 힘은 죄의 용서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다시 말해서 성령의 쇄신활동은 성령께서 어느 곳에 머무르시게 되든지 간에 죄에 대한 승리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죄를 비난하고 고발하며 복음의 빛을 통하여 사랑의 행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곳에 성령의 창조적 능력이 실현될 공간이 마련된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몸인(1코린 12,12) 교회의 단일성의 원리로서뿐만 아니라, 그 지체들이 맡는 역할 또는 은총의 선물의 다양성을 이루는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일성 안에서 다양성이 넘쳐흐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분별하게 다원론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과 공동체성을 해치고 있는 현세대에 적절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변화의 은총을 주신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며, 이 은총을 통하여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분이시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초대교회가 체험했던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께 우리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를 지내면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 항상 깨어있으면서 그분께 우리 마음을 항상 개방해 놓을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얼을 거두시면 그들은 숨져버려 드디어 티끌로 돌아가고 마나이다.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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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부활 시기 내내 봉독된 요한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에 견주어 ‘부활 사건’을 길게 서술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며 부활을 통하여 또 다른 단계의 구원 사업이 시작됨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서의 성령 강림은 부활과 성령을 함께 연결시켜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의 ‘숨’(영)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됨을 선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는 성령 강림이 오순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성령 강림이 부활의 직접적 선물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러한 새 창조의 특성이 소통과 일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이들이 마치 하나의 언어를 쓰듯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데, 이는 소통과 일치야말로 성령의 일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임을 표명합니다. 제2독서는 언어뿐 아니라 각자의 은사와 직분 그리고 활동이 다르지만, 교회 구성원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룸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는 소통과 일치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실체인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피폐하게 하는 것은 오해와 불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의 모든 모욕과 비난, 굴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참된 소통과 이해, 포용에서 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 말씀들은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소통과 이해, 그로 말미암은 일치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먼저 소통과 이해가 보장되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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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1-8)
1)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어일까? 천주교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라틴어일까?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일까?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일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언어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공용어부터 배워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호기심과 궁금증일 뿐입니다. 실제 상황이 어떨지는 그날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각자 사용하는 말이 달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나라”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 그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 이야기’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도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준 표징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1요한 4,16), 하느님 나라의 언어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대화가 이루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장벽이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서 없앤 일이고, 마음의 벽도 허물어서 없앤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같은 마음의 장벽.>
3) 그렇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능력이 그 자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생긴 것인지...... 결과만 놓고 보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기적은 사도들보다는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하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의 수는 삼천 명보다 많았을 텐데, 똑같은 은총이 내려도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된다는 것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내렸을 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나섬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삼천 명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려고 노력했고, 알아들었고, 변화되었고,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사도 2,41)
4)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소통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일치와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남 탓’만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통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장상들만의 탓인가?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만의 탓인가? 그게 정말로 ‘남 탓’뿐인가? ‘내 탓’은 없는가? 소통과 일치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부터 노력해라.”라고 비난하는 모습 자체가 불통의 모습입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소통과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남 탓’만 하다가 더 큰 불통과 분열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악령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입니다. “일치는 성령의 일이고, 분열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성령의 일이고, 교만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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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영적으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오십 일째 되는 날, 약속대로 협조자이신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었고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평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평화, ‘위로부터의 평화를’ 주십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행동은 마치 흙으로 빚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는 창조주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창세 2,7 참조)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숨으로 표현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제자들은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의 모습은 오늘 1독서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이야기에서 더욱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제자들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그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제자들은 복음 선포의 길고 험한 여정에도 끝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성령 강림 사건은 초대 교회의 탄생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교회 성장과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영은 늘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을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듯이 당신의 영을 통하여 굳게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깊이 좌절하고 힘들어할 때에도 그분께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와 함께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으나 지금 좌절해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 현존을 깨닫게 해주고, 위로의 은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넘어 진리를 증언할 수 있거나,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내거나,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들을 용서하게 된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의 의미는 이상한 언어를 말하거나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을 얻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얼마나 깊이 우리 삶에 개입하고 계시는지 깨닫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이미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보다 더 민감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복음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한 성찰의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찾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우리를 항상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성령께 감사드리며 필요한 은총을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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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준원 미카엘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영이며,(창세 1,2)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생명의 숨이시다.(창세 2,7) 그렇게 한처음에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시어 제자들에게 다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다. 창조 때의 숨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입김이었지만, 오늘 예수님의 숨은 주님의 부활로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천국의 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입김이다.
어떤 교우 이야기이다. 그는 한 형제가 자기에게 한일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괴로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지 않겠는가? 그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도 못자고 소화도 안되고 늘 짜증만 났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국 주님께 빌었다. “주님, 제가 괴로우니 제발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중에 말씀이 들려왔다. “십자가를 끌어안아라.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십자가를 끌어안고 보라.” 그 말씀을 듣고 그는 집에 있는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문득 주님의 고통과 함께 사랑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한다. 주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용서 못 할 일이 무엇이랴? 그는 십자가의 도움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오늘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특별히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 말씀은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이 용서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오늘 독서에서도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표현의 능력을 주셨으며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데, 언어가 다르지만 서로 말이 통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서로 말이 통해서 대화를 하게 되었고, 화해하게 되었고, 결국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의미도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 다른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쩌면 성령을 받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가려는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용서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성령 강림 대축일에 주님의 성령을 다시금 묵상하며 나도 혹시 용서 못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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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기범 시몬 신부님]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십시오! 뜬금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라고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자유로움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을 잉태할 때,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내려오신 성령과 마리아를 덮을 것이라고 말한 성령님께서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성령님과 다른 성령님이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분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합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곧 하느님 자녀로 다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삶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비추어 주시는 삶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 성령 강림 대축일 주보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새얼센터라는 곳에서 많은 놀라운 일들을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 여러분에게는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사랑! 이라고 다가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자녀인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돌보시는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성령과 함께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평화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이미 지극히 높으신 분의 사랑 안에 살아가고 있음을 성령께서는 깨닫게 해주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평화를 빼앗아 가고, 무엇이 여러분의 자유를 빼앗아 갑니까?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보다 더 큰 것입니까?
오늘 전례 안에 부속가로 성령 송가를 바칩니다. 그 성령 송가를 자주 바치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 청하십시오.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평화로워지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성령님! 저를 온전히 차지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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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랑스 아르스에 위치한 작은 시골 교회 사제였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 본당에 다니는 한 자매님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얼마 전에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안네 성인은 “남편은 구원받았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인, 남편이 지금 연옥에 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리 난간에서 물로 떨어지는 순간에 참회했어요.”
자매님은 성인의 말씀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지금을 더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씀은 단순히 이 자매님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무한의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 안에서 회개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던 이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어떤 자살자의 장례 미사를 부정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것인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측면에서는 ‘괘씸하고 못된 놈’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며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빨리 하느님 나라 안에서 당신과 살도록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함을, 또 그 사랑에 온 희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사랑이기에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령 강림을 통해 그 사랑이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통해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9장에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소년의 아버지가 “주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 완성을 위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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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은 ‘보호자’(파라클래토스)라는 뜻과 함께 ‘변호자’, ‘협력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증언할 때 지혜로써 변호자가 되어주시고, 직무를 감당할 때 능력으로서 협조자가 되어주시며 증거적 삶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시는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 것을 우선하던 마음을 천상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험한 유혹에도 견디게 합니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미사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만큼 그에 걸맞은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혜, 통찰(깨달음), 의견(일깨움),용기(굳셈), 지식(앎), 공경(효경), 경외(두려움)을(이사 11장 참조) 얘기하고, 갈라디아서에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아주 다양하고 오만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고 하는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참례를 그저 의무로만 했고, 짧은 미사를 가느라 어린이 미사에만 갔는데 이제는 미사에 맛 들여 매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의 눈물도 흘립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는데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주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 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 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 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 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 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이하) 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래토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 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언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 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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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양심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는
먼지 같은 삶에 새 생명 불어넣는
거센 바람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사그라지는 검은 재 가득한
어둠 같은 삶을 환히 밝히는
찬란한 불꽃으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벗들의 심장을 겨눈 비수 같은
독을 머금은 말들을 흩어버리는
생명의 말씀 품은 혀들로 오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과 갈림 없이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온 누리에 드러내는
슬기(지혜)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발 딛고 선 지금여기 깊이 스며든
시공을 초월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아
‘이미’와 ‘아직’ 사이의 하느님 나라를 사는
깨달음(통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교묘히 본색을 숨긴 악의 민낯을 밝혀내고
악에 짓눌린 가녀린 선을 들어 높이는
일깨움(식견)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불의에 무릎 꿇어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사랑과 정의의 제단에 기꺼이 몸 바치는
굳셈(용기)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순간의 달콤함으로 유혹하는 헛된 거짓 물리쳐
이제로부터 영원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보듬는
앎(지식)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는
받듦(공경)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하느님의 자녀요 벗으로서
하느님과의 단절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헌신케 하는
두려워함(경외)의 은사 베푸소서.
성령이여 어서 오소서.
이 땅의 모든 이를 당신으로 채우시어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열매를
암울한 세상을 이기는 희망 가득한
기쁨의 열매를
하느님과 모든 벗들이 하나 되는
평화의 열매를
자유와 해방의 발걸음 이끄는
인내의 열매를
주님의 가장 작은이들을 품에 안는
호의의 열매를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일구는
선행의 열매를
뭇시선 의식하지 않고 제 소명에 충실한
성실의 열매를
약한 자에 약하고 강한 자에게 강한
온유의 열매를
감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하는
절제의 열매를
지금까지처럼 이제와 영원히
저희 안에서 저희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맺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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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태리로 유학을 가라는 발령을 받은 뒤 처음으로 이태리어를 접한 날을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독일어를 공부한 저에게 이태리어는 너무나도 생소한 언어였습니다. 발음도 발음이거니와 같은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와 시제마다 형태가 변한다는 사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언어 체계였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녁을 먹는다. 당신이 저녁을 먹는다. 그가 저녁을 먹는다. 라는 말을 할 때 우리나라 말은 모두 “먹는다”라는 동일한 동사를 쓰지만 이태리어 동사는 각각 다르게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제마다 또한 그 형태가 변화되니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나마 읽고 쓰는 건 생각할 시간이라도 있지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각기 다른 동사 변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서른이 넘어, 내가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해 배우게 된 낯선 언어.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어설프게 배우고 이태리에 나가서 생활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 심지어 이런 수준으로 나가 석사학위 박사학위를 받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온통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찌됐건 교구에서 명하였으니 유학을 나가긴 나가는데 그에 따를 고통스러운 시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태리에 가보니 한국에서 몇 개월 배운 이태리어는 약 일주일이 지나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말은 어찌나 빠르고 성격은 또 얼마나 급한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어학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한국 신부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성령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들은 오순절을 맞이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앉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 개별적으로 선교를 하게 되는, 즉 다양한 지역에서 교회가 설립되는 시작점입니다. 이 언어의 능력으로 제자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하게 되고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니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약속하신 ‘진리의 영’이 마침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태리로 왔는데 '주님께서 하실 수만 있다면 나에게도 이태리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성령 쯤은 보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5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즉, 정확히 작년 이맘 때 즈음 저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유학 생활을 마무리 한 채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흐른 지금, 지난 유학생활을 돌이켜 보면 ‘이태리에서 참 많이 힘들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언어로 공부를 하느라 난감했던 시간,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군대를 다시 가면 다시 갔지 다시는 유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향했던 여러 가지 도움의 손길도 떠오릅니다. 낯선 언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 제 말을 경청해주시며 격려해주시던 교수님들, 저의 강론과 과제를 한땀 한땀 매만져주시던 할머니 수녀님들, 함께 공부하며 서로 힘을 냈던 외국인 친구들, 많은 기도로 지원해주신 신자분들, 없는 시간을 쪼개 언제나 꼼꼼이 저의 논문을 봐주신 지도 교수님들을 상기해 보면 그들의 도움 없이 과연 내가 건강히 비교적 짧은 시간에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동료 사제들과 우스갯소리로 나누었던 말, 즉 예수님께서 고생하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실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는 수많은 성령의 은총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의 기도와 주변의 배려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지혜>의 은총이 있었고 공부를 통해 신앙의 진리를 깨닫는 <통찰>의 은총이 있었으며 유학 생활의 힘든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게되는 <식견>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노력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용기>의 은총이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은총 또한 있었으며 외국인들을 형제자매로 대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공경>의 은총을 배웠고 이를 통해 성숙한 사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외>의 은총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시어 순간순간 지치고 힘든 시간마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 안에서 우리는 때로 기적을 꿈꾸고 주님의 현존을 원합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움직임으로 인해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고 주님의 실재를 의심하거나 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총이란 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이야기 하듯, 주변 이웃들의 은사와 직분을 통해 성령의 은총들이 모이고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오늘 미사 후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 뽑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가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담대히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 미사 중에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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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이다”>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 아침기도 초대송 후렴과 이어지는 찬미가를 부르며 저절로 나온 탄성입니다. “참 아름답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따라 사는 성령의 사람이야 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침 독서도 첫 구절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8,5-6)
사람은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습니다. 길을 찾습니다. 빛을 찾습니다. 희망의 길,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의 빛을 찾아 새벽 강론 쓰기전 세상 소식을 대략 일별해 보기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나 대부분 어두운 소식들입니다. 지극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교황님의 홈페이지 뉴스를 보며 희망을 발견합니다. 어제는 교황님이 이태리의 베로나 도시를 방문하여 말씀하신 여러 내용들의 제목이 신선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예수님과 함께 파도를 거슬러 앞으로 나가십시오.”
베로나의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미래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베로나 시민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그리고 타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눕시다.”
베로나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고백성사가 고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베로나의 사제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온전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성령충만한 삶을 청하겠습니까?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성령뿐입니다. 사랑의 성령, 생명의 성령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마름을,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이어지는 성령강림 부속가 기도는 얼마나 좋았는지요! 앞부분만 잠시 인용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없는 이의 아버지, 은혜를 주시는 이, 마음들의 빛이여.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흐뭇한 안식이여”
참 좋은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목마른, 성령에 배고픈 우리들입니다. 도저히 성령이 아니곤 해결될 수 없는 목마름, 배고픔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입니다. 주목할 것은 공동체에 주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인 듯 하나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둘의 독서와 복음을 보세요. 모두가 공동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누가 성령의 사람입니까?
첫째,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오순절이 되어 사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며, 불꽃 모양으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습니다. 실감나게 묘사되는 성령강림입니다. 놀라운 것은 불통의 공동체가 소통과 더불어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마침내 모여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성령입니다. 이래서 공동체가 중요한 행사나 회의때에는 “오소서 성령이여” 성가 142장이나 494장을 부르기도합니다. 공동체가 바치는 참 좋은 기도입니다. 오늘 시간되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비상한 성령강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을 잘 아시는 주님은 참으로 겸손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성령을 선물하시어 불통과 분열의 공동체를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로 바꿔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분열의 사람이 아니라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둘째, “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여럿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요, 직분은 여럿이지만 같은 주님이요, 활동은 여럿이지만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요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공동체를,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을 위해 쓰라 선물로 받은 은사임을 깨닫는 다면, 자랑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요 교만은 커녕 저절로 겸손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은사와 공동선의 사람이자 동시에 감사와 겸손의 사람입니다. 감사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셋째,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파스카 주님이,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복음을 보십시오.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은 공동체 가운데 오시어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이 함께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기쁨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이런 주님의 평화와 기쁨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빼앗아 갈수도 뻬앗아 올수도 없는 평화와 기쁨이요 이는 순전히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넷째,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파견과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동시에 파견하시며, 또 성령도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성구 앞절(요한20,21)은 반갑게도 어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이한 빠코미오 원장 수사의 서품상본의 성구입니다. 공동체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부단히 평화와 용서의 사도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선물이요 과제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과제입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1.‘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2.‘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3.‘평화의 기쁨의 사람’입니다.
4.‘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성령의 사람, 주님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고,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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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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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ㅊ1? 내려오시면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찰까?
이것이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저에 대해 하는 성찰이고, 제가 우리 공동체들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나에게 내려오시길 바랄까? 우리 공동체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길 바라는 공동체일까?
우리는 영성 생활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고, 감히 영성 생활 공동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런데 영성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정신(spirit)을 사는 삶, 성령(Spirit)을 사는 삶이 아닙니까?
성인들 특히 프란치스코는 영을 많이 강조했고 성령으로 살았습니다.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이니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이니 기도와 헌신의 영(spirit of prayer and devotion)에 관하여 얘기했고, 영이 아니면 하느님 아버지도 성체 안의 주님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생애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으로 깨달았고, 충만했고, 이끌렸습니다. 육의 영이나 심지어 악의 영에 이끌리는 우리와 그래서 달랐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육의 영 또는 더러운 영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세상 욕망과 세상 욕심이 많고,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 무리 속에서라도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떠날 줄 알아야 하는데 훌훌 떠날 줄 모르고 더럽게 집착하고 안주합니다.
또 악의 영에 이끌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정도를 넘어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인 한 존재를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일치의 정신 또는 사랑과 일치의 영은 아니 계시고, 미움과 분열과 파괴의 영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집을 나왔던 악령이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은 깨끗이 비어 있었고, 그래서 일곱 마리의 악령을 더 데려왔다는 비유와 같은 겁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성령께서 머물 곳이 우리 안에 없기도 하지만 성령을 모셔 들이지 않았기에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설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치를 갈망해야 합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은 증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열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잘난 체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덕이 악습을 몰아내게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動搖)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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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오순절!>
오늘은 '가톨릭 교회의 4대 축일'(주님성탄대축일, 주님부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 성모승천대축일) 가운데 하나인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을 기념하는 큰 축일'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 오십 일이 되던 날(오순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20,19-23)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1-22)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믿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성령강림일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한 날'로 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해냅니다. 아가페 사랑을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너를 용서하고, 너와 화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하느님 나라인 천국의 기적'입니다. '나의 은사와 직분과 활동이 지향하는 공동선의 모습'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으려면, 온전한 마음과 정신과 힘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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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qsBIi6ZM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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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역경과 시련을
넘어서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성령 강림으로
시작됩니다.
교회의 시작이며
교회의 길이 되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쁜 소식을
안겨주십니다.
막힌 용서와
막힌 화해를
성령께서
뚫어주십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건네십니다.
내어주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면
닫힌 것이
열리는 것이
성령 강림의
기쁨입니다.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움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놀라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치와 기쁨을
이루시는
성령께서는
교회 구성원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 강림은
고집스러운
우리를
받아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생명의 숨결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새날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 모두를
귀하게
만드십니다.
성령께
의탁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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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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